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연속수상

부다페스트에서

그동안 생활하던 곳이 마치 이 세상의 전부라도 되었던 듯 이런 낯선 곳에 와있으면 나는 지구를 떠나 아주 머나먼 곳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것은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기분 좋은 착각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넓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야자수 나무에 파란 하늘은 마치 태어나 처음 대하는 것처럼 경이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어린 아들 유진의 감기가 꽤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아 따뜻한 나라를 찾는다는 것이 이곳 스페인 남부의 테네리파란 섬으로 여행을 오게 한 것이다. 운 좋게도 세 번째 찾는 스페인이지만 스페인 중에서도 유일하게 12월에 여름 날씨인 이 섬은, 처음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낯선 곳이 된 셈이다. 성격상 평소 즐겨보지 못했던 게으름의 특권도 누리면서, 이 햇살과 파란 하늘이 온통 내 것이라도 된 듯한 즐거움도 맛보면서 말이다
헐벗고 목말라 보이는 산들이 많은 이곳은 비가 많이 오는 독일과 대조적으로 비는 볼 수가 없다. 매일아침 찬란한 태양이 귤빛으로 내 잠을 노크하면 나는 기꺼이 문을 열고 그 햇살을 맞이한다. 상쾌한 바다 내음을 맡으며 걷는 아침 산책은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약간의 미풍에도 날아갈듯 하다. 이런 기분으로 점프를 하면 하늘 높이 올라가 다시는 지상에 내려 올 수 없을 것 같을 정도로 말이다.
한때는 모두가 잠든 밤 나 홀로 깨어 세상의 어둠과 함께 시작과 끝을 모를 광활한 슬픔에 빠져 그 자체가 아름다운 비밀을 간직한 듯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차츰 밤보다 아침 예찬론자가 되어 가는 듯하다. 갑자기 무라카미의 어느 단편 소설에 나오는 글귀가 떠오른다. ‘아침빛, 커피의 향내, 사람들의 덜 깬 듯한 눈, 아직 부서지지 않은 하루…’

아들의 감기를 핑계로 나는 어쩌면 대서양에 떠오르는 12월의 태양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른 아침의 바다는 파도도 없이 잠잠하다. 그렇게 광활한 침묵의 바다를 오랫동안 보고 있노라니 아주 오래 전에 그리고 또 더 오래 전 어린 시절에 꾸었던 두 개의 꿈이 떠올라 조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하나는 꿈속에서 내가 이렇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 거대한 바다가 갑자기 커다란 물기둥을 이루더니 아주 한참을 바다 밑이 들어날 때까지 높은 하늘위로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 엄청난 물기둥이 하늘로 올라가던 물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또 하나는 사방으로 망망대해 수평선이 보이는 파랗다 못해 검은 빛이도는 바다 한가운데를 내가 말을 타고 건너는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물이 어디서 왔냐고 묻는 유진이의 질문에 나는 그 두려운 꿈의 회상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유진이는 이미 바닷물 속에 들어갔었는데 그 찝질한 맛을 느꼈는지 왜 바닷물은 짜냐고도 묻는다. 이제 만 다섯 살 아이의 질문은 끝이 없다. 해는 늘 똑같은 모양인데 왜 달은 모양이 달라지는가? 사람이 처음에 어떻게 태어났는가? 사람은 다 늙어서 죽는 것인가? 왜 까만 사람의 아이들은 똑같이 까만 것인가? 유치원 친구 파리트의 엄마랑 아빠는 가족인데 왜 다른 집에 살고있는 것인가? 사람은 날지 못하는데 사람보다 무거운 비행기는 어떻게 날 수가 있는 것인가? 왜 스페인의 나무와 흙 색깔은 독일과 다른 것인가? 끝없는 왜? 왜?에 나는 할말을 잃어버릴 때도 많다. 그러고 보면 아들과 단둘이의 여행은 처음인 셈인데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보내면서 질문 보따리들이 더욱 터져 나오는 듯 했다.
더구나 유진이는 나름대로 친구들이 모두 자기 침대에서 혼자 자는데 비해 자신은 아직도 엄마와 함께 자고있는 콤플렉스를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자보려고 노력 중인데 여기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한 침대에서 잘 수 있으니 더욱 신난 것 같았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기침도 가라 앉고 감기도 낫는 듯 했다.
나는 또 그런 연유로 ‘연속수상’의 마지막 글을 따듯한 겨울의, 아침이 아름다운 이 섬에서 쓰게 되었으니….
세상에 모든 ‘마지막’이란 어떤 형태의 것이던 서운한 여운을 남기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 하다.
「춤」지에 ‘세계 춤 기행’ 다섯 편 정도의 글을 썼고 이십 편 째 ‘연속수상’을 쓰면서 중간 중간, 시간에, 소재에 쫓길 때면 나는 스스로 어쩌자고 이렇게 엄청난 일을 시작한 것일까 중얼거리던 때도 있었지만, 글을 쓰는 동안 춤만이 내게 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같은 류의 희열을 맛보기도 했다. 어느덧 약속한 이십 회 째의 글이 되었고 이번 글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여간 허전한게 아니다.
처음에 안무가의 예술과 생각을 무대가 아닌 지면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계기가 될거라는 ‘연속수상’의 취지를 알려준 편집장의 말은 나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그 무엇이 있었다. 더구나 생각이 나는 데로 끄적이는 습관이 있던 나는 그동안 모아 두었던 내 노트를 의지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덜컥 시작을 했던 것이다. 결국 ‘지면(紙面)’이란 무대에서 나는 이십 회 째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제 드디어 그 마무리를 고민중이다. 이 고민의 정확한 답은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으면서….
결국 현 시점에서 내 자신을 위한 마무리가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동안 조금은 더 생각하고 계획하고 썼다면 마지막은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을 잠시 떠나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으로 마무리하고 싶어졌다. 다시 읽어보면서 앞뒤가 맞지 않아도 고쳐지지 말기를 바라면서….

살아있는 동안, 짧게 살다 꿈을 간직한 채 가버린 여동생 효정이와의 추억을 더 많이 떠올리고 이야기하며 살고 싶다는 것, 수없이 느꼈던 내 모순도 간사함도 분명 나를 있게 한 개체이면서도 본질이란 것, 먼지처럼 작은 나의 존재도 세상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것, 밖에서 타인이 불러주는 역할의 나로 살기보다 내가 자신에게 부여해준 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 위대한 인류애란 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사랑해주는 것이라는 것, 아들 유진이가 행복이란 소중한 것을 자신의 가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는 것,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이었을 때 농담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는 것, 니체의 허무주의는 불처럼 뜨거운 열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인간은 자기를 알지 못하며 오직 자기를 말할 수 있다고 한 것, 세계와 우리의 연결은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며 자유야말로 우리의 자본이라는 것.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것들을 시간이라는 바람에 날려보내지 말고 함께하며 살고 싶다. 이런 수많은 것들이 나의 일상에 나의 사고에 나의 춤과 예술에 안개처럼 스며들 수 있도록….

스페인 팔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