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에게 보내는 편지

지금은 문을 닫은 대학로 바로크레코드 옆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오늘소극장이 있습니다. 연극이 많이 올려지던 작은 극장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김은희씨의 솔로 『들꽃』을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가 97년 4월이었고, 「젊은문화축제 장(場)」에서였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김은희씨의 다른 무대들을 접했었지만, 이상하게도 『들꽃』의 잔영은 오래 남습니다. 공연의 세부는 오히려 더 기억에서 사라졌는데도 느낌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당시 「’97 장(場)」에는 전인정·박나훈, 이용인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나중에(97년 11월) 박나훈, 이용인은 김은희씨의 『환(環) 환(幻)』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소극장오늘은 초라한 무대입니다. 연극이 아닌 춤을 공연하기엔 더욱 그러합니다. 춤은 좀처럼 그런 무대에 서려 하지 않거니와 극장 자체도 춤추기에 좋은 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그곳은 어쩌면 변방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극장의 위치나 무대, 그 무대에 섰던 이들의 면면이 이를 반증합니다. 적어도 그때 그들이 서있던 곳은 그랬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김은희씨 작품의 제목이 『들꽃』인 것도 우연은 아니었지 싶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라 낯선 길을 헤매이는 들꽃을 자신의 정체로 삼은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한 이 작은 무대에서 김은희씨는 예의 그 묘한 기운으로 객석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김은희씨의 춤은 소극장에서의 독무에 진면목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극장을 나와 골목길을 빠져나오면서 내가 본 춤에 대해, 그리고 저 사람에 대해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를 자문해 보았습니다. 춤이 좋고 나쁨을 떠나 말과 글이 끼어들기 힘든 대상이 있는 법입니다. 춤과 삶과 몸이 너무나 꼭 붙어있을 때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그들의 틈이 벌어져 있을 때에야 말문은 열리고, 해석의 메스를 들이댈 수 있습니다. 따뜻함과 차가움, 맑음과 알 수 없음의 사이 어딘가가 그 춤의 처소가 아니었겠는가 라고 모호하게 말해볼 따름입니다. 겉모습에서 떠오른 이미지는 하얀 인형과도 닮았지만, 그 인형은 차라리 유령 같은 창백함을 띠고 있습니다.
김은희씨의 춤은 적어도 독무에서라면 작품이 달라져도 그 인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습니다. 춤에서 이따금 처연함 같은 것이 배어 나오면서도 그런 감정조차 결코 눅눅하지 않습니다. 예민하고 단정하며 부드러우면서도 깊고 어딘가 서늘합니다. 나는 막연히 그 몸이 담고 있던 것, 춤이 토해내고 있던 것은 어떤 공허(空虛)였을 지도 모른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 공허는 텅 비어있지 않고 뭔가로 단단히 채워져 있는 공허입니다. 김은희씨에게 김영태 선생은 ‘불가사의한 환각’이라고 했고, ‘불가사의한 어둠‘이라고도 했습니다. 이를 제 식으로 말한다면, 불가사의함은 어둡고 환각은 하얗습니다. 김은희씨의 춤은 그런 하얀 어둠으로 다가옵니다. 모순되기에 아프지만, 그렇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순백은 비어있으나 숨을 쥐고, 숨을 막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서 춤과 삶과 몸이 꼭 붙어있는 경우를 말했지만, 김은희씨의 춤에서 춤추는 이 자신과 춤과의 거리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자연 “춤과 안무의 구별은 별 의미가 없어”(평론가 김태원) 보입니다. 그것이 무대에서 김은희씨의 독특한 존재감입니다.

돌이켜 보면 97년은 김은희씨에게 하나의 전환기가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 개인으로서든 무용가로서든 반환점을 돌던 시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해에 발표된 작품은 『넘보라살』, 『들꽃』 , 『곶』, 『환(環), 환(幻)』이었습니다. 『환, 환』의 안무노트 첫 문장은 “여자 나이 서른 다섯, 그 인생의 반환점에 서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인간의 의미를 한 번쯤 점검해 보고 싶다” 였습니다. 끝 문장은 “비어 있는 길 위에서 눈을 감다” 입니다. 『들꽃』에는 안무노트 대신 시가 인용되어 있습니다. “길을 간다/길은 늘 비어있다/빈 길을 나는 채우며 간다/어린 날로부터 걸음마를/걸음마는 다시 달음질을/그래서 나는 낯선 길을 찾아나선다”(성준복의 「길로 나서며」). 김은희씨의 심상이 이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환, 환』 이후, 김은희씨 작품은 소극장에서 대극장으로, 독무에서 무용단 규모로 무게 중심이 옮겨갔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운 단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흔히들 안무가로서의 성장이 작품 규모의 확장과 비례하는 듯한 모습, 그래서 소극장에서의 솔로는 좀처럼 ‘작품’으로 여기는 않는 시각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화가나 조각가에게 캔버스와 조각상의 크기가 예술성이나 삶의 깊이와 비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토가(舞踏家)들 가운데는 우리가 잘 아는 오노 가즈오나 야마다 세츠코처럼 훌륭한 독무가(獨舞家)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겐 춤이 곧 몸이고 삶일 수 있습니다. 다른 무용수들의 몸을 가지고 춤을 안무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론 자신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에겐 자연스러울지 모르는, 솔로에서 무용단으로의 이행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그것이 김은희씨에겐 그 누구보다도 단순한 외형의 변화만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를 동반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소극장과 대극장(혹은 중극장)의 춤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춤추는 이의 입장에서도 차이가 있겠으나, 혹여 한결같은 춤이라 하더라도 관객의 눈에는 공간에 따라 전혀 다른 춤이 됩니다. 무대와 객석의 사이가 벌어질수록 관객에게 느껴지는 김은희씨 춤의 존재감은 그만큼 엷어집니다. 관객은 더 이상 김은희씨에게 ‘몰입’되지 않고 그 춤을 ‘관찰’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용수들의 춤을 안무해야 할 때, 자연스럽게 춤과 안무는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춤과 몸과 삶은 그렇게 흩어져갑니다. 근본적으로 나르시스적일 수밖에 없는 독무와 달리, 다른 무용수들의 춤을 짜고 대극장에 걸맞게 규모 있는 작품을 ‘구성’하기 위해서 안무가는 자신을 객관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무에서 잘 드러나듯 내성(內省)적 춤 어법에 가까운 김은희씨에게 이런 작업이 손쉬울 리 없고, 또 가능하더라도 그 결과물은 김은희씨가 독무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것이 됩니다. 그러면서 무대에서 느껴졌던 김은희씨의 아우라는 점점 사라져갑니다. 그럼에도 김은희씨가 본격적으로 춤계의 주목을 받은 것이 98년 이후라는 것은 제가 보기엔 늦어도 한참 늦은 통찰에 다름 아닙니다.

시간을 건너 뛰어, 지난 10월에 새로이 단장하여 선보인 『우물단장』(「우리춤 빛깔찾기」, 10월 2일 8시, 토월극장)을 객석 한켠에서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지난해 초연에 비해 개작이 있었다고 하는데, 초연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우물단장』은 적어도 안무가로서의 김은희씨를 보게 해줍니다. 이 작품에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거리(距離)’와 ‘반복’입니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거리는 공간의 분리로 나타납니다. 처음 무대 앞에 우물을 상징하는 듯한 노란 사각형 위로 김은희씨가 홀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 멀리 무대 뒤로 여섯 무용수들이 나란히 서서 저마다 춤을 춥니다. 이 극단적인 거리감이 무대에서 그리 흔치는 않습니다. 다른 장면에선 관처럼도 보이는 사각의 상자로부터 앞쪽으로 작은 꽃밭이 펼쳐집니다. 무대 왼편 뒤쪽에 객석을 바라보며 하나, 무대 오른편 앞쪽에 왼편을 바라보며 다른 하나가 있습니다. 이들 역시 서로 떨어져 있습니다. 관객은 둘을 동시에 보기 어렵고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전체적으론 묘한 긴장을 느끼게 합니다. 이 거리를 김은희씨가 안무가로서 작품에 대해 확보한 거리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앞서의 작은 꽃밭에서 각기 여자 무용수가 앞뒤로 구르며 꽃들을 짓눌러 길을 냅니다. 구르는 동작이 격하게 반복됩니다. 더 반복되었어도 무방했을 겁니다. 만일 반복이 없었다면 이미지만이 남았을 겁니다. 반복됨으로써 이미지는 비로소 삶으로 채워집니다(그 삶이 무엇이었는지, 고통이었는지, 슬픔이었는지, 견딤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허무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 모든 편린들이 묻어있었다고 보고 싶습니다).
「우리시대의 무용가 2002」에서 박호빈씨와 함께 한 『달에 묻은 섬』에서는 바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왜 저 바람은 몸 안에서 불지 않고 저토록 몸 밖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한때 바람은 김은희씨 자신이었습니다.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에서 어떤 쓸쓸함을 봅니다. 안을 단단히 채우고 있던 공허의 어둠이 어느샌가 밖으로 빠져나간 쓸쓸함입니다. 깨진 거울 앞에서 부서진 환각을 마주하는 생경함이 무대 위에 냉혹하게 존재합니다. 시간은 붙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고, 그저 부서질 듯 온몸으로 받아내고 응시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춤이 예술이기 이전에 날 것 그대로의 생(生)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김은희씨를 ‘과거형으로’ 그리워하는 이유입니다. 김은희씨가 무대에서 즐겨 사용하는 거리(공간의 분할)는 춤과 몸, 몸과 관념, 춤과 삶 사이의 거리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에 묻은 섬』에서 여인이 과거의 사랑을 추억하듯, 저는 하얀 어둠의 그 무표정한 봉인을 추억합니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프다…. 내 시간이 아프다.”
이것은 역시 시간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관객인 저에게 건네는 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