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 31일 인쇄
2003년 1월 1일 발행
발행·편집인 / 趙楡顯
등록/1976년 1월 27일·라 2006호
2003년 1월호 통권 323호 |2025년 5월 3일 토요일|
 

元老回顧(26)

 

「파랑새」
- 피난지 대구에서 재개관한 국립극장



이원경
李源庚(劇作·演出家·예술원 회원)

제목· 생태(生態), 크기·84×60
1950년대 초 천경자씨는 전쟁, 월북한 남편 등 자신을 괴롭히는 주변현실과 사람들을 뱀에 빗대어 그림을 그렸다. 당시로서 여자가 뱀을 그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 많은 논란을 받았다.
■부역(附逆)과 납치(拉致)
사실 1941년에 일본이 하와이를 불시에 공격해 군함을 부수고, 42~3년 전쟁에 시달리면서 일제시대에 ‘전쟁…, 전쟁’하는 소리를 들어가며 살았지만 막상 조선반도에서 전쟁은 없었다. 그런데 6·25는 실제 우리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 전쟁이었다. 6월 28일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 후 자꾸만 남쪽을 따라 내려갔다. 정부는 수원으로 피난하고 한강다리는 국군이 폭파해버렸고. 그때 피난 못가고 남았던 사람들, 그러니까 6월 25일에서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까지 석달 남짓한 기간을 서울에서 보내야 했다.
내가 서대문형무소 바로 앞 현저동에 살아서 아는데, 6월 28일 인민군 탱크 한 대가 서대문형무소 정문을 뚫고 진입해서, 안에 갇혀있던 사람들을 다 나오도록 했다. 그런데 6·25전에 빨갱이로 몰려서 잡혀들어가 있던 사람들뿐 아니라 좀도둑, 강도 등 별놈의 잡종들까지 다 나왔다. 빨갱이로 들어가 있던 사람이야 당연히 득세할 것이지만 그 밑에 있는 것들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왔다고 뽐내고 돌아다니면서 나쁜 짓은 다 했다. 한편으로 기현상은 인민군은 거의 열여섯 일곱쯤 되어보이는 어린애들 일색이었다. 왜 그런고 하니 나이 좀 든 놈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전선으로 내려가고, 서울은 군인이고 경찰이고 아무도 없으니까 어린애들만 놔두고 간혹 몇 명 나이 좀 있는 것들이 있는 정도였다.
이때 부역(附逆)과 납치(拉致)라는 말이 나왔다. 시기상으로는 납치가 먼저이다.
납치는 춘원 이광수(李光洙) 같은 저명인사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동네마다 좀 괜찮게 산다싶으면 초등학교 교장하던 사람마저 이북으로 끌고 갔다. 지금으로 치면 동회, 동사무소에 한놈 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놈이 있고, 그 밑에는 아부하는 동네놈들 중에 지가 마음에 안드는 사람 찔러서 이북으로 데려가고 그러던 시절이었다. 평상시에 잘 못 살았던가 불만있던 놈들이 어떤 집은 누가 뭐했고 어땠고 그런 식으로 끄나풀 일을 했기에 나같은 사람은 꼼짝을 못했다. 나는 1943년 이후 일본에 징용갈까봐 도망다닌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납치를 피해 또 도망을 다녀야 했다.

6·25 직후, 월북했던 놈들이 이북에서 왔다. 각 분야별로 연극이니, 영화니, 문학이니 해당 영역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일종의 금의환향을 한 것이다. 김두한에게 총맞고 이북에 갔던 심 영(沈 影)도 다시 왔는데 명동에 있는 국립극장 시공관 앞에 감개무량해서 서있는 것을 내가 본 적이 있다. 그건 빨갱이가 아니다. 과거에 자기가 연극하던 자리에 다시 와서 감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빨갱이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다. 내가 극작가로서 정말 재주가 있다, 참 희곡을 재미있게 쓴다고 인정한 이가 둘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함세덕(咸世德)이고, 한 명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쓴 임선규였다. 이 함세덕 역시 서울에 들어왔다가 신촌에서 한강을 바라보며 ‘오 서울이여’하며 감탄해 부르짖다가 ‘이놈들아!’하고 서울을 향해서 수류탄을 던졌는데 어이없게도 그 파편에 맞아 절명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빨갱이로 이북에 간 이는 얼마 없었다. 인간관계랄까 남녀관계 등 사사로운 일로 도피한 것이다. 더군다나 일제시대에 공산주의에 관한 책은 구하기조차 힘들어 숨어서 몰래 몇 놈이 돌려보는데 골수분자가 아닌 이상 어려운 일이었다. 나조차도 공산주의에 관한 책 한 권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무슨 빨갱이가 있었겠는가. 심 영이 시공관 앞에서 감개무량해한다거나, 함세덕이 지 수류탄에 죽는다는 식인데, 그러나 안영일(安英一)만은 일본서 축지소극장에 있을 때부터 좌익골수분자였다.

당시 이북에서 온 연극동맹에서는 어떻게 날 취급했는고 하니 ‘이승만정권시대에 붙어서 연극안했다. 그러니 순수한 사람이다’하는 식으로 터무니없이 나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붙였다. 그러면서 「8·15 경축연극」을 하는데 소련(당시는 러시아를 소련이라고 했다) 작가의 작품을 골라서 안영일이 이북을 대표해서 연출을 하고, 이남(以南)을 대표해서 이승만정권에 아부 하지 않은 이원경이 무대 장치를 한다고 이렇게 딱 프로그램을 짰다. 미리 말하지만 만일 그걸 했다면 나는 9·28 이후에 부역자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쨌거나 연극동맹에서 오라고 하면 안 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기를 왔다갔다 하는 척을 하면 동네에서도 그냥 놔두었다. 그렇지않으면 소부르조아, 즉 큰 부자는 아니지만 돈 좀 있고 밉게 보이는 놈 중 하나가 돼서 이북으로 싹 데리고 가는데 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연극동맹 나간다’ 그러면 그냥 통과가 됐다.
이 연극동맹에서 7월 어느 날 하루 불러서는 ‘잠깐 있어라, 신분증을 만들어준다’고 했다. 신분증을 만들면 동회에도 안끌려갈 것 같고 그래서 다들 신분증 만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전부 모아가지고 이북으로 출발한 것이다. 나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이 인원이 한 1천여 명은 되었다. 연극동맹 뿐 아니라 문학가동맹, 대학교수연합 등 그놈들 말로 소위 인텔리겐챠들이 쫙 가는데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밤 1시쯤 되어 퇴계로에 있는 한 국민학교 - 지금은 없어졌다 - 에서 출발을 해서 창경원을 지날 때 였다. 창경원 우측은 서울대학병원이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거리쪽으로 문이 나서 시체 치우는 영안실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는데 위로 다다다닥 하는 소리가 나면서 창경원으로 총을 막 쏘아대는 것이다. 별의별 빨갛고 노랗고 파란 탄환 빛깔이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던지…. 아마 창경원 속에 미군이 있었을 것이다. 미아리를 넘어서 의정부에 다 가는데 해가 동쪽에 훤해왔다. 이때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앞으로만 자꾸 갔다. 도망갈 놈은 뒤로 처지지 앞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니 의심을 안 받을 것 같았다. 한 소대마다 인민군 하나가 따발총을 메고서 따라오지만 앞으로 자꾸만 가니까 ‘이 사람 아주 충성이 대단한 모양이다’ 생각했는지 제지하지 않고 가만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래서 쫙 앞으로 가는데 골목쟁이에서 농부들이 칠월이라 더우니까 바지를 걷고 웃통도 벗어부치고 담뱃대를 물고 우리가 가는 걸 바라보며 밖에 나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른 다가가서 사람이 안나와 있는 골목쟁이 하나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행렬을 구경하는 척하며 저놈들이 나를 아나 모르나 살피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를 몰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품을 하면서 집으로 가는 척하고 골목쟁이에 들어가, 지리도 모르면서 하여간 산으로 들어가서는 산을 넘고 넘어서 날이 훤하게 밝은 일곱시쯤 되었는데 보니까 정릉이었다. 의정부에서부터 산을 몇 개를 넘었는지 모른다. 그때 서른 다섯이었으니 기운이 있었던 모양이다. 미아리에 오니까 전차가 다니길래 잡아타고 서대문 영천 형무소 앞에 내려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 이후 숨어 살았기 때문에 나는 부역을 안할 수 있었다. 연극동맹에서는 내가 끌려간 걸로 알았을 것이고.
지금 쉰살 된 아들이 하나 있는데 그때 갓난애였다. 처가 애를 업고서 내가 끌려갔다는 걸 알고 나섰다가 기운없이 집으로 왔는데, 보니까 송장같은 게 하나 누워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좋았겠는가! 자기 남편이 끌려가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냥 엉엉 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었다.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일어나질 못했다. 밤새도록 자지도 못하고 산을 몇 개나 넘느라 녹아떨어졌던 것이다.


■빨간 헝겊과 붉은 악마
해방후 운이 좋아선지 돈을 좀 벌었다고 지난 번에 얘기했듯, 그 덕분에 당시 아무나 못사는 어마어마하게 비싼 라디오를 하나 살 수 있었다. R100이라는 미군용 라디오인데 단파가 돼서 일본방송도 바로 옆에서 나하고 얘기하는 듯이 잘 들렸다. 육이오가 나자 마루를 뜯고 밑바닥에다 이 라디오를 감춰놓고는, 밤이 되면 귀를 마루밑에 대고 일본방송을 들으면서 일기(日記)를 적어나갔다. 밤에는 아무도 안다녔다. 공습 때문에 불도 다 끄고 컴컴하고 그럴 적이다. 이 R100 라디오덕분에 나는 일본방송을 들으면서 전쟁상황을 알 수 있었고 미리미리 예측도 할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서대문 영천은 전차종점이었는데, 하루는 이 전차에 승객은 없고 전차운전수와 인민군 한 명 그리고는 쌀이 가뜩이었다. 거기서 트럭으로 옮겨 녹번동쪽으로 해서 이북으로 자꾸 쌀을 나르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아하 미군이 틀림없이 가을 추수전에 서울 탈환을 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북놈들이 다 가져간 다음에 환도하면 어떻게 다 먹여살리겠나 해서인데, 내 추측이 맞았다. 서울이 수복된 것은 9월 28일로 추수전이었다.
이북놈들은 부산까지 쫙 밀고나가려고 했고, 될 것같이 생각을 했지만 낙동강에서 막혔다. 낙동강만 넘어갔다면 돈 좀 있고 권력있는 놈들은 일본으로 가고 다른 놈들은 처리되어서 인민군 수중에 떨어지는 기로였다. 그런데 맥아더 장군은 이들이 낙동강까지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낙동강에 진을 치고 며칠날 어떻게 확 밀고내려가자 그런 작전이 있었던 모양인데 여기를 B29폭격기, 100대도 아니고 꼭 99대를 보내서 폭격을 시켰다. 지금도 낙동강 근방에 이 폭탄자국이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