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일 년 중 춤공연이 가장 왕성한 시즌이 돌아왔다. 올 봄에 심화된 공연예술계의 침체는 가을을 맞이하여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가는 듯 보인다. 9월만 하더라도 매주 페스티벌이나 극장기획 혹은 개별창작발표가 이어졌는데 공연의 횟수와 다양성뿐 아니라 범위에 있어서도 활기를 느낄 수 있다. 위로는 중견 이상으로부터 아래로는 신진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로 펼쳐졌던 것이다. 그 중 9월 초·중순을 장식하였던 「2014 K-발레월드(Ballet World)」에서 제임스 전과 조윤라의 춤 그리고 지경민이 이끄는 고블린파티의 신작, 이은주의 무대를 들여다본다.

* 2014 K-발레월드의 ‘발레 프로젝트 4050’(9월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9월2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있었던 2014 K-발레월드의 ‘발레 프로젝트 4050’에서 제임스 전은 강석원과 남남듀엣으로 『투 이미지(Two Images)』를 선보였다. 현재의 나와 마음속의 나를 모던한 발레 움직임으로 풀어 가는데 있어 국내 정상급 발레안무가다운 깊이와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특히 제임스 전의 춤과 삶이 녹아들어있다는 점에서 더욱 진솔한 감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새로운 창조에 대한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창작자로서 그리고 여전히 날아오르고 싶지만 달라진 몸을 인정해야하는 춤꾼으로서,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고나 할까. 여기에 예술적 이상에 대한 식지 않는 열정까지 잔잔하게 담아냈다.
『투 이미지』는 스스로를 투영하는 작품이기에 제임스 전에게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가 파트너의 뒤에 서서 움직일 때조차 말이다. 제임스 전은 근육의 탄력과 같은 기능적인 면에서 예전만 못하더라도 작품표현력과 무대장악력에 있어 범접하기 힘든 노련미를 발휘하였다. 이 매력적인 올드보이의 춤에 대해 관객은 열화와 같은 박수로 응답하였다. 예술가뿐 아니라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춤추는 삶의 응집과 축적은 긴 여운을 남긴다.
『왈츠6 글루미데이(Waltz. #6 Gloomy Day)』에서 조윤라는 젊은 발레무용수 신현지와 듀엣을 이루었다. 삶의 여정에서 우연 혹은 필연으로 다가왔던 여러 만남과 사연을 떠올리면서 삶이 때론 기쁨으로, 또 때론 슬픔과 고통으로 다가왔음을 잔잔하게 음미한다. 관조적 분위기를 띠는 춤은 힐긋 보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젊은 파트너가 그러한 분위기를 받쳐주지 못한 점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스쳐지나가는 만남과 사연이 그리 극적이지만은 않듯, 차분하게 그려내는 우울한 날의 왈츠는 더 현실적일 수 있는 것이다.
조윤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꾸준하게 무대에 오르는 뒷심을 발휘해온 발레리나다. 다만 60대에 들어선 그녀가 예년에 비해 힘이 떨어져 보였으므로 앞으로의 출연에 대해 신중히 고려할 필요는 있다. 강도 높은 자기 관리와 훈련으로 신체표현능력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 이후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을 수단이 아닌 순수한 애정으로 대하는 자세 그리고 과시보다는 춤에 대한 열정으로 무대에 오르는 모습에는 언제나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 지경민의 『인간의 왕국』(9월13~14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드림)
고블린파티라는 무용단은 아주 최근 들어서 빠르게 이름을 알려가는 신생 단체다. 특히 단체를 이끄는 지경민은 주목할 만한 젊은 현대무용가로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9월13~14일 강동아트센터 소극장드림에서 펼쳐진 『인간의 왕국』은 TV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영상 속 동물들의 행동을 설명하는 인간의 언어가 제멋대로의 해석으로 느껴졌다는데서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 현 시대에 만연한 잘못된 논리를 바꾸려 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빗대고 있다.
지경민은 그 동안 부조리함을 바라보는 예민한 시각을 뻔하지 않은 자유롭고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가시화해왔다. 『인간의 왕국』에서도 지경민을 비롯한 전효인, 이경구, 임진호, 김평수, 김동욱이 사회비판적인 뉘앙스를 유사한 맥락의 춤 이미지들로 풀어냈다. 지경민의 안무력과 연출력이 십분 발휘된 듯한 앞부분과 뒷부분은 신선하면서도 견고한 춤으로 채워졌다. 특히 마지막의 군무는 지경민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자유로우면서도 감각적이고, 신선하면서도 견고한 움직임으로 인상적인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한편 무용수들에게 자율권을 많이 부여한 중간 부분에서는 다소 집중도가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이 작품이 2013년 6월에 초연한 『인간의 왕국』과 12월에 초연한 『불시착』을 합쳐서 만든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러 현실적인 문제로 촉박하게 만들다보니 무용수들과 공동작업으로 기존의 두 작품을 엮어놓은 듯하다. 어쩔 수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주목받기 시작한 젊은 무용가가 급조한 듯한 작품을 만드는 것은 앞으로의 창작 활동에 그다지 고무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흥미로운 작품을 만들었다는 점은 지경민의 재능일 수 있으나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해(害)가 커질 것은 자명하다.
젊은 기대주로 주목받고 있는 만큼 지경민은 본연의 창작물을 활발하게 내야할 시기다. 춤계의 기대에 응답하는 수작들을 발표해야할 때란 의미다. 기획 방향에 맞춰주고 다른 작품을 도와주는 것이 소모적인 자기알림이라면, 가장 내실 있는 자기표현은 지경민이라는 이름에 붙어 다닐 수 있는 대표작들을 통해서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이와 같이, 제임스 전과 조윤라처럼 중견 이상의 무용가들부터 지경민과 같은 신진무용가들까지 가을 시즌의 시작을 알린 무용가들의 범위는 넓었다. 하지만 그들의 활약을 보고 웃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이미 자리를 잡은 올드보이와 갓 출발한 젊은 기대주 사이에서 허리를 이루면서 왕성하게 활동해야할 중간 레벨의 무용가들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돋우러져 보였기 때문이다. 중간 레벨 무용가들이 낀 세대라는 힘 빠진 수식어가 아닌 춤계를 탄탄하게 지탱하는 허리라는 본연의 수식어를 되찾아갈 때 비로소 우리 춤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상이 전개될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를 위해 춤계 모든 구성원들의 공공적인 의식과 합일된 추진력이 필요하다.

* 이은주의 『달을 안고 서는 여자』(9월17일 인천종합예술회관 대공연장)
서울 중심적으로 조성된 춤계는 한 시간 남짓한 드라이브로 갈 수 있는 인천의 춤조차 멀게 느껴지게 하고 있다. 문화·예술의 특정지역 편향이 중장기적인 안목에서 그 분야의 다양하고 균형있는 발전에 저해 요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꼭 전략적인 접근이 아니더라도 가까이에서부터 지역 춤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려는 노력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올해 인천 춤계는 여러 행사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인천이라는 도시 자체에서 17회 「아시안게임」과 23회 「전국무용제」를 연달아 개최함으로써 문화·예술 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인천 춤계를 이끄는 터줏대감들 중에서 이은주를 빼놓을 수는 없다. 인천대학교에 적(籍)을 두고 인천 춤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온 공적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9월17일 인천종합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펼쳐진 이은주 무용단의 『달을 안고 서는 여자』는 3회 「전국무용제」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였다. 공연은 1부 ‘전통의 향기’와 2부 『달을 안고 사는 여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전통의 향기’에서는 『시화무』, 『한량무』, 『살풀이춤』가 펼쳐졌으며 2부에서는 『달을 안고 사는 여자』가 리바이벌되었다.
『시화무(時和舞)』에서 일곱 명의 여성무용수는 궁중무 특유의 양식적인 대열을 유지하면서도 빠른 디딤새로 경쾌한 흥을 돋운다. 이때 그녀들이 들고 치는 박은 궁중악의 처음과 끝을 알리는 도구로 알려져 있다. 『한량무(閑良舞)』에는 남성무용수들의 호방한 춤사위가 두드러졌는데 그 중에서도 한동엽의 역동적인 도약과 정교한 디딤새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은주가 직접 춘 『살풀이춤』은 올해 3월 한영숙류 ‘살풀이춤’이 서울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음을 기념하는 공연이다. 그 보유자이기도 한 이은주는 진중한 춤사위로 춤에 대한 열망의 끈을 놓지 않았음을 드러냈다.
메인공연이라고 할 수 있는 『달을 안고 서는 여자』는 사회와 관습에 의해 억압되고 종속된 우리네 여성들의 갈증과 해방을 그리고 있다. 약 40분에 걸쳐 21명의 무용수들이 ‘관습, 현실 속의 나, 현실 밖의 나 그리고 너, 해방, 나’라는 다섯 개의 장을 실현해간다. 하나의 군단을 이루는 무용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합일된 주제 표현을 이루어냈다는 점은 확인되는 바다. 20년 전 초연작이므로 최근의 창작 스타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요즘에는 보기 드문 대의적인 주제에 대한 진중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지역 춤계에 한 획을 긋고 역사적 가치를 획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은주와 같은 무용가는 인천 춤계의 과거와 현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더 나아가 인천 춤계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여기에 차세대 무용가가 힘을 보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젊은 무용가들을 키워낼 수 있는 역량과 권위를 가진 이는 인천 춤계를 일구어온 터줏대감들이다. 이은주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