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

왼쪽부터 전숙희, 이희승, 서항석씨

■방해공작의 가지가지
정부가 환도한 후에도 대구에 그냥 외톨로 처져있게 된 중앙국립극장의 처지는 고달프고 처량했었다. 다만 대구의 일반 시민에게 중앙국립극장의 존재가 환대(歡待)받고 있은 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국립극장은 때때로 자체의 기획으로 선정된 작품을 상연할 뿐 아니라, 서울에서 초치(招致)하는 극단들의 상연물도 국립극장의 체면에 어긋나는 저질(低質)의 것이 아니어서, 대구 시민들에게 국립극장의 상연물은 믿어도 좋다는 일반 관념이 차차 자리 잡히기 시작하였고, 국립극장은 언제나 대구의 다른 극장들보다는 비교적 많은 관객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세로 인하여 직접 그 영업에 타격을 받게 된다고 생각한 다른 극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다른 극장들이 이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국립극장보다 한 걸음 나아가 더 좋은 작품을 상연하고 더 훌륭한 극단을 불러오는 일에 힘써 주었다면, 그것은 연극·영화계를 위하여 보람 있는 일이기도 하고, 대구 시민을 위하여서도 환영할 일임에 틀림 없을 것이지만, 그렇지가 못하였었다. 선의의 경쟁으로 나오려 하지 않고, 악랄한 방해공작을 일삼았던 것이다.
당시 대구에는 국립극장 외에 3개의 극장이 있었는데,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국립극장에 대한 방해공작은 주로 그 중의 모 극장의 주인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그 방해공작의 한 가지 예로는, 국립극장이 학생동원을 기획하여 대성황이 될 것을 예상하고 있으면, 어느 사이에 뒤로 공작하여 국립극장의 기획을 김빠진 풍선으로 만들어 버리는 등 놀랄만한 수완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하긴 대구에서의 학생동원은 학교와의 교섭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학교 외에 학생동원을 조종하고 있는 일종의 폭력자(暴力者)가 있어, 그와 줄이 닿아야만 학생동원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일찌기 경험한 바이기도 하다.
나는 52년 하반기에 부산에서 문교부로부터 반공연극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 극단 「신향(新響)」을 조직하고 중국작가 철오(鐵吾)의 원작소설 「여비간(女匪幹)」를 각색한 「여당원(女黨員)」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대구 공연을 갔던 일이 있는데, 그 때에 학생동원은 문교부가 책임지고 대구의 각 학교에 직접 공문을 보내 놓았지만, 막상 극단이 대구에 이르러 공연의 막을 올린 때에는, 동원된 학생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객석이 텅 빈 채로 3일 공연을 마치고, 장치·도구의 운반비와 단원들의 차비까지도 극장에서 꾸어 가지고 부산에 돌아간 일이 있었다. 이 때의 불황이 저 폭력자의 농간에 의한 것이었음을 사후에야 알았던 것이다.
내가 국립극장장으로 대구에 간 때에는, 국립극장이 차마 폭력자와 결탁할 수는 없어, 그냥 모른 척하고 지냈었는데, 드디어 국립극장의 방해자가 그 폭력자와 결탁한 것이었다.

■상이군인들의 야료도
전란이 마무리 된 지 얼마 아니고, 뒷처리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때라서, 거리에 상이군인이 범람하고 있은 것은 당시의 뼈저린 정경의 하나였었다. 원호의 손이 미치지 못한 그들은 거리를 방황하면서 곧잘 민폐를 끼치곤 했던 것이다.
국립극장에도 상이군인들이 몰려와서 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 야료가 갈수록 심해가는 것이었다. 역시 미확인 정보에 의하면 국립극장의 방해자가 상이군인들을 넌지시 사주(使嗾)하는 까닭이라고 하기도 했다.
상이군인들은 대개 「밥을 다오」, 「용돈을 다오」 하는 식으로 시비를 걸어 가지고, 국립극장이 공금 외에 다른 돈이 없으므로 그들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작지를 휘두르면서 「모 극장 같은 민간극장도 우리들에게 밥도 주고 돈도 주던데, 돈 잘 버는 국립극장이 우리들을 이렇게 박대할 수 있느냐」고 문간에 버티고 서서, 들어오는 손님을 노려보며, 금방이라도 그 작지로 내려갈길 것만 같은 기세를 보이면, 들어오던 손님은 질겁을 하여 발길을 돌리곤 하는 것이었다. …… 여기서 이 야료의 사주자가 바로 모 극장의 주인임을 제물에 실토하고 만 것이라고 풀이하는 직원도 있었다.
상이군인들의 야료를 제지하는 데에는 대개 극장 앞, 길 건너에 있는 동성로파재소(東城路派在所)의 협조를 받았었지만, 그 언젠가는 전쟁미망인으로 자처하는 어느 고마운 부인의 도움을 받은, 감격적인 일이 내 기억에 사라지지 않는다.
상이군인들이 한창 야료를 부리고 극장 직원들이 그 작지 앞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판에 40대의 한 여인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나는 전쟁미망인이에요. 내 남편은 전장에서 싸우다 죽었어요.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와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팔 다리가 다 끊겼더라도 살아서 돌아오기만 했더라면 내가 업고 다니던지, 이 행주치마에 싸서 안고 다니기라도 하면서 내 힘껏 보살피며 한 세상 같이 살고 싶은데, 그 분은 죽었고, 그래서 나는 전쟁미망인이에요. 그런데 오늘 나는 당신네들의 하는 짓을 보고, 내 남편은 전장에서 잘 죽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살아서 돌아와서 당신네와 같은 행동이나 하고 돌아다닌다면 그 얼마나 슬픈 일이겠어요? 당신네들! 전장에 나가서 죽지도 못하고 병신이나 되어 돌아온 것이 무엇이 그리 장하다고 이 야단들이시오? 어서 물러들 가시오」 라고 준절히 타이르는 것이었다.
누구 하나 대꾸하는 사람도 없이 수그린 고개들을 쳐들지도 못한 채 뿔뿔이 헤어져 가던 그 엄숙하고 감격적인 광경이 지금도 내 눈 앞에 서언하다.
감사와 감격으로 범벅된 흥분상태에서 미처 그 부인의 주소도 성명도 알아두지 못했고, 그날 이후 그 부인은 다시 극장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 부인이 어디의 누구였는지 지금도 못내 궁금하다.

■세금운운의 투서까지
국립극장에 대한 방해공작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랄해졌다.
국립극장이 손님에게서 받은 입장세를 정확히 국고에 넣지 않고, 금액을 적당히 조작하여 뒷구멍으로 흐지부지 한다는 누군가의 투서가 대구의 동부세무서에 들어갔고, 세무서장은 이를 검찰청에 고발하였다. 검찰은 극장에 나와서 장부를 압수해가고 관계직원을 검찰청으로 불러서 세밀한 조사를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되니, 대구의 신문들이 이 일을 떠들어대었고 중앙의 신문들도 크게 떠들썩했다. 나는 이 난국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우선 극장 자체 내에서의 엄밀한 조사와 점검을 단행한 결과, 무슨 이렇다 할 하자도 발견됨이 없었으므로, 이로써 우리 직원에 대한 나의 믿음을 더욱 굳히고, 나 자신의 태도를 의연하게 가다듬고서,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기로 하였다.
문교부에서 지급히 본청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나는 지체없이 밤차에 올라, 야행 8시간을 뜬눈으로 새고 서울에 도착하여 돈암동 내 집에는 들를 사이도 없이 바로 중앙청으로 가서 문교장관을 만났다.
문교장관 이선근(李瑄根)씨는 신문에 떠들썩한 그 사건의 경위를 나에게서 듣다가 불쑥 나더러 사표를 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건의 경위를 들을 것도 없이 대뜸 사표를 받겠다고 미리 작정한 것 같은 태도였다. 문교장관의 태도로 보아 문교부에까지 무슨 그럴사한 공작의 손이 미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밤차에서 지새는 동안, 이런 경우를 예상하기도 했었던 것이고, 만일 문교장관이 이렇게 나온다면 나는 단호히 거절하리라고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사건의 발생이 어느 짓궂은 사람의 투서에 의한 것인데, 사실 유무가 밝혀지기도 전에 공무원의 목이 잘려야 한다면, 공무원은 목이 백이라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고, 더구나 국립극장의 경우에 내가 서뿔리 사표를 내기라도 하면, 그것은 없는 사실을 자인하여 국립극장의 불명예와 파탄을 안겨주는 것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사표는 사건이 밝혀지기까지 기다려 달라 하고, 일어서서 그길로 대구로 되돌아갔다. 결국 이 사건은 검찰의 조사 결과 하나의 무고(誣告)였음이 판명되어 무사히 끝났다.

■드디어 폐지론이 대두
국립극장에 대한 방해자는 국립극장이 대구에서 없어지면 그 건물을 가로채어 보겠다는 야망을 품고, 그동안 여러 가지로 방해를 하여 국립극장이 스스로 문을 닫아 버리기를 바라었으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국립극장이 대구에서 떠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그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립극장을 폐지시키는 공작을 하는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대구 출신 자유당 의원을 설득하여 국회에서 국립극장 폐지론을 주창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상은 당시 문교부에 입수된 정보에 의하여 내게 알려진 것이다.
여당인 자유당 의원의 국립극장 폐지론은 국회에서 꽤 폭 넓게 먹혀 들어가, 드디어 문사위원회에서 문교 당국을 불러 이의 질의를 벌이기까지에 이르렀다. 나도 문교부의 연락으로 그 위원회에 나갔다.
답변에 나선 문교장관 최규남(崔奎南)박사는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바톤을 문화국장에게 넘겼고, 문화국장은 「여기에 당사자인 극장장이 와 있으니 그의 답변을 듣는 것이 좋겠다」고 바톤을 나에게 넘겼다. 나는 답변에 나서서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
「국립극장에는 설치목적이 있읍니다. 국립극장을 폐지하는 일은 두 가지 경우에만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국립극장이 설치목적을 완전히 달성하여 더 존속시킬 필요가 없다고 인정되는 때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대한민국의 힘으로는 도저히 국립극장의 설치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단정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