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작년 가을, 서울에서 한참 공연준비에 분주할 즈음 이동하는 차 안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프랑스에서 온 이 전화는 세계적인 컨템포리리댄스의 거장 수잔 버지(Susan Buirge)가 건 것이다. 짧게 안부를 주고받고는 곧바로 내용에 들어갔다. 용건인즉, 2005년 4월, 프랑스에서 있을 「그랑 아뜨리에(Grand Atelier)」에 안무가3인과 작곡가3인을 초청하여 춤과 음악의 공동작업을 통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한다는 취지와 이경은을 안무가로 초청하고 싶고 출연무용수는 수잔버지무용단 그리고 악기연주는 스트라스버그 타악연주단이 한다는 것이었다. 평소에 음악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근간에 더욱 강해지고 고민하고 있던 춤의 본질과 타장르와 만나 새로운 것을 탄생시킨다는 호기심으로 흔쾌히 수락을 하고 더욱 구체적인 사항은 이메일을 통해 추가로 받고는 12월 프랑스로 1차 작업을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안무 디렉터로는 수잔 버지, 음악 디렉터로는 마크 텍시어, 그리고 그들이 선발한 3명의 안무가로는 프랑스의 라우렌스, 아프리카의 안드레야 그리고 한국의 이경은이었고, 음악작곡가 3인으로는 이탈리아의 프랑세스코, 브라질에서 온 알레한드로, 그리스 싸이프러스의 에비스 사무티즈였다. 1차 작업에서는 각자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함께 할 작업파트너를 정하면서 앞으로의 작업방향을 설계하는 기초를 마련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간 재단에 함께 머물면서 이틀간은 2시간씩 각자가 준비한 영상자료 DVD와 비디오, 음악CD 등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작품성향을 파악하고 안무가의 경우 자신의 춤작업과 그때 사용한 음악과의 관계를 분석,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이러한 소개를 통해 각자 맞는 파트너를 찾고자 하는 것이 프레젠테이션의 취지였다. 프랑스 안무가 라우렌스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no step』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현재 유럽댄스의 주류를 이루는 넌댄스(non-dance)를 표방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남편이 작곡가이며 그로 인해 많은 작업을 함께 하는데, 이것이 나의 의견으로는 춤에 마냥 맞춘 음악이 아니라, 그리고 또 그 역도 아닌 함께 컨셉을 가지고 의견교류를 충분히 한 결과 나온 작품이라고 생각됐다. 아프리카의 안무가는 본인의 작품 『Pressure』를 영상으로 상영하면서 제작여건의 미흡함에서 오는 에피소드도 함께 곁들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아직 제작여건이 선진화 되어 있지 않아 아직까지는 본인의 선천적인 아프리카 리듬과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음악연주가에게 직접 구체적인 리듬을 제시하고 연주를 주문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안무가이자 동시에 음악감독을 겸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프레젠테이션에 세 작품을 선보였다. 2년 전에 문예회관에서 발표했던 『원(one)』과 독일서 올렸던 『오프 데스터니(off destiny)』, 한일공동제작 『사이』가 그것인데, 관람 후 스타일 분석에서는 『원』의 색채감과 음악구성, 『오프 데스터니』의 내적 리듬과 간결하면서도 강한 주제전달을 그리고 『사이』에서는 한•일 양국의 하나같은 조화로움과 세트를 기발한 활용 아이디어를 특징으로 선명하게 꼬집어 내었다.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오디오와 비디오, 악보를 통해 발표하였는데, 나중에 나의 파트너가 된 그리스의 음악가 에비스는 뮤지컬씨어터를 주로 작업하며 그래서인지 현대음악이면서도 극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최근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초청공연되었다는 그의 오케스트라 작품에서는 20명쯤 되는 연주자가 연주를 하면서 본인들의 악기를 직접 이리저리 옮기며 위치변화를 통해 시각적 구성을 만들어내고 그로인해 청각을 이동시키는 실험을 들려주고,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안무처럼 말이다! 음악과 영상, 음악과 춤의 결합을 통해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시청각으로 자극했던 작곡가 알레한드로. 왠지 모를 리듬의 친근함과 한국정통가락과 상당부분 흡사하다고 느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인 부인을 두고 있는 작곡가 부부였다. 아마도 그 둘의 예술이 상당부분은 영향을 주고받고 교환되었으리라 예견된다. 마치 그의 생활이면서 정신세계 한쪽에 자리잡아 그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흡수되었겠지만, 그의 작품에 대해 논하기 이전에 그의 동양적 가락을 동양인인 내가 유럽에서 느끼는 느낌은 나에게 객관적인 식견을 가지게 한 순간이었다. 그 느낌이 어쩐지 강하고 짜릿하게 느껴진다. 그가 의도했건 아니건, 이것이 자연스런 향수에서라기보다 동양성 그만의 ‘느낌’, 곧 ‘기질’인 것 같다. 외국에서 보는 동양에 대한 시각, 곧 ‘동양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가 이때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특징이리라. 이제 나와 에비스, 라우렌스&프랑세스코. 안드레야&알레한드로가 파트너로 정해졌다. 이제 깊은 고민에 빠질 차례! 이때부터는 밥이 먹히지 않았다. 현장감 있는 솔직함이라면 빵이 넘어가질 않았다. 몇 달 전 전화를 받았을 때의, 수잔의 멀리서의 목소리가 너무도 가깝게 느껴질 만큼의 반가움 그리고 세계 3인의 안무자 중 한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기쁨은 이제 없다. 이리 저리로 다 흩어지고, 존재도 없이 희석되어지고는 현재 남은 것은 두려움 뿐. 이제까지는 그저 준비였다. 이제부터가 비로소 시작인 것이다. 에비스와 나는 작업을 해야하는데, 재단 정원의 겨울을 맞은 앙상한 풍경 속에 우리 자신도 앙상하게 떠돌고 있었다. 둘의 앞으로의 계획을 또 발표해야 하니, 우리 그룹은 앞으로 작업방향에 대해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마주 앉는다. 어쩔 수 없이 앉는다. 음악을 위한 춤이 아니고, 춤을 위한 음악도 아닌 동등한 비율로 무엇에도 치우치지 않는 절대적 공동작업을 하라는 전제 하에 막상 맞닥뜨리고 나니 난감할 뿐이었다. 내가 춤을 만들고 작곡가가 그것에 맞추어 음악을 만든 일은 있었지만, 그리고 같은 무용가끼리의 공동작업 역시 쉽지 않은데 무용가와 음악가와의 공동작업이라? 이전에 추상적으로만 여겨졌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니 고민이 절로 됐다. 오랜 한숨과 시간이 지나가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서서히 일상적인 이야기들로 시작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국과 그리스 싸이프러스(Cyprus), 두 나라 모두가 분단국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또 분단의 현실을 주제로 했던 나의 작품 『원』을 매우 인상 깊게 봤다는 그의 감상에 연유해 그 연장선상에서 가제 『투(Two)』를 떠올렸다. 사용하는 모든 것을 두가지로 하기로 한다. 무용수도 둘, 음악가도 둘, 악기는 2차 작업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결정하기로 하고, 안무와 작곡에서의 방법 역시 모든 것의 극과 극 두 가지 대비되는 양상을 차용하기로 했다. 정해놓은 부분과 열어놓은 부분, 소리 역시 아주 길고 짧고, 무용수의 키 역시 아주 크고 작고, 성별 역시 남성과 여성, 움직임 역시 거칠고 아주 부드럽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보를 뒤집어서 무보로 차용하기로 했다.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에서 에비스와 나는 위의 사항을 발표하고 모두들 흥미를 표한다. 수잔은 내게 묻는다. 어떤 무용수를 원하느냐고. 나는 지난번 2002년 몽펠리에 당스 페스티벌에서 수잔의 작품에 출연했던 노장 남자무용수 미쉘을 무척 인상깊게 봤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성숙한 무용수를 원한다. 작품 『투』의 컨셉 위에서 여성과 남성 이렇게 다른 성을 원하며 큰 키와 작은 키의 무용수를 원한다고 말하자, 수잔이 한참 생각 후 “미안하지만 남영호는 줄 수 없다”고 한다(재불 무용가 남영호씨는 현재 수잔버지무용단에 소속되어 있다). 그때 마침 파리에서 수잔 버지가 안무하는 솔로작품에 남영호씨가 출연하는 관계로 일정상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 마이 갓! 수잔은 큰 키의 남성무용수 미쉘과 잘 어울릴만한 작은 키의 여성무용수를 고민해보겠다고 했다. 그 무용수가 누구일지 여전히 궁금하면서도 남영호씨와의 기회를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대략의 계획을 세운 우리 둘은 2월에 그가 활동 중인 영국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우스꽝스런 얘기로 나의 고민하는 모습이 실험실의 생쥐 같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관계라면 생쥐는 음악과 춤이 아닌가? 나는 그것으로 실험을 해야 할 무언가를 창조해야 할 실험자인 것이다. 바들바들 떨 상대는 실험자가 아니라 생쥐였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상자 안을 바라봐야겠다. 그것이 주된 할 일인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메일과 팩스, 전화로 작업이 진행되었고, 2005년 2월에 2차 작업으로 하기 위해 영국으로 향했다. 1차 작업에서는 음악과 춤, 여섯 작가를 통해 그들의 다양한 예술세계를 보고, 교환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나 자신에게도 전작들을 정리, 분석하고 앞으로를 계획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춤에도 세 명의 안무자가 너무도 다른 표현과 방법으로 안무를 하고 있으며, 음악에서 역시 사실 존 케이지나 아르보 파르트 같은 현대음악을 들으면서 참 생소하고 멀구나 라고 느꼈던 이전의 경험을 떠오르게 했던 그 시간. 한편 춤을 보는 관객들이 말하는 너무 추상적이라서 현대예술은 어렵다는 말하는 것의 공감. 내 자신이 예술가이면서도 다른 예술을 접할 때 이런 생경함이라면 관객은 오죽하겠는가? ‘한 가지 책을 읽은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라고 했다. 춤만 알아서는 안 되겠다. 사실 다른 예술을 조금은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전혀 몰랐다. 얕았다! 다양한 예술을 포용하고 학습할 때 본인의 예술이 더욱 튼실하고 깊이 있어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