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演評

이노연 안무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나』

■ 부산시립무용단 제48회 정기공연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나』
무용수들의 다채로운 움직임을 보는 것 못지 않게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각양각색의 이미지를 음미하는 쏠쏠한 즐거움도 춤예술의 매력이다.
부산시립무용단이 김성종 대본, 이노연 안무, 윤정섭 연출(무대미술)로 무대에 올린 창작춤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나』(12월 11일, 문화회관대강당)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소재를 빌어 왔다. 신화나 전설을 소재로 한 무대예술 작업에서 흔히 보여주는 특정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스토리텔링 위주의 무용극 형식을 지양, 드라마를 따라가는 재미는 반감되었지만 전체 10개의 틀 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몇 편의 단편 영화를 본 듯 그 이미지가 생생하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역동적이고 스케일이 큰 군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30명이 넘는 무용수들은 거의 등 퇴장 없이 기하학적인 대형의 집체적 이동을 통해 분위기를 상승시켜 간다. 전자음악과 타악기를 주조로 한 강렬한 음악과 팔의 움직임을 활용한 빠른 춤사위 역시 분위기를 고양시킨다.
특히 무대를 가득 메운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채찍 춤은 대륙적인 색채와 야성이 살아 숨쉰다. 기하학적인 대형에서 만들어지는 직선과 채찍질을 하면서 생겨나는 곡선적인 라인이 어우러진 조형미와 역동성은 한국의 춤 작품사에 기록될 만큼 압권이었다
박혁거세 역을 맡은 박성호는 춤 기량도 기량이지만 자신만의 캐릭터를 표출하기 위한 해석력이 특히 돋보였다. 장래훈과 김현숙의 2인무와 박혁거세의 솔로 춤은 군무 위주 구성에서 오는 단조로움을 중화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였으나 비중이 지나치게 축소되어 그 효과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반면에 스모그와 조명을 이용해 복잡한 무대미술의 대체효과를 살려내고 오케스트라 비트를 적절히 활용해 극적 전개의 속도감을 살려내는 시도는 인상적이었다.
안무가들이 무용작품 제작과정에서 인접 분야 예술가들과 협력 작업을 강화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시립무용단이 몇 년 전부터 시도하고 있는 드라마투르기(채희완)와 연출가의 영입은 이번과 같은 대형작품에서는 필요하다.
그러나 협력 작업 과정에서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무게중심이 흔들린다면 작품의 완성도는 그 만큼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번 공연의 경우 춤의 역할이 더욱 살아났더라면 연출과의 조화를 통해 움직이는 예술로서 춤이 갖는 여운을 더욱 음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직업무용단의 경우 대중들의 눈 높이에 맞추는 공연도 중요하지만 그것 역시 예술적 완성도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화적인 이미지를 보다 더 살려내면서 현대적인 감각을 보다 확대시킬 수 있는 춤과 음악 구성이 보안된다면 『박혁거세…』는 부산시립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남을 만하다.

■ 정신혜무용단 『산』
정신혜무용단의 신작 『산』(2002년 12월 23일, 부산문화회관 대강당)은 분명한 제작 컨셉과 연출, 무대미술, 음악 등 여러 부문과의 협업 작업이 작품 전편에 걸쳐 꽤 진지하게 시도된 의욕적인 무대였다.
30대 초반 젊은 안무가의 개인 공연으로는 큰 규모인 60분 길이의 대형 작품인데다 직업 무용단에 버금가는 제작 시스템을 보여준 이번 무대는 그러나 의욕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완성도에서는 절반의 성공에 머물렀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이란 표현 속에는 이 작품의 다음 수정본에 대한 작품의 완성도에 어떤 확신을 가질 만큼 내용적인 구성 면에서나 전체 작품의 질이 일정 궤도에 올라 있다.
메인 막이 오르기 전 샤막 위 영상을 활용한 붓의 놀림에서부터 관객들은 협업작업의 흔적을 감지한다. 손인영 안무의 『소통』에서 서예를 이용, 문자와 인간의 소통을 움직임과 이미지의 결합으로 연결시킨 시도나 홍승엽 안무의 『빨간부처』에서 무대미술의 한 부문으로 서예를 활용한 것과 비교했을 때 초반부 움직이는 수묵화의 이미지는 이 작품이 추구하는 여백에 대한 컨셉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크게 다섯 장면으로 나뉘었지만 『산』은 무대 위에 불쑥 솟아 있는 무대세트인 바위산을 중심으로 그 이미지들이 서로 소통하고 있다. 조명에 의해 바위산의 세트는 축소되거나 확대되면서 때로는 춤을 살려내고 때로는 춤의 영역을 제한시킨다. 그리고 이런 여러 가지 시도들은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조주현)에 의해 질서정연하게 전개된다.
첫 장면 군무 구성에서 타이즈를 활용해 무용수들의 바디 라인을 살려내고 이들의 몸 위로 큰 붓을 이용해 글씨를 써내려 가는 시도나 2장이 마무리 될 때 무대 앞쪽의 바위 세트 상층부에 무용수를 위치시키고 그것과 사선으로 연결된 지점인 무대 위에 또 다른 무용수를 위치시켜 상하 공간을 자로 잰 듯 분할하는 공간 구성 등은 세밀한 연출(조주현) 감각이 확연히 드러나 보이는 장면이었다.
제1장 자락, 제2장 기슭, 제3장 비탈, 제4장 등성, 제5장 마루 등 다섯 장면을 춤으로 표출하는데서 오는 한계를 스태프들은 고정된 무대미술(디자인 이대업)에 변화를 가하고 때로는 이를 이용한 무용수들의 동선을 통해 보완하고 있다.
2장에서 거대한 바위산의 형상이 드러나면서 그 밑에 붉은 색 의상의 무용수가 등장, 솔로 춤을 추는 장면은 전체 작품을 통 털어 가장 그 이미지가 선명했다. 조명을 이용해 무대 전면으로 점차 동선을 이동하면서 추는 정신혜의 솔로 춤은 넘쳐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율되어 관객들을 압도해 갔다. 물 흐르는 듯한 굴신과 적당한 시점에서 반복되는 정지와 이동, 뛰고 솟구치고 바닥에 신체를 밀착시키는 움직임의 변환과정, 춤으로 넓은 무대를 휘어잡는 그녀의 움직임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폭이 넓은 의상을 좌우로 이용하는 재치나 객석에 등을 보였을 때 치마를 좌우로 활용하는 구성 등에서도 안무자로서 남다른 감각을 발견하게 된다.
바위산에 달이 뜨고 어둠 속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마지막 장면은 시각적으로 오래 동안 기억될 만큼 무대 스탭들의 역량이 빛났던 대목이다. 군데군데 서 있는 무용수들과 무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무용수들, 바위산 자락 곳곳에 보일 듯 말 듯 신체를 내 맡긴 무용수들의 구도는 화폭 위에 정밀하게 구도가 잡힌 화가의 정물화를 보는 듯 정교하게 짜여졌으며, 바위산 아래서의 정신혜의 춤과 함께 이 작품의 백미였다.
그러나 3장 타악기의 강렬한 음에 맞춘 지나치게 정형화된 움직임 구성이나 흰색 천의 단조로운 활용에서 오는 산만함은 이 작품이 추구하는 여백의 미나 이미지의 조합과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은 부산시립무용단의 『박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다』와 여러 면에서 비교가 된다. 개인무용단으로서 직업 무용단과 견줄 만한 프로덕션을 시도한 것도 그렇지만 무대 스태프들과의 협업작업의 성과가 『박혁거세…』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절반의 성공`이란 표현을 쓴 데는 이 모든 프로덕션의 중심에 안무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박혁거세…』에서도 똑 같이 발견되는 점이다.
안무가들이 극장예술로서의 춤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인접 분야 예술가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무척 바람직하다. 하지만 안무가들이 그 중심에서 모든 것들을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 안무가들의 영역을 지나치게 넘어드는 연출이나 드라마트루기, 다른 스탭들의 넘치는 의욕은 자칫 춤예술이 아닌 무대예술 작품으로 춤이란 장르를 전용시킬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무대예술지원사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대작 위주의 제작 경향이 생겨나는 현상과 맞물려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춤 제작에서의 이 같은 흐름은 분명히 경계되어야 한다.
정신혜의 『산』은 스탭들과의 협력작업이 비교적 성과를 거둔 데다 댄서들의 앙상블을 조율하고 춤으로 무대를 장악하는 안무자로서의 감각 등을 확연하게 보여준 의욕적인 작품이었다. 춤을 활용한 보다 정교한 이미지의 조합과 음악, 의상 디자인 등의 수정작업이 보완된다면 동서양의 감각이 잘 용해된 컨템포러리 댄스로 자리 매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작품이다.

■ 밀물현대무용단 「일곱 가지 빛깔 여행」
신인 안무가들의 작품에서 평자들의 시선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소재나 작품을 풀어나가는 아이디어 등에 더 강하게 머문다. 안무라는 작업 자체가 힘들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만큼 많은 안무 경험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밀물현대무용단의 정기공연 무대인 「일곱 가지 빛깔 여행」(12월 21~22일, 씨어터 제로, 평자 21일 공연 관람)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7명 신인들이 각기 다른 색깔을 이미지로 표출하는 신작무대였다. 두 명의 안무가를 제외하고는 거의 혼자 출연했지만 작품을 풀어 나가는 방법이 각기 달라 마치 갈라 공연을 보는 것 같은 다채로움이 있었다.
작품마다 각기 다른 색깔을 이미지로 표출해야 하는 동일한 제작 컨셉은 관객들에게는 비교의 흥미거리가 되겠지만 안무자들에게는 일종의 제약이 될 수도 있다. 안무자들은 대부분 의상에서나 소품의 사용 등에서 그런 색깔들이 어떤 형태로든 무대 위에 표출되도록 시도했다. 그러나 이 같은 시도는 어떻게 보면 가장 일반적인 접근방법일 수도 있다.
안무자의 새로운 해석이 가장 두드러졌던 작품은 송주원의 『빨강색 안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