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50년대 원로가수 고복수가 불러 수십 년 동안 애창곡으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노래, 「짝사랑」이라는 노래의 첫 구절입니다. 어릴 때는 저 노래를 들으면서 으악새라는 새가 어떤 새일까 궁금했었는데, 언제였는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학교에서 배웠었나 싶기도 하고요, 아무튼 으악새라는 게 새가 아니라 억새라고 하더라고요.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를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요. 그래서 그렇구나 했더랬는데요. 그렇게 지금까지 삼십 여 년을 억새로 알고 있었더랬는데요. 요즘은 그게 왜가리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함경도에는 으악 으악 하는 그 울음소리 때문에 왜가리를 왁새라고 부른다는군요, 또 어떤 사람들은 소쩍새라고도 합니다. 가을 소쩍새를 으악새로 불렀다나요? 어떤 것이 정답인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만 으악새가 왜가리면 어떻고 소쩍새면 어떻고 또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이면 어떻겠습니까. 내 마음이 닿은 게 어디냐 그게 중요한 것이겠지요. 그저 노랫가락에 그저 마음을 맡기면 되는 일이겠지요. 에휴 말이 길어졌습니다. 그래요 오늘은 바로 억새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아, 갈대가 아니라 억새입니다. 억새는 갈대와 그 모습이 무척 비슷하지요. 둘 다 다년생 볏과 식물이라는 점에서 같기도 하고 또 워낙 생김새가 비슷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갈대와 억새를 같은 줄 압니다. 그런데 실은 비슷할 뿐 둘은 다른 식물입니다. 갈대는 강가나 바닷가 습지에서 자라는 식물이고, 억새는 산이나 들에 마르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가을바람이 불면 온몸으로 흔들리면서(이 점에서는 비슷한데 흔들리는 모양도 가만히 보면 많이 다릅니다) 갈대는 흑갈색의 꽃이 춤을 추고, 억새는 하얀 은빛의 꽃이 춤을 추지요.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갈대가 억새보다 더 억세고 단단합니다. 억새꽃이 오히려 야들야들 부드럽지요. 그러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은 틀렸습니다. 갈대가 남자라면 억새가 여자에 가깝지요. 그러니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은 틀렸고,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엔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 울지를 마라 아~아아아~~아 갈대의 순정” 박일남이 부른 「갈대의 순정」은 제대로다 싶기도 합니다. 억새와 갈대, 둘은 멀리서 얼핏 보면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다른 꽃이란 사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창녕의 화왕산에도 정선의 민둥산에도 포천의 명성산에도 억새가 한창일 텐데요… 궁예가 나라를 잃고 피울음을 토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명성산의 억새밭을 따라 걷다 보면, 은빛 억새 위로 붉은 노을이 번지는 모습을 보다 보면, 정말로 피눈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인데요…. 졸시, 「노을」은 그런 배경으로 쓰여진 작품인데요…. 이 가을 억새가 다 지기 전에, 명성산이 아니더라도 억새는 자라고 있을 터이니 아무 산이라도 올라 억새밭을 걸어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명성산이 노을에 잠기면
억새들은 명부를 흐르는 수천의 붉은 실핏줄들이다

저것을 지중해 너머에서 본 적이 있다

올레! 올레!
투우사의 붉은 천이 흔들리고 검은 소는 질주한다
네 개의 은검이 등에 꽂히고
마드리드의 석양 아래 검은 황소는 쓰러진다
일순 적막의 모래 위
산 자와 죽은 소, 마주 선 그림자 사이로 번지는 붉은 피
- 박제영, 「노을」 부분

노을에 붉게 물드는 억새를 보게 되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저는 왜 하필이면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보았던 그 검은 황소를 떠올린 것일까요? 이근배 시인의 「억새」라는 시도 노을에 번지는 억새를 바라보면서 쓴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근배 시인은 왜 억새에서 “죄”를 떠올린 것일까요? 물론 이 시에서 “죄다”는 표현은 중의법이 쓰인 것이지요. 시인은 아마도 “죄다”라는 말이 “죄를 지었다(罪)”라는 뜻과 “남김없이 모조리”라는 뜻, 둘 다 포함해서 읽히기를 바랐을 겁니다. 어느 뜻으로 읽느냐에 따라 시의 느낌이 사뭇 다르지요? 이야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네요. 아무튼 억새는 낮에 밝은 태양 아래 은어처럼 은빛으로 바람에 출렁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습니다만, 뭐니 뭐니 해도 석양 아래 붉게 물들 때 그 모습이 억새의 진짜 모습이지 싶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석양에 물드는 억새를 눈으로 마음으로 담아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죄다
아파하는 것 죄다
슬퍼하는 것 죄다
바람인 것 죄다
강물인 것 죄다
노을인 것 죄다
내가 버리지 못하는 것 죄다
죄다 죄다 죄다

너는 버리고 있구나

흰머리 물들일 줄도 모르고
빈 하늘만 이고 서 있구나

돌아가는 길
내다보고 있구나 - 이근배, 「억새」 전문

억새를 소재로 한 노래도 많고 시도 많지만 그 중에서 한 편을 꼽으라면 저는 김선우 시인의 「민둥산」을 꼽을 텐데요, 나로서는 흉내도 못낼 만큼 엄청나게 스케일이 큽니다. 민둥산이야 가을 억새로 워낙 유명해서 한 번은 가보셨을 줄 압니다만 이 시를 읽으신다면 다시 한 번 꼭 오르게 될 겁니다.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에 들어
윗도리를 벗어올렸다 참 바람 맑아서
민둥한 산 정상에 수직은 없고
구릉으로 구릉으로만 번져 있는 억새밭
육탈한 혼처럼 천지사방 나부껴오는 바람 속에
오래도록 알몸의 유목을 꿈꾸던 빗장뼈가 열렸다
환해진 젖꽃판 위로 구름족의 아이들 몇이 내려와
어리고 착한 입술을 내밀었고
인적 드문 초겨울 마른 억새밭
한기 속에 아랫도리마저 벗어던진 채
구름족의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
억새밭 공중정원을 걸었다 몇번의 생이
무심히 바람을 몰고 지나갔고 가벼워라 마른 억새꽃
반짝이는 살비늘이 첫눈처럼 몸속으로 떨어졌다
바람의 혀가 아찔한 허리 아래를 지나
깊은 계곡을 핥으며 억새풀 홀씨를 물어 올린다 몸속에서
바람과 관계할 수 있다니!
몸을 눕혀 저마다 다른 체위로 관계하는 겨울풀들
풀뿌리에 매달려 둥지를 튼 벌레집과 햇살과
그 모든 관계하는 것들의 알몸이 바람 속에서 환했다
더러 상처를 모신 바람도 불어왔으므로
햇살의 산통은 천 년 전처럼
그늘 쪽으로 다리를 벌린 채였다
세상이 처음 있을 적 신께서 관계하신
알 수 없는 무엇인가도 내 허벅지 위의 햇살처럼
알몸이었음을 알겠다 무성한 억새 줄기를 헤치며
민둥한 등뼈를 따라 알몸의 그대가 나부껴 온다
그대를 맞는 내 몸이 오늘 신전이다
- 김선우, 「민둥산」 전문

김선우 시인이 어느 초겨울, 민둥산에 올라서는 그만 옷을 홀딱 벗어버린 것인데요. 그런데 시인은 왜 민둥산까지 올라가서 옷을 홀딱 벗으려 했을까요? ‘세상에서 얻은 이름이라는 게 헛묘 한채인 줄/ 진즉에 알아챈 강원도 민둥산’이라 했으니, 그렇군요. 시인은 허명이라는 허울을 벗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아닌가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그럼 아름다운 여체를 함께 감상해보실까요?
윗도리를 벗은 시인의 젖꽃판 위로 어머나! 이를 어쩔까요? 바람을 타고 내려온 구름족 아이들의 “어리고 착한 입술”이 포개지고 있네요. 숨어서 지켜보는 내 심장은 하이고 그만, 두근!두근! 구경꾼의 인적을 눈치 채지 못한 시인은 (에구머니나!) 추운 것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아예 “아랫도리마저 벗어버린 채” (보세요!) “구름족 아이들을 양팔로 안고”는 하늘하늘 억새밭 구름정원 위에서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네요. 저 알몸의 춤사위를 보세요! 그동안 수많은 누드사진, 누드그림을 보았지만 이만큼 아름다운 알몸의 풍경을 일찌기 본 적이 없는데요. 여러분은 어떤가요?
가을이면 울긋불긋 오색으로 물드는 단풍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북녘에서 남도까지 단풍여행을 떠나기 마련입니다만, 은빛과 석양에 물드는 붉은 빛 오로지 두 가지 색만으로도 충분히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주는 게 바로 억새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구름 그리고 노을밖에 없는 황량한 들판 위로 산비탈 위로 은빛 물결, 붉은 파도를 펼쳐 보이는 억새는 어쩌면 가을이 보여주는 모든 풍경 중의 풍경, 가을 풍경의 진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시인은 그리 노래했지만,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 저의 아픔만큼 흔들리며 꽃피는 것이겠지만, 가을의 억새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도 듭니다.
억새만큼 흔들리는 꽃이 어디 있으랴, 저토록 아프게 저를 흔드는 꽃이 지상에 또 어디 있으랴.
가을엔 여행을 떠나, 억새 여행을 떠나, 여러분만의 시구(詩句) 하나 쯤 건져오시는 건 어떨런지요.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