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살롱

어릴 때는 어서 어른이 되고싶은 적도 있었고 좀 늦추고 싶은 적도 있었다. 어른이 되면 이 지겨운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희망과 함께, 다른 한 편으로 더 이상 어리다고 봐주지 않으리라는 두려움도 있었다. 아무튼 나의 희망이나 두려움 따윈 아랑곳 않은 채 세월은 흘렀고 나이에 관한한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다. 그런데 이런저런 도전을 하면서 한창 인생을 즐겨야할 나이에 서둘러 심각하게 삶의 의미를 고민해야 하는 가여운 소녀를 봤다.
「나우 이즈 굿」(올 파커 감독, 극영화, 영국, 2012년, 103분)은 흔히 백혈병으로 불리는 혈소암에 걸린 어느 소녀의 이야기다. 주인공 테사(다코타 페닝)는 혈소암이 심각해져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일들의 목록(wish list)을 작성해놓고 실천하려는 데 언제나 쉽지 않다. 여건이 불충분해서기도 하지만 대체로 용기가 부족해서다. 테사의 제 1 보호자는 그녀의 아버지(페디 콘시딘)로, 부담감을 못 견뎌 딸을 멀리하는 엄마와 다르게 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옆집의 잘생긴 총각 아담(제레미 어바인)이 갑자기 나타나면서 테사의 마지막 가는 길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얼마 전에 개봉해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안녕, 헤이즐」(2014)과 비슷한 설정이다.
하지만 「안녕, 헤이즐」의 연인들과 달리 아담과 테사의 사랑은 그리 굳건하지 못하다. 아담은 테사에게 끌리기는 하지만 그녀의 죽음을 감당해낼 자신이 영 생기질 않는다. 그 즈음에 테사에게 ‘나 없어도 열심히 살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말에 힘을 얻은 아담은 제 살 길을 준비한다. 테사는 심한 좌절감을 느낀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이 아픈 장면이었다. 아무도 나와 함께 하지 않는다는 느낌, 역시 나에겐 피를 나누어준 부모만한 동반자는 없는 것일까? 「나우 이즈 굿」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어느 소녀의 이야기로 간단히 넘기기에는 너무나 많은 메시지가 담겨있다. 영화는 삶에 대한 완벽한 긍정도, 죽음에 대한 완전한 부정도 거부한다. 테사는 기억되고 싶기도 하지만 잊히고 싶기도 하다. 왜 나는 이런 모진 운명을 도맡아 겪는 것일까? 아담의 태도에서 느낀 배신감은 결국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한 때 코피가 터지고, 피는 멈추지 않는 걸까? 테사는 죽는 순간까지도 쉬지 않고 흔들리는 갈등을 보여준다. 그 대목이 죽음을 다룬 여느 영화와 다른 점이었다. 숨을 거두고 심장이 멈추고 뇌파가 정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은 나의 존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리라!
유학 시절 독일에 찾아와 자기 돈까지 들여 같이 여행해 주었던 친구가 몇 년 전에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죽었다. 친구 자신이 의사였기에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연락이 여의치 않아 앰뷸런스가 심장마비가 온 지 한 시간 후에나 도착했다. 그 한 시간 동안 친구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친구와 함께 암스테르담에 갔었고 당시의 사진이 지금도 사진첩에 생생한 기억과 함께 꽂혀있다.
사진을 보며 물어본다. 한 시간 내내 끔찍한 공포가 찾아왔겠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그 동안 무슨 생각을 했니? 테사에게 던져진 질문과 맥을 같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