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演評

최상철 안무 『빨간말』

지난 3월의 공연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춤 공연은 6일부터 8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한국현대춤협회」(회장 정의숙 성균관대 교수)의 「춤작가 12인전」이었다.
이 공연은 87년 실험적인 작가정신의 고양과 춤예술의 활성화를 기치로 내걸고 시작, 우리 춤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는 가장 권위 있는 무대의 하나로 자리잡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양한 실험이 이뤄졌고 입석까지 매진됐다는 점에서 실험성과 대중성을 추구한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 절반의 문제점과 함께 절반의 새로운 가능성을 동시에 제시했다는 점에서 우리 춤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한다는 당초의 의도에도 상당히 접근한 것으로 생각된다.
절반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문제점은 과다한 감정의 노출이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폴 발레리는 詩(시)와 散文(산문)에 대해 이야기하며 “소설은 산보요, 시는 춤”이라고 했다. 이를 역으로 풀면 춤은 시와 같은 상징과 운율이 핵심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일부 작품에서의 신파와 같은 연기, 상투적 이미지 등은 지나치게 서술적이어서 춤이라기 보다는 산보라는 게 더 적합해 보였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조각달』(신은경 안무)은 이별의 슬픔에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라든지, 청각장애인의 수화를 연상케 하는 서술적인 표현이 많았다. 또 『여인의 탄식』(김명회 안무)의 경우 자살을 앞두고 신발 벗기, 또는 신데렐라의 구두 등 상투적인 상징을 차용해 춤언어가 너무 진부해 보였다.
이와 함께 자아도취적인 이미지의 과다도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얀 영혼의 노래』(이정희 안무)의 경우 영상이 춤 못지 않은 중요 장치였는데 춤과 영상을 함께 볼 수 없게 했다. 춤을 보려하면 강한 이미지의 영상이 거슬렸고, 영상을 보려면 춤이 방해를 했다. 또 『마흔의 일기』(문영철 안무) 첫 부분과 끝 부분에서 관객을 향해 강한 조명을 쏴 춤을 보기가 어려웠다. 이와 함께 『배따라기』(정혜진 안무)에서는 기둥을 두 개 세우고 형제의 사이에 놓인 부인의 갈등을 그렸는데 그것이 원작과 내용이 다른 직설적인 성적 이미지로 전달돼 아쉬웠다. 다시 말하면 자신만이 아는, 혹은 자신도 모르는, 또 자신만 안다고 생각하는 암호와 같은 이미지가 무리한 오브제 사용과 맞물려 관객들을 오해하게 하거나, 피로하게 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의 작품에서 이 같은 문제점을 보완할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마르셀 미셀과 이자벨 지노가 쓴 「20세기의 춤(La danse de XXe Si cle·1995·보르다스)」이라는 책이 있다. 미셀과 지노는 이 책에서 현대춤의 3요소로 속도, 공간의 분할, 유기적인 무브먼트를 들었다.
판소리에 춤의 옷을 입히는 시도를 한 김매자의 『범피중류』는 이 세 가지는 물론 전통성까지 포함한 훌륭한 무대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들기 직전의 갈등을 춤으로 만든 이 작품은 느린 춤사위에서 빠른 춤사위로 변하며 절정으로 치닫다가 다시 느린 춤사위로 돌아오는 등 속도감과 함께 심청의 감정에 따른 무브먼트를 유기적으로 적절하게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 무대의 상하좌우를 나눠 이승과 저승을 표현하고, 사막에 쏟아낸 물결조명과 그 뒤에서 터져 나오는 판소리와 북소리 생음악은 무대의 생동감을 한층 높였다.
이와 함께 아직은 희소성이 있는 젊은 남성무용수의 무대 기획은 참신했으며 성공적이었다. 이원국, 김정학, 문영철, 최상철 등 출연자 모두가 갖고 있는 테크닉은 춤의 의미를 떠나 관객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김정학은 그림자를 이용한 무대와 도시적 포크음악을 배경으로 모던 전통춤을 편하게 전달했으며, 문영철도 중성적 표정과 몸짓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춤으로 40대의 데카당스한 욕망을 표현해냈다.
특히 최상철의 `『빨간말』은 안에서 밖으로, 또다른 뒷면으로 3번 변화하는 무대장치와 부조리한 몸짓들을 표현하는 독창적 춤사위로 이날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 한편 이 작품은 제목과 무대장치에서 지리 킬리언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작품 중에 『인디고 로즈(Indigo rose)』라는 작품이 있다. 갖가지 색의 장미가 있지만 ‘인디고’ 즉 ‘쪽빛’ 장미는 없다고 한다. 킬리언은 이 불가능한 장미를 향한 도전을 예술적 이상으로 삼아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다. 최상철의 『빨간말』, 풀어 말하면 던져지는 말도, 응답하는 말도 아닌 ‘빨간 색의 진짜 언어’를 꿈꾼 것이 『인디고 로즈』를 연상시켰다. 또 세 번째 변화하며 등장하는 비스듬히 누운 머리도 킬리언의 네덜란드댄스시어터(NDT)가 위치한 헤이그의 현대미술관의 유명한 야외조각품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또 ‘다시’의 여러 가지 동음 이의어를 천착한 김영희의 작품 『ㄷ.시』도 관심을 모았다. 어떻게 보면 고대 이집트의 제사장과 같은 모습으로 이국적인 그로테스크, 세기말적 나르시즘 등이 연상되는 강한 힘을 가진 작품이었다.
이와 함께 다소 무리한 부분이 한두 곳 있었지만 오문자의 『풍경화』도 대중적인 기호로 삶의 풍경을 풀어낸 것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우연이겠지만 최상철의 『빨간말』과 전미숙의 『아듀, 마이러브』가 각각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댄서의 순정」이라는 추억의 노래로 끝나는 게 재미있었다. 20세기 초반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가 나타났을 때 비평가들은 “예술가들이 대중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대중소비사회시대의 도래 이후 대중은 이제 그때의 복수로 순수예술가를 소외시키고 있다는 말도 할 수 있다. 이 같은 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이후 나타난 퓨전, 크로스오버 등 새로운 표현 어법이기도 하지만 대중에 대한 화해를 모색하는 순수 예술가들의 고뇌와 자조를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