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이숙재 안무의 『신찬기파랑가』(사진 최영모)

■전통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 - 밀물현대무용단의 『신찬기파랑가』
한글을 소재로 한국 현대춤의 안무지평을 확장해온 밀물현대무용단이 창단 2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1984년 창단된 밀물현대무용단의 존재는 한글춤으로 등식화된다. 매년 10월이면 어김없이 한글춤 공연을 통해 민족의 문화적 위상을 드높여왔다. 밀물현대무용단이 창단 20주년을 맞아 신라시대 향가(鄕歌) 찬기파랑가를 소재로 신작을 발표했다.
3장으로 구성된 『신찬기파랑가』(2005년 2월 3~4일 국립국악원 예악당)는 현재-과거-현재 등으로 시점의 경계를 넘나든다. 1장 「사자여 새벽을 노래하라」, 2장 「기파랑을 기억하세요?」, 3장 「쓰러진 깃발을 다시 세우고…」 등으로 짜여져 있다. 서막은 한국음악으로 열고, 긴 장삼에 두루마기 의상을 착용한 무용수들이 정적인 움직임을 밀도있게 그려낸다. 무대적 형상화에서는 한국창작춤적 분위기가 농후하다.
이 작품의 내연엔 분명 과거와 현재,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오가지만, 전달되는 느낌은 혼란스럽다. 도시의 소란스러움은 달리는 자동차, 지하철의 소음으로 표상된다. 마술사의 불쇼가 아슬아슬하게 펼쳐지고, 원색의 의상을 착용한 무용수들이 밤무대 댄서처럼 현란하고 육감적인 몸놀림을 과시한다. 노동현장을 대변하듯 한 남자의 외침이 처절하게 들린다. 무예의 몸짓, 자반 뒤집기 등이 묘기수준으로 연기되고, 5인무의 역동성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연함과 강직함이 적절하게 조화된 신종철의 솔로는 유난히 돋보였다. 현대를 표현한 2장은 자유분방한 움직임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다양한 색상의 의상을 착용한 무용수들의 몸놀림은 무정형적이다. 구성 역시 큰 줄기만 있을 뿐, 무대공간의 대형은 무용수들의 선택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형된다. 두 개의 테이블이 등장하고, 협상결렬의 모습의 부각된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2장과는 달리 3장은 이해와 화합의 장으로 마무리되었다. 환타스틱한 영상, 군무의 화려함이 돋보였지만, 안겨주는 여운은 미약했다. 조명이 점차 어두워져 가는 가운데 솟대를 든 기파랑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면서 막이 내려진다.
이 작품은 신라시대 화랑의 높은 기상을 현대화하여 새롭게 조명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로 읽히는 다양한 코드를 감각적으로 나열한다고 해서 전통이 그냥 쉽게 현대화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을 그저 구호로서 접근하기보다는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보다 긴 호흡으로 진지하게 천착해가는 끈기와 정신이 요청된다.

김운미 안무의 『그 한여름』(사진 최영모)

■전쟁의 상처를 춤으로 형상화 - 김운미의 『그 한여름』
한국무용가 김운미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다. 역사에 대한 그녀의 관심은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한국근대교육무용사를 선택하여 깊이있게 천착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김운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이론적 탐구뿐만 아니라 창작작업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녀의 이러한 관심은 모친 이미라 선생의 창작정신과 닮아 있다. 지난 2월 20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공연된 김운미 안무의 『그 한여름』은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전쟁을 춤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은 소재선택에서 조금은 무모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김운미의 용기는 무모함을 현실 가능케 하였다. 『그 한여름』은 특별한 주역이 없이 군무 중심으로 전개된다. 시점 또한 현재에서 과거, 다시 현재 등 종횡무진 넘나든다. 작품전개는 서사성을 배제하고 전쟁과 분단, 그리고 혼란상황에서 밀려들어오는 외래문화의 퇴폐성 등 다양한 장면이 삽입되는 상황적 이미지춤으로 이끌어간다. 군대, 탱크, 전쟁고아 등 전쟁의 상흔은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영상을 통해 강조되지만, 작품과의 유기적인 연결점은 그다지 긴밀해 보이지 않는다.
무대적 표현에서 직설법이 안겨주는 부담은 움직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녀 2인무로 전개되는 스포츠댄스의 현란한 테크닉은 잠시 잠깐 시각적 풍요로움을 안겨주었지만, 전체맥락에서는 겉도는 장식품일 뿐이었다. 러시아 민속춤인 코박춤의 재현, 여성군무로 이루어진 포크댄스, 플라멩코 등도 작품속으로 밀도있게 용해되지 못했다. 좌우 이념대립을 흑백논리로 표상하려는 의도 역시 거칠게 다가왔다. 작품 초반부 정화수를 떠놓고 축원하는 여인의 기원무는 서막을 여는 도입부로서 타당한 설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휘날레로 장식된 통일 기원무적 해방춤은 사족같았다. 굳이 사물악기가 동원된 ‘민속춤한마당’ 같은 장면을 설정할 필연적 이유가 없었다. 이 장면은 『그 한여름』의 예술적 수준을 깍아먹는 작용을 했다.
그러나 주역 없이 전개된 군무진의 활약을 돋보였다. 지제욱, 김종덕 등이 주축이 된 군무진은 무게감있는 기(氣)의 발산을 통해 균형감각을 유지했다. 특히 남성 군무진의 죽창춤은 강렬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다이나믹한 구성미를 과시했다. 한국춤 고유의 질감을 유지하면서 현대적 움직임 기법을 일사불란하게 소화해내는 무용수들의 저력은 퍽 인상적이었다. 다만, 공간활용에서는 여백의 미를, 움직임에서는 발산보다는 절제를 즐길 줄 아는 여유의 미덕이 아쉬웠다.
우직스러울 정도로 역사적 현실문제를 화두로 삼아 작품창작에 몰두하는 김운미에게서 색다른 춤세계관을 읽게 된다. 역사를 해석할 때에는 관점이 중요하지만, 역사에 대한 예술적 형상화작업에서는 관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감성이다. 감성은 후천적 노력만으로는 소유하기 어려운 것으로 어쩌면 운명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술창작에 있어 이른바 ‘천재’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무대였다.

■한국적 가무악의 천착 - 서울예술단 정기공연 「고대의 향기」
현존하는 국공립단체 중에서 서울예술단은 비교적 단체의 이념과 정체성이 뚜렷한 편이다. 1999년 『상생』 이후 서울예술단은 한국적 공연양식의 정립을 표방하며 가무악 성격의 작품창작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오고 있다. 서양의 오페라, 뮤지컬 등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흐름에 견주면, 한국적 가무악의 공연양식을 표방하는 서울예술단의 행보는 지극히 타당해 보인다. 이는 서울예술단 신선희 단장의 전통문화 유산에 대한 각별한 애정에서 비롯된 뚜렷한 창작이념과 소신있는 철학의 실천에 따른 것이다.
이번 제19회 정기공연(2005년 3월 11~13일 문예진흥원예술극장 대극장)에서는 고구려의 기상과 신라인들의 우주에 대한 관념을 묘사한 『무천(舞天)』과 『산화가(散花歌)』, 두 작품이 배정혜 안무로 무대에 올랐다. 무천의 무대화는 한국적 가무악의 원천이 제천의례악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고구려의 무천(舞天), 예의 동맹(東盟), 부여의 영고(迎鼓)에서 보듯 우리나라 상고시대 공연문화의 정점은 제천의례악으로 압축된다. 고대의 제천의식은 천지신명께 드리는 제사였으며, 이에 춤과 음악과 노래가 삽입되었던 것이다. 이번 공연은 고구려의 제천의식에 토대하되 그것이 단순히 무대적 재현이 아닌,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재창조하려는 데 그 의도가 있는 듯하다.
『무천』의 무대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이미지를 근간으로 신화적 세계가 유려하게 펼쳐진다.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이 결혼하고 인간들이 생육되며, 수렵과 농사를 일상화하는 장면이 표현되고, 죽으면 북두칠성의 나라 하늘 연못에서 화생(化生)한다는 내용이 시적으로 형상화된다. 인간과 자연의 생멸과 순환구조가 잔잔하게 전개되는데, 박윤초의 노래는 작품의 내용 전달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일종의 명상적 분위기가 압도했다. 고구려는 칠부기가 있어 수, 당의 궁중에서 연주되었을 정도로 음악문화가 풍부한 나라였다. 아울러 고분벽화 무용도가 증명하듯 전문적인 무용수가 존재했을 정도로 춤문화 또한 융성했었음을 알 수 있다. 좀더 과감하고 구체적인 무용적 동작의 고증과 재현, 그리고 재창조 작업이 아쉬웠다. 연출만 보이고 정작 안무의 실체는 실종된 느낌이었다.
신라 경덕왕 19년 사양의례(射陽儀禮)에서 착안된 『산화가』는 불교의례를 토대로 안무된 작품이다. 나라의 불의 재앙이 내려 비가 오지 않자 왕이 남산에 올라 직접 하늘에 제사하니 미륵이 현신하여 모두가 하나되는 만다라의 세계가 이 세상의 도솔천임을 계시한다는 내용이 근간을 이룬다. 『산화가』에는 신라시대 춤들이 작품 전개에 따라 나열된다는 느낌이었다. 살풀이춤, 가면무, 범패합창에서의 나비춤, 바라춤, 법고, 무고, 물동이 악기춤 등이 선보이는데 창조적 상상력이 가미되어 좀더 밀도있게 재해석되거나 변용된 형태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왕이 백학들과 더불어 춤판을 벌리는 장면이나 안개 속에서 큰 바위가 솟아나 산화가를 부르며 꽃잎을 뿌리는 동자(童子)의 모습, 천신과 더불어 아름다운 황금빛 도솔천의 장경은 신비로우면서도 시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다. 한국적 선율을 근간으로 정적인 분위기로 이어지는 춤은 완급의 조절이 필요해 보였다. 신라시대를 표상하는 전통춤들을 삽입하되, 이를 토대로 안무적 상상력이 좀더 과감하게 발휘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한마디로 한국적 가무악의 공연양식에 걸맞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