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영의 꽃香詩향

꽃무릇이라는 꽃을 아시는지요?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인데요. 본래 이름은 돌 틈에서 나오는 마늘종 모양을 닮았다 하여 ‘석산화(石蒜花)’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꽃무릇 하면 떠오르는 건 상사화(相思花)입니다.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운명,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할 뿐 결코 만날 수 없는 비련한 운명을 가진 꽃. 그래서 상사화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인데요. 실은 상사화하고는 엄연히 다른 꽃입니다.

꽃무릇은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돋아나는 반면, 상사화는 잎이 지고 난 후에 꽃이 핍니다. 꽃 색깔도 다르지요. 꽃무릇은 짙은 선홍빛인데 비해 상사화는 연보랏빛 아니면 노란빛을 띠지요. 개화시기도 다릅니다. 상사화는 7월말쯤 피지만 꽃무릇은 9월 중순에서 10월 초순에 핍니다.

꽃무릇이면 어떻고 상사화면 어떻습니까. 꽃이 져야 잎이 돋고, 잎이 다 진 후에야 꽃이 피니, 한 뿌리의 인연을 맺었으나 꽃과 잎은 평생 서로를 만날 수 없으니, 꽃무릇이든 상사화든 살아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니,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꽃인 것을요.

그나저나 꽃무릇이 가진 애잔한 사연을 생각하면 꽃무릇을 소재로 많은 시인들이 시를 썼을 법도 한데, 이상한 일이지요? 꽃무릇에 대한 시가 별로 아니 거의 없으니 그것도 뜻밖입니다. 어쩌면 제가 미처 모르고 있는 것일지도…. 아무튼 제가 아는 시는 딱 두 편입니다.
문인수 시인의 「상사화」라는 작품과 김소연 시인의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라는 작품입니다.

가보지 않은
날짜가 아직
남아 있구나.

달 돋듯, 아 막니 내밀듯
상사화의 싹이 또 어둔 땅에서 도진다.

온몸이, 영혼이 다 송두리째 모가지다.
...........................
이 말을
잘랐었다.
- 문인수, 「상사화」 전문

문인수 시인의 「상사화」가 꽃무릇인지 아니면 상사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줄 알면서도,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랑인 줄 알면서도,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당신인 줄 알면서도, “달 돋듯, 아 막니 내밀듯/ 상사화의 싹이 또 어둔 땅에서 도진다”고 합니다. 그 모습 보면서, 그 싹을 보면서 시인은 “온몸이, 영혼이 다 송두리째 모가지다”라고 합니다.

생각하면 사랑만큼 지독하고 사랑만큼 미련하고 사랑만큼 저돌적인 게 또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닿을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집니다.

꽃이 지고 잎이 난다
꽃이 져서 잎이 난다

꽃이 져야
잎이 난다

할망구처럼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본다
목덜미에 감기는 바람을 따라온 게 무언지는
알아도 모른다고 적는다

바다 위로 내리는 함박눈처럼
소복소복도 없고 차곡차곡도 없었다고
지금은 그렇게 적어둔다

꽃 지면 나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걸지라도
꽃 피면 나오겠다는 약속을 어긴 거라고
오히려 적어둔다

잘했다고
배롱나무가 박수를 짝짝 친다

저녁밥 먹으러 나는 내려 간다
고깃집 불판 위 짐승의 빨간 살점을
양양 씹는다

- 김소연,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 - 선운사에 상사화를 보러 갔다」 전문

문인수의 상사화와는 다르게 김소연 시인의 상사화는 분명히 꽃무릇을 말하고 있지요. 선운사 도솔천 따라 군락을 이룬 꽃들은 상사화가 아니라 꽃무릇이기 때문입니다.

고창의 선운사를 가본 적 있는지요? 선운사는 동백으로 더 유명하지만 서정주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들이 선운사의 동백을 노래했지만 사실 선운사의 풍광은 꽃무릇이 피는 가을에 정점을 이루지 않나 싶습니다. 9월말 조금씩 가을이 깊어지면 동백만큼이나 붉은 꽃무릇들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납니다.

김소연 시인도 지금 그 꽃무릇 군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텐데요…. 쉿! “꽃이 지고 있으니 조용히 좀 해 주세요.” 발치에 쪼그리고 앉아, “할망구처럼 쪼그리고 앉아” 꽃무릇 바라보고 있는, 꽃무릇의 빛깔과 향기에 취한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나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운명, 꽃과 잎이 서로를 그리워할 뿐 결코 만날 수 없는 비련한 운명을 가진 꽃. 선운사의 꽃무릇에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는데요.
아주 오래전, 선운사 스님을 짝사랑한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한편으론 선운사의 젊은 스님이 절을 찾은 어린 처녀에게 반해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피를 토하고 죽었는데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이 지금의 꽃무릇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전설은 전설일 뿐, 절집에 꽃무릇이 군락을 이루는 실제 이유는 따로 있지요. 바로 꽃무릇 뿌리에 있는 독성 때문인데요. 코끼리도 쓰러뜨릴 만큼 강한 독성분으로 인도에서는 코끼리 사냥용 독화살에 발랐다지만 국내에서는 사찰과 불화를 보존하기 위해 사용해왔다고 합니다.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독성이 강한 꽃무릇의 뿌리를 찧어 바르면 좀이 슬거나 벌레가 꾀지 않는다고 하지요. 실제로는 이런 필요에 의해 심은 것이 번져 군락을 이룬 것이지요.

아무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꽃무릇 군락지는 고창의 선운사와 영광의 불갑사 그리고 함평의 용천사를 꼽을 수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선운사 꽃무릇이 유명한 것은 도솔천 때문일 겁니다.
도솔천을 따라 핏빛 붉은 군락을 이룬 꽃무릇들…. 개울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면 물 속에서도 붉은 꽃무릇들이 군락을 이루지요. 도솔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그렇게 물 밖에서 물 속에서 붉은 꽃들이 지천을 감싸 피어나니 마침내 꽃멀미가 날 지경이지요.

여보 꽃구경 가요

잎 지면 잎 진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채로 오늘은 잎 없이 붉은 꽃 피고
꽃 지면 꽃 진 대로 서러우면 서러운 채로 내일은 꽃 없이 푸른 잎 돋네

백년해로 구억만리가 구비구비 고빗길이구나, 천야만야 벼랑길이구나
그립다 서럽다, 천근만근 녹슨 쇳덩일랑 어여 내려놓아라
고빗길 구비치거든 따로 또 같이 구비쳐 오르고, 벼랑길 휘돌거든 함께 또 홀로 휘돌아 가라
백년해로 가는 걸음, 엇박 걸음이 정박 걸음이다
피고 지고 오르고 내리고 구비치고 휘돌고, 따로같이 함께홀로 엇박자로 흘러라

도솔천 그늘 속이 花륵화르륵 화르르륵
붉디붉은 꽃미륵부처들로 야단법석이로세
선운사 오르다 간밤의 다툼일랑 까마득히 잊었어라
花르르 사르르 꽃으로 풀렸어라

여보 꽃구경 가자
- 박제영, 「꽃무릇」 전문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부부로 산다는 게 어쩌면 꽃무릇처럼 사는 거 아니겠나. 만날 수 없는 둘이 한 뿌리로 만나 엮여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함께/홀로 어울렁 더울렁 사는 거. 그렇게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는 거 아니겠나. 졸시 「꽃무릇」은 그렇게 선운사 꽃무릇이, 꽃미륵이, 꽃부처가 불러준 대로 옮겨 적은 것이지요.

가을이 가기 전에, 꽃무릇이 다 지기 전에 영광의 불갑사든, 함평의 용천사든, 고창의 선운사든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절집 가는 길 지천에 핀 꽃무릇 보시면 꽃미륵을 만났거니 합장 한 번 하시고 그 아련한 사연과 정취에 흠뻑 젖었다 오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