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2014년 9월 1일 우리는 14시간의 비행을 거쳐 불가리아 소피아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밤에 도착한 우리는 곧바로 숙소로 향했고, 시내 도로로 빠지는 곳에 자리 잡은 「원 댄스 위크(One Dance Week)」의 간판이 칠흑 같던 어둠속에서 우리를 환하게 반겨주었다. 우리가 공연할 곳은 수도인 이 곳 소피아와 차로 1시간 반가량 이동해야하는 불가리아 남부의 플로브디브란 곳이었다. 그런데도 소피아공항에서 빠져나가는 도로변에 위치한 큰 간판을 보며 이곳 불가리아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과 지원에 내심 부러움과 초청단체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작년까지 「소피아 댄스 위크(Sofia Dance Week)」라는 이름으로 소피아에서 이루어졌던 페스티벌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플로브디브로 올해부터 장소를 옮겨 「원 댄스 위크(One Dance Week)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개최되었다.
이 페스티벌은 「원 댄스 위크(One Dance Week)」, 「원 디자인 위크(One Design Week)」, 「원 아키텍춰 위크(One Architecture Week)」를 포함한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아트페스티벌인 만큼 소피아 시내 곳곳의 레스토랑과 거리에서 리플렛과 포스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차량의 도움을 받아 이동하던 불가리아의 풍경은 맑은 하늘 아래 다양한 초록색을 겸비한 높디높은 산맥들이었다. 숨 막히게 생활했던 서울에서의 가슴을 쓸어내려주는 듯한 풍경이 새로운 설레임으로 자리 잡을 때 우리는 플로브디브에 도착했다.
2013년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에서 공연을 올린 후 우리는 이곳에 초청이 되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페스티벌의 총 디렉터 아센(Assen)과 「원 댄스 위크」의 디렉터 엘리아(Elia) 그리고 우리가 머무는 동안 우리의 모든 일정을 함께하며 도와줄 말티나(Martina)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간단한 식사 후 주변을 둘러본 플로브디브의 모습은 작지만 역사가 깊은 도시인만큼 도시 전체가 박물관과 같았다. 오래된 돌길과 성벽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많은 유적지들이 발길 닿는 곳곳에 어디든 자리 잡아 꼭 찾아다니지 않아도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2013년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에서 초청된 팀은 김호연, 유회웅 그리고 우리까지 총 세 팀이었다. 8월28일~9월6일까지 10일간 진행되었던 기간 중 다른 두 팀은 인터내셔널 셀렉션(International Selection)의 시작을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의 순서로 4일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아쉽게도 이곳에서 다른 한국 팀을 만날 순 없었다. 거기에 작년에 이어(이윤경, 류석훈, 전혁진) 올해 두 번째로 초청된 한국 팀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 성공적이었기에 많이 기대하고 있다는 말로 나는 약간의 부담감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 전 페스티벌의 사무실에서 진행되는 조촐한 파티에 초대되어 많은 스텝들과 미국에서 초청되어 온 시드라벨무용단(Sidra Bell Dance Company)과의 만남이 있었다. 작지만 페스티벌에 참여했던 여러 건축, 미술 디자이너들의 작품으로 꾸며진 공간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 다양한 소개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그 날의 시네마 프로그램이었던 『제로 디그리(Zero Degrees)』(안무 Sidi Larbi, Akram Khan)를 감상하며 플로브디브에서의 기분 좋은 시작을 알리는 잊지 못할 밤을 함께했다.

9월5일 밤 9시30분 보리스하우스(Boris Hristov House of Culture)에서의 공연을 위해 아침 식사 후 오전10시에 극장으로 향했다. 놀라웠던 것은 총 30분 가량의 나의 작품이 이 곳 보리스하우스에서 단독으로 공연 될 예정이었고, 우리의 리허설 시간은 오전10시부터 오후9시까지 자유롭게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 팀에 대한 기대감에 따라온 부담감과 30분 작품을 보기위해 이 큰 극장을 메울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올까하는 불안감에 무대 셋업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너무나 많았기에 여유있게 준비했던 리허설 일정은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출국 전 보내줬던 테크니컬 카드(Technical Card)가 무대감독에게 전달이 안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작품에 필요한 포그머신과 강풍기, 조명에 필요한 케이블 선들이 극장에 없었기에 급하게 소피아에서 운반해오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도착이 되었고 그때부터 우린 본격적인 조명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제서야 시설은 너무 좋지만 환경의 열악함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단독공연이 아니었다면 공연을 올릴 수 있었을까하는 아찔함과 함께 리허설은 진행되었고 모두가 시간에 쫓겼지만 (사실 워낙 진행이 빠른 한국스텝들에겐 충분한 시간이었다…) 최선을 다해 열정적으로 준비를 해주었다.
빠듯하게 리허설이 끝나 서둘러 준비할 수밖에 없던 나에게 엘리아가 찾아와 15분을 늦춰줄테니 걱정하지말고 천천히 준비하라고 일러주었다. 30분의 공연을 위해 15분을 기다려야하는 관객을 생각하니 너무 미안한 마음과 함께 관객이 어느 정도 찰 순 있을까하는 불안함이 더욱 밀려왔다. 그렇게 무대에 올랐고 사회자의 소개가 끝났을 무렵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왔던 것은 비단 나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동안 성황리에 마쳤던 다른 한국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관심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울컥할 정도로 고마움에 더 집중하여 공연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커튼콜을 위해 환히 켜진 객석의 풍경은 2층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기립박수를 쳐주며 내 생애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었다. 나와 함께해준 스텝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기쁜 마음으로 극장에서 나왔을 때 하늘엔 너무나 아름다운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마침 그 날은 이 페스티벌의 총 디렉터인 아센이 오랫동안 준비했던 「2019 유럽문화의 도시(European capital of culture 2019)」의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이곳 현지인들과 거리는 온통 그 결과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연이 끝난 시각 쯤 플로브디브가 영광스런 「2019 유럽문화의 도시」에 선정되었다는 결과가 나왔고, 그래서 온통 축제분위기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9월5일 그 날은 나에게도 또 불가리아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도 너무나 뜻 깊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다음 날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으며 곳곳에 「2019 유럽문화의 도시」를 알리는 포스터와 현수막이 즐비했다. 우리는 페스티벌의 다른 공연과 쇼케이스를 보고 아센의 안내로 올드타운의 야경을 보기위해 나섰다. 플로브디브의 올드타운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거리로 작고 아기자기한 박물관, 미술관, 호텔, 부유층의 이색적인 집들 등이 옛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듯한 인상이었다. 마침 올드타운 안에 있는 로마 원형 극장에서 오페라 「아이다」가 공연 중이었고 우리는 그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 곳에 들어선 순간 마치 과거로 또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내가 빨려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고, 신시가지의 야경을 뒷 배경으로 과거와 현재의 미묘한 공존을 느낄 수 있는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불가리아에서의 일주일은 내 평생 가장 좋은 여행 중 하나로 남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물론 우리는 공연을 하러 그 곳으로 향하였고 머물렀지만 소중한 인연과의 만남 그곳에서 느꼈던 여러 예술과 자유, 과거와 현재 그리고 한국인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문화예술에 대한 그들의 관심에 나 또한 흠뻑 취할 수 있었다.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을 통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고 소중한 무대에 오를 수 있어 기쁜 시간이었다. 누구보다 나와 함께 해준 소중한 무용수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