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演評

박명숙 안무 『유랑』

□ 동토의 땅을 咆哮(포효)한 춤의 전사들
오은희 대본으로 꾸며진 박명숙 안무의 『유랑』은 일제 期(기) 시베리아에 이주한 한인들의 고통과 비애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99년 문예진흥기금 수혜작품으로 선정되어 초연된 바 있고, 또 지난 3월 3~4일 문예회관 대극장에서는 2001년도 우수 레퍼토리 작품으로 뽑혀 재공연되었다.
막이 오르기 전 샤막에는 몇 장의 슬라이드 사진이 투영되는데, 고난과 역경의 이민사가 빛 바랜 사진 속에 여실히 용해돼 있다. 이어 눈먼 장님이 배회하는 가운데 샤막이 걷힌다. 무대 한 켠에 죽은 시체를 둘러싸고 무용수들이 앉아있고 이들이 내뿜은 낮은 구음에는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민의 고단한 삶의 무게가 짙게 배여있다. 죽음의 의식은 간단하게 처리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조용하고 메마른 통곡은 한층 더한 슬픔과 비애로 전달된다.
무용수들은 서거나 앉은 채, 또는 누워 뒹구는 형상으로 자유분방한 구성을 보여준다. 긴 장대와 어우러진 무용수들의 몸짓은 피아노와 첼로음의 혼합으로 인해 중후한 슬픔과도 조우된다. 특히 마르고 긴 지체를 지닌 장애숙의 춤은 가냘프고 섬세한 선의 유동으로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중반 이후 타악의 강렬한 리듬에 대비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사지를 쭉쭉 뻗다가 날카롭게 꺽이는 동작들은 일체화된 動性(동성)으로 군무 특유의 집단적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마치 狂風(광풍) 앞에 선 연약한 여인을 보는 듯 하였지만 점차 과격해지는 무용수들의 역동적 꿈틀거림은 얼어붙은 동토의 땅을 거칠게 咆哮(포효)하고 있는 함성 그 자체였다.
후반부 맑고 화사한 흰색 드레스를 착용한 여섯 명의 신부는 마치 흰 새의 날개 짓을 연상케하는 움직임으로 무대를 아름답게 수놓았다. 미래에의 꿈과 희망적 전망을 암시하는 훌륭한 매개장치였다. 이들의 존재는 어둠과 질곡의 개인사를 극복하고 평온을 갈망하는 상징으로써 새의 이미지와도 맞닿아 있다. 신부는 통곡과 비애의 땅에 피어난 한떨기 생명의 꽃이었다. 그 꽃은 민족의 삶을, 미래를 새롭게 전망하고 찬미하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 무대 천장으로부터 하염없이 날리는 흰 꽃가루는 마치 시베리아 雪原(설원)을 연상케 하면서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다.
『유랑』에서 안무자 박명숙이 화두로 삼은 것은 땅이었다. 불모의 땅을 일구며 고난과 역경을 헤쳐 가는 시베리아 유랑민의 저력을 『유랑』을 통해 형상화하고자 한 것이다. 안무자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민족 특유의 인내와 끈기,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작품과 매개된 붉은 깃발이 유랑민의 정신적 지주로 각인되는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면, 장대는 불모의 땅을 일구고 개척하는 유랑민의 생존의 도구로 기능했다. 또 무대를 가로지르는 수레에 올라 탄 검은 군상들은 고향을 버려 두고 동토의 땅을 떠돌아야 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 한인들의 비애 그 자체로 각인되었다.
『유랑』이 서사적 줄거리를 모태로 하고 있지만, 안무자는 이 작품을 결코 설명조로 풀어가지는 않았다. 초반부가 극적 상징성을 주안점으로 삼고 있다면, 후반부는 군무의 역동성을 수렴한 춤의 고유영역을 고수하는 쪽이었다. 특히 마지막 부분 그 자체로도 훌륭한 매개장치가 되었던 신부와 눈꽃 등은 최형오의 절묘한 조명테크닉과 만나면서 서정적 분위기를 더 한층 농후하게 하였다. 불모의 땅을 평온의 대지로 탈바꿈시킨 시베리아 유랑민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춤으로 묘사하여 민족의 정체성을 구현하려한 안무자의 주제의식은 비교적 명쾌하게 전달된 편이었다. 거기에는 박명숙의 오랜 제자들이 큰 몫으로 기여했다. 최성옥을 비롯 장애숙, 김선영, 송미경, 최경실, 류석훈 등등 박명숙 사단의 춤인재들이 펼치는 안정되고 수준높은 기량이 작품의 완성도를 획득하는데 의미있는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무용수 상호간의 밀착된 교감에서 작품은 더한층 성숙된 깊이를 가질 수 있었다.
눈먼 장님으로 반추되는 과거사, 죽음의 의식을 치루는 한인들의 통곡, 정처 없이 유랑길에 내몰려진 나약한 육신과 영혼, 새로운 둥지에 뿌리내린 새 생명의 꿈틀거림, 다시 와해되는 삶의 터전, 죽은 자와 산 자의 운명적 행로, 새로운 생명의 땅에 솟구치는 왕성한 생명력 등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 『유랑』은 다양한 테크닉과 안정된 기량을 무기로 한 춤전사들의 유감없는 몸짓으로써 이른바 ‘민족 대서사시’로 승화될 수 있었다.

□ 正體性(정체성)을 요망하는 「춤작가 12인전」
87년부터 시작된 「춤작가 12인전」은 「서울무용제」와 더불어 우리 예술춤의 발전과 성장에 눈부신 역할을 해 온 전통있는 춤기획으로 평가된다. 진정한 작가정신을 표방해 온 「춤작가전」은 중견무용가들의 예술적 실험무대로 선호돼 왔으며, 그동안 「서울무용제」 못지 않은 명성과 권위를 동시에 쌓아왔다. 「춤작가전」에 오르는 작품은 20분 내외의 소품 형식이지만, 이에 참가하는 무용가들은 그 어떤 무대보다 정성을 다해 작품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구나 하루에 4명의 무용가가 한 무대에 오르다 보니 서로 어떻게 평가될 것인가는 관객과 참가한 무용가 모두의 공통된 관심사다. 올해 「춤작가 12인전」(2001년 3월 6∼8일, 문예회관 대극장) 역시 많은 이들의 열띤 관심 속에서 총 12명의 무용가가 출연하여 경쟁 아닌 경쟁을 벌였다.
2001년 「춤작가전」의 첫 번째 주자는 오문자였다. 김복희무용단의 맏언니격인 그녀는 오랜만에 새 작품을 내놓았다. 오문자 안무 『풍경화』의 첫 장면은 어둠 속에서 귀를 자극하는 쇳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막이 올라가고 빛이 쏟아지는 무대에 오문자가 여행가방을 들고 등장한다. 무대 하수 쪽에 철제로 만들어진 직사각 세트가 한 개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철제에 메달린 김남식의 연기는 아슬아슬한 국면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안정된 균형감각을 유지한다. 오문자와 김남식이 엮어내는 움직임은 서로 교차되고 끌어당기고, 또 어떤 대목에서 발로 차 버리는 냉혹함도 끼여든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화는 다소 거칠고 냉정하기까지 하다. 오문자가 뒤집어 쓴 붉은 모자와 김남식의 손에 낀 붉은 장갑이 시선을 자극하지만, 작품과는 별개의 것으로 그들만이 공유하는 암호장치였다.
후반부 긴 끈으로 매개된 김남식과 오문자는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상호 화합할 수 없는 적개감을 표출한다. 이러한 실랑이는 한동안 계속된다. 오문자와 김남식은 색과 형을 만드는 붓이고 무대는 그 자체가 흰 화선지가 된다. 그러나 그들이 묘사하는 그림에는 ‘몽환적인 황홀도 처절한 슬픔도 없는’ 그저 건조하고 메마른, 그들만이 이해하는 공허한 풍경일 뿐이었다.
신은경은 『조각달』에서 여성적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고운 실루엣을 선사했다. 신은경 외에도 남녀가 등장하여 젊은 날을 반추하는 기억의 장치를 매개하고 있으나 의도와는 달리 공허감만을 남발했다. 신은경이 중견이 풍기는 우아함에도 불구하고 삐루엣을 돌고나서 균형감을 잃어버릴 정도의 저하된 기량에서 관객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소녀적 취향의 자아도취적 주제선택도 관객의 적극적인 공감을 방해한 또 하나의 요소로 부언될만 하다.
늘 파격적인 상상력으로 주목의 대상이 되어 온 이정희는 『하얀 영혼의 노래』를 선보였다. 이정희는 90년대 초반 『검은 영혼의 노래』로 이른바 포스트모던댄서라는 칭호를 부여 받았다. 긴머리를 매개로 시종 그로테스크함을 연출하던 이정희는 이번 작품에서도 긴 머리를 주 무기로 했다. 『검은 영혼의 노래』에서 검은 의상을 입고 나왔던 이정희는 『하얀 영혼의 노래』에서는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전미숙 안무 『아듀, 마이러브』

또 이정희가 최근 몰입하고 있는 영상은 이번에도 역시 예술적 실험대상에 올라와 있다. 영상과 만나는 춤의 실험무대인 셈이다. 실험은 언제나 새로움을 전제로 했을 때 그 묘미가 느껴지는 법이다. 그릇의 모양과 형태, 그 안에 담겨진 반찬의 내용까지 같고 색깔만 다르다면, 과연 그 색깔의 변주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얀 영혼의 노래』 또한 그런 격이었다.
무대 중앙에 2미터 높이로 검은 단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이정희가 누워있다. 그 뒤로는 세 개의 TV모니터가 돌아가는데, 자연의 풍광과 사람의 눈이 테크닉컬하게 조합되어 연신 다른 내용으로 변화돼 간다. 단 위에 누운 이정희는 빠르게 전환되는 영상의 내용과는 별개인양 한쪽 다리를 세운다거나 상체를 들어올리며 절제된 움직임만을 구사한다. 매우 느리고 완만하게 진행되는 움직임은 정중동적 미학과 조우되기도 한다.
이어 무대 하수 앞쪽에는 검은 의상을 착용한 젊은 남녀가 탑조명 아래에서 서로 비켜가는 감정을 문제삼는다. 춤다운 춤은 아니지만 그래도 춤의 영역에 가까운 것은 그들의 몸짓뿐이었다. 남자는 고매한 품격을 유지하려는 듯 무거움으로, 여자는 날카롭고 뾰족한 춤태를 견지한다. 기존의 춤 전통을 애써 터부해 온 이정희이지만, 이번 무대는 그다지 새로운 무대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주제의 선명성에서 다른 작품과는 큰 차이를 느끼게 했다.
3~40대가 주류를 이루는 춤작가전에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