연속수상고향하늘에 띄우는 편지 2

덴마크 로모섬 여행중에 아들 유진과

워낙 건강체질이던 내가 오랜만에 지독한 감기몸살을 앓았다. 올 겨울은 유난히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어야 할 때 쉬지 않고 몸을 혹사하면 몸이 좀 쉬라고 알아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며, 전화를 걸면 끊을 줄 모르던 친구 브리타는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푹 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정말 내 인생에 그렇게도 긴 잠에 빠져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잠을 잤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이런 느낌일까?
잠에서 깨어나고 보니 먼동이 채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이었다. 전날 오전 중에 약을 먹고 브리타의 전화를 받고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니 처음엔 기억상실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순간 정신이 몽롱한 게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조차 인식할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현실을 인지하기까지의 길지 않은 혼미함의 짧은 순간은 아주 묘한 것이었다. 작품에 들어가면 내 안에 그려지는 전체적인 그림의 느낌이 이런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현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도 아닌 말로는 구체적인 설명이 힘들지만 현실에서 아주 조금 떨어져 있는 듯 했던 그 새벽의 느낌 같은 것.
천천히 일어나 발코니로 나갔다. 온 세상이 잠들어 있는 듯 했다. 가지만 앙상한 겨울나무들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이 모두가 잠든 이 동네의 거리를 지키고 있었나 보다.
싸늘한 공기를 마시고 나니 정신이 점점 맑아지며 너무나 상쾌한 것이 내가 정말 고열에 아팠던 사람이었나 싶었다.
같은 발코니. 이곳에서 그렇게 많이 보아왔던 똑같은 동네의 거리 풍경이건만 이른 새벽엔 너무나 달라 보였다. 나는 마치 미지의 다른 어떤 곳을 새로 발견이라도 한 듯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나는 어딘가 낯선 곳에 가면 느껴지는 긴장감을 아주 좋아한다. 그곳이 꼭 특별히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그래서 가끔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한 길로 접어들면 조바심하는 동행에겐 미안하지만 내심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예의상 걱정스런 얼굴은 하지만, 특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길을 가면 가슴 속에서 묘한 일렁임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이 비슷한 시간에 이미 몇 번을 이 발코니에 앉아 보았던 풍경이건만 늦은 시간까지 일을 했거나 친구들과 어울리다 맞았던 새벽에 느껴지던 전망과 푹 자고 일어나 아주 상쾌하게 맞는 새벽에 바라보는 전망은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싶었다.
나를 감동의 물결로 젖게 하는 이 풍경이 매일 새벽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 이렇게 같은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워낙 작은 것에 감동하고 날씨와 풍경에 예민한 내게 독일이란 나라는 조금 유치하게 과장하자면 그 자체로서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이곳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날씨 때문에 견디기 힘들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 날씨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독일 친구들이 이곳에서 사는 데 어떤 점이 힘들고 좋은지를 묻는다. 나는 우선 독일의 날씨가 너무 맘에 든다고 하면 그들은 농담하는 줄 안다. 아니 나는 진심으로 이곳 날씨를 사랑한다.
나는 원래 비를 좋아했다. 독일은 비도 많이 오고, 더구나 비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나라이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 촛불이 켜진 카페에 앉아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며 뭐라고 끄적거리는 것은 취미가 되어 버리기도 했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지난 가을의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다. 지난 12월 무대에 올렸던 솔로 작품의 리허설을 비 오는 거리에서 맘껏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얼굴 위로 비를 맞으며 우는 듯 웃는 듯 말을 하는 듯 얼굴로만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비 오는 거리를 걸으며 자연스럽게 얼굴에 마음껏 비를 느끼며 움직여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 공연에서는 물론 장치로 뿌려준 비였지만 비 오는 거리를 정처없이 걸으며 느끼고 움직였던 그 느낌으로 춤을 출 수 있었다.
도시마다 조경이 잘되어 있는 독일은 시내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숲 속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안개라도 끼는 날에는 ‘안개 속에 우린 모두 혼자다. 이 나무가 저 나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헤르만 헤세의 「안개」라는 詩(시)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독일의 날씨가 늘 비가 오고 흐린 것은 아니다. 드물지만 어쩌다 햇살 눈부신 날이면 온통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춤이라도 추듯이 설레임의 물결로 일렁인다. 나는 저녁 외식보다는 아침 외식을 더 즐기는 편인데 햇살이 내리는 아침,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활기찬 거리를 보며 신선하고 따끈따끈한 빵과 커피를 마시며 곧 내게 펼쳐질 그 날 하루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모든 레스토랑, 카페가 다 아침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평소 분위기나 전망 좋은 곳에 가면 아침 메뉴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메뉴는 어떤지 눈여겨보게 된다. 이제는 신선한 살라미와 치즈, 그리고 쥬스와 잡곡으로 만든 크라상 빵으로 유명한, 정말 맘에 드는 곳을 알게되어 단골이 되었다. 우리가 가면 “오늘 날씨가 좋아 당신들이 올 줄 알았다”며 마음씨 좋게 생긴 웨이터 아저씨가 웃으며 맞아주는 곳이기도 하다.
뒤셀도르프 이곳은 구 도시를 끼고 라인강이 흐르는데 라인강 위로 쏟아지는 소중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으면 가만히 서 있어도 그 물살에 실려 어딘가로 떠나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 랭보와 까뮈를 알고부터 태양은 내게 다르게 인지되기 시작했는데 비 오는 흐린 날과는 또 다른 진한 우수를 느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아주 짧은 시간에 사계절을 다 볼 수도 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천둥 번개와 함께 비가 내리다가도 거짓말처럼 태양이 온통 세상을 타오르게 하는가 하면 그리고는 다시 굵은 우박이 떨어져 웬만한 비에도 초연히 길을 걷던 사람들도 우박의 무게로 인한 아픔으로 피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너무나 선명한 오색 찬란한 쌍무지개라도 뜨면 어느새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들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광경을 무대로 옮겨 상상해보면 아주 재미있는 그림이 된다. 그렇게 요동을 부리는 날씨는 마치 조용히 사색에 잠겨있던 예술가들의 가슴 속에 폭발할 듯이 잠재된 창조적 에너지를 보여 주기라도 하는 듯 한다.
어느 날인가 비가 오는데도 둥근달이 떠 있는 것을 본 어린 아들 유진이 말한다. “엄마, 달이 저렇게 비에 젖어 어떻게 하지?” 비는 그쳤지만 이미 맞은 빗물이 떨어지는 전차를 보고 “엄마, 전차가 땀을 흘리네?” 미처 뭐라고 대답 할 겨를도 없이 유진이는 아빠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 남편과 나는 유진이 만큼도 못미치는 상상력으로 대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맞대야 할 때가 어디 한 두 번이던가?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대사가 떠오른다.

아이가 아이였을 때 질문의 연속이었다.
왜 나는 나고 네가 아닐까?
왜 난 여기 있고 거기엔 없을까?
시간은 언제 시작됐고, 우주의 끝은 어딜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꿈이 아닐까?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꿈은 아닐까?
단지 환상이 아닐까?
악이 존재하나? 정말 나쁜 사람이 있을까?
내가 내가되기 전에는 대체 무엇이었나?
언젠가는 나란 존재는 더 이상 내가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질문들로 멀미가 날 정도였으니까. 사춘기가 되면서 막연히 여자나이 32살이 그냥 되고 싶었다. 그 나이가 되면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하필 32살이었을까? 주변에서 가끔 젊은 어린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들을 듣는다.
아니! 나는 싫다. 내 스스로 아파하며 고민했던 그 질문들의 시간은 돌이켜보아 눈물나도록 그립고 아름다운 시절이었지만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갔다 올 수 있는 시간여행이라면 모를까.

그래, 어느새 그렇게 되고 싶었던 그 나이에 있는 지금 내 모습은 과연 그때 내가 꿈꾸던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어쩌면 세상은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 더 이상 알 수 없는 부조리한 것이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 그리고 다시 생각하는 거지’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예술가의 길을 택하면서 그냥 흘려버린 시간들은 아니었기에 이런 저런 체험 속에 정신적 방황 속에 그리고 실존주의 문학을 접하면서 나의 질문들은 그렇게 일단락 막을 내렸다. 그리고 아직도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가 아닐까? 서서히 다음 질문들이 밀려오고 있음을 느낀다. 어린 시절 꿈꿔왔던 나이가 되어 그때 꿈꾸던 어린 소녀를 기억하니 적당한 무게의 책임감이 실려온다.
문득 여기서는 볼 수 없는 고향의 계절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