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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춤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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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부인」이 탄생한 언덕에서 다시 만난 미우라 다마키
-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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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페라 「나비부인」의 여주인공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오페라 가수 미우라 다마끼(三浦環) 동상 앞에서
| 비행기가 나가사키 공항에 가까워지자 일행은 더욱 비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비가 와야 辛奉承(신봉승) 선생의 노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월간지 「삶과 꿈」의 발행인 김용원(金容元) 사장이 이끄는 ‘한강포럼’의 대마도 역사탐방 여행의 두 번째 행선지는 큐슈(九州)의 나가사키. 여행단의 강사로는 신봉승 선생을 모셨다.
대마도 이즈하라에서 나가사키행 국내선 비행기를 기다릴 때 여행사 대표인 이철구씨가 말했다. “나가사키에서 비가 오면 신봉승 선생이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린다」를 불러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일행은 비가 오기를 기대한 것이다.
여행사 대표의 설명은, 신선생님을 모시고 대마도 역사탐방 여행을 네 번이나 했는데 매번 비가 내렸고, 그 때마다 신선생님께서 노래를 불러 주었다는 것이다. 나가사키에는 그 만치 비가 잘 내린다고 했다.
나가사키 공항에 내린 시각은 오후 5시 40분. 비는 내리고 있지 않았다. 해가 져서 호텔로 가는 버스차장 밖으로는 벌써 항구도시의 불빛이 보였다. 아, 나가사키의 밤의 불빛! 아름답다는 찬사가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나왔다. 비가 오지 않기를 다행이지 저 아름다운 불빛을 못 볼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에선 별들도 반짝였다.
비가 오면 노래를 듣기로 했던 저녁식사 시간. 40명이나 되는 일행이 비가 안 온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신봉승 선생은 마침내 불려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초등학교 5학년에 해방이 되었는데 그 때 일본 선생이 우는 것이 불쌍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함께 울었다는 선생은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린다」의 노래 구절을 애조를 섞어가며 이어나간다. “많이 불러 본 솜씨시군요.” 누군가가 박수를 치며 그렇게 말했더니, “그럼은요”하고 유쾌하게 대답한다. 일본 대중가요에 어떤 향수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세대라서인지 우리 일행들은, 하늘의 별들이 빛나고 있는 밤에, 노래 속에서 나가사키의 비를 맞으며 여정을 나누었다.
4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면서 발전한 항구도시 나가사키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룩하는데 기여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의 발상지로 유명하지만 히로시마와 함께 원폭 피해지가 되면서 세계에 더 알려진 도시가 되었다. 나가사키란 이름에 왠지 애수를 느끼는 것도 원폭의 비극을 달래는 노래, 「나가사키의 종」이 슬퍼서였는지도 모른다.
원폭을 기념하는 평화공원에 갔다. 자료관안에 진열된 참상의 자료들은 같은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에서 본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하얀 시계 판 속에 정지되어 있는 시계바늘의 자리가 다르다는 것뿐. 히로시마의 바늘은 8시 15분에, 그리고 이곳 나가사키의 바늘은 11시 2분에 멈춰있었다.
중국 음식 짬뽕이 탄생한 곳이 나가사키라고 한다. 짬뽕을 처음 개발했다는 중국식당 시카이루(四海樓)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1백여 년의 역사를 가졌다는 시카이루의 첫 주인이 나가사키에 와있는 중국인 유학생들을 위해 싸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짬뽕을 개발했다. 조개류로 국물 맛을 낸 푸짐하고 값 싼 짬뽕은 그래서 중국 유학생뿐만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더 좋아하게 되었고 이젠 중국 음식 메뉴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다. 자장면이 한국에서 개발된 것이라더니 짬뽕도 그렇게 일본에서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가사키에서 탄생되었다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일본의 카스테라. 그 원조인 분메이도(文明堂) 가게가 권위를 풍기며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튿날, 나가사키의 날씨는 더욱 화창했다. 기다렸던 나가사키의 비는 오지 않았어도 여행자는 역시 화창한 날씨에서 축복을 느낀다. 호텔을 나와 언덕을 따라 걸어올라 갔더니 돌계단 꼭대기에 있는 옛 건축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 벽이 고풍스러워 보이는 오오우라(大浦) 성당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 언덕 위의 하얀 집 같이 정감이 넘치는 풍경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로 된 고딕식 건물. 국보로 지정된 건축물이라고 한다. 일행은 성당을 배경으로 돌계단에 서서 사진들을 찍었다.
오오우라 성당을 지나 언덕을 계속 올라가니까 글로버 정원(Glover Garden)이란 푯말이 나타났다. 오래전 외국인들의 거류지였던 지역이다. 이 정원 안에는 나가사키에 살았던 영국인 상인들의 양옥들을 복원해 놓아서 당시의 정취를 느끼게 했다. 그중에서도 네잎 클로버 형태의 지붕을 한 구라버씨의 저택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양옥이다.
글로버 정원 언덕에서 내려다보니까 멀리 나가사키 항구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비 개인 날의 항구도시.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바로 이 글로버 정원이 풋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탄생한 무대라는 것. 이 언덕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쓴 한 미국작가의 소설을 푸치니가 작곡한 것이 오페라 「나비부인」이라고 한다. 멀리 푸른 바다위에 배가 떠있는 쪽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글로버 정원에는 여주인공 ‘나비부인’역으로 유명한 일본의 오페라 가수 미우라 다마키(三浦 環)의 동상이 있었다. 이 동상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반가워서 흥분된 목소리로 옆에 있는 일행에게 말했다.
“미우라 다마키를 난 만났었어요. 어렸을 때 서울에 온 미우라 다마키에게 내가 직접 꽃다발을 주었어요.”
그러나 일행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공연한 말을 했나? 혼자서 말하고 혼자서 실망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도쿄에서 음악공부를 마친 나의 외삼촌한테서 미우라 다마키와 「나비부인」 공연을 하기 위해 서울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장가도 안 들고 일본에서 노래만 부르고 있다고 외할머니로부터 늘 핀잔을 받기만 하던 외삼촌이 마침내 오페라의 프리마돈나와 서울에 온다니 집안이 떠들썩했다. 외삼촌은 온다는 연락을 나의 어머니에게 했는데 그것은 외할머니보다는 신여성인 누나에게 연락해서 제대로 환영 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는 나와, 동갑내기 외사촌인 인숙이에게 꽃다발을 들려 서울역으로 데리고 나갔다. 나는 많은 환영객들 앞에서 얼굴이 예쁜 인숙이와 나란히 서있어야 하는 것이 싫었다. 나의 어머니가 인숙이와 나를 똑같이 입혀서 같이 데리고 다녀도 사람들이 인숙이만 보고 예쁘다는 말을 하기 때문에 그것이 싫었다. 그 날 인숙이가 내민 꽃다발을 그녀가 먼저 받았다는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인숙이가 예뻐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기차에서 내린 미우라 다마키는 화려한 꽃장식이 달린 검정 모자에 검정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키가 작고 통통했다. 이런 그녀에 대한 인상이 혹시 나중에 외삼촌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보고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그녀와의 첫 만남의 인상이 뚜렷한 나에게 미우라 다마키와의 재회는 어찌 나를 흥분시키지 않았겠는가. 내가 그녀를 만났었고 꽃다발을 주었다는 말이 남들에겐 하나도 놀랍게 들리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연유 때문에 나는 나 또래의 어린이들이 모르는 미우라 다마키라는 오페라 가수의 이름을 어려서부터 알고 있었고 「나비부인」이란 오페라의 이름도 일찍부터 친근감을 느끼고 있던 단어의 하나였다.
인숙이 생각이 났다. 미우라 다마키에게 나란히 서서 함께 꽃다발을 주었던 인숙이. 그 인숙이가 오래전에 위암으로 죽었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가 개가를 했기 때문에 어려서 인숙이는 우리 집에서 나와 함께 자랐다. 책상을 나란히 놓고 같은 방에서 지낸 햇수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형제가 없는 나에게 동갑내기 인숙이는 친 자매이면서 가장 친한 친구였다.
인숙이는 어려서부터 춤을 잘 추어 대학에서 춤을 전공했다. 당시는 대학에 무용과가 없어서 체육과를 졸업하고는 무용교사가 되었고, 그 후 결혼해서 아이를 셋 낳고 행복하게 사는 가 했더니 갑자기 위암수술을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인숙이가 마지막 투병을 할 때 나는 사흘 밤을 함께 병원에서 지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얼마나 무섭고 외로울까 해서였다. 인숙이는 통증이 가라앉는 사이사이에 나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얘기했다.
“경희야. 나는 너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 공부도 잘 하고. 말도 잘 듣고 해서 늘 칭찬을 받았지만 나는 늘 책상에 엎드려 잠만 잔다고 야단을 많이 맞았지 않았니? 너는 돈이 필요하면 언제나 달라고 할 수 있는 엄마 아빠가 있었지만 나는 학교에서 가지고 오라는 것도 말을 못하고 그냥 가서 야단을 맞고 왔을 때가 많았단다. 너하고 똑같이 받은 용돈을 쓰지 않고 꼭꼭 접어서 서랍 속에 넣어둔 것을 그 때 집에서 일했던 아이가 가져가서 말도 못하고 울었던 적도 있었어.”
인숙이의 말은 너무도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랬었구나. 나는 네가 그랬었던 것도 모르고 얼굴이 예쁘다고 부러워만 했었으니.” 미안한 생각이 가슴을 눌렀다. “아, 불쌍한 인숙이!” 입속으로 나는 그 말만을 되풀이했다.
“너의 아버지는 나에게 참 고마운 분이었어. 나 때문에 네가 야단도 맞았지. 내가 잘못해도 꼭 둘을 함께 벌을 서게 하셨지 않니. 우리 둘이 같이 손들고 마루방에서 서있었던 것 생각 안나니?”
인숙이는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경희야. 우리가 둘이서 춤을 추며 연극을 했었던 기억나니? 나는 너의 엄마 치마를 둘러쓰고 천사가 되고, 너는 너의 아버지 바지를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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