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미국으로 유학 온지도 어느 덧 5년째. 이제 적응할 법도 한데 아직 여러모로 새롭고 설렐 때가 많다. 키로프 발레학교를 졸업하고 홀로 발레단 생활을 한지도 벌써 3년째이다. 한국에서처럼 자유롭게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들을 갈 수는 없지만,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타지에서의 생활이 따분하고 지루하지만은 않다.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는 나의 하루 일상. 아침 일찍 일어나 스트레칭을 하고 모닝커피를 마시며 9시 클라스를 준비하기 위해 쌀쌀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하루가 시작되고 오후 3시경 발레단 리허설이 끝나고 집에 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잠시 쉬었다가 저녁 리허설을 간다. 그리고 저녁 9시경 모든 일정이 끝이 난다. 집에 녹초가 되어 돌아와 서둘러 씻고 가볍게 간식을 먹고 잠자리에 든다. 정말 어떻게 보면 발레만 하다가 끝나는 하루 일상이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똑같이 지나가지만 그 힘든 시간만큼은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밌게 그리고 알차게 보내는 나만의 하루 일상이다.
단 하루 쉬는 날인 일요일.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나오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힘든 몸을 이끌고 스트레스도 풀 겸 자주 친구들과 만나 집 근처 마트로 산책도 가고 얘기도 하며 웃고 떠들고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저녁시간이다. 그래도 유일한 쉬는 날인 일요일 저녁만큼은 그 동안 먹고 싶었던 것들을 먹는다. 가끔 요리를 하기도 하지만 되도록 나가서 외식을 하거나 음식을 포장해 집에 와서 먹는다.
보통 사람들은 발레리나들은 패스트푸드나 기름진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도 가끔씩은 칼로리가 높고 기름진 음식이라도 먹고 싶을 때가 많다. 솔직히 미국, 내가 사는 곳 근처에는 패스트푸드 음식점들이 대부분이다. 그 근처를 지나갈 때면 맛있는 냄새들이 나를 유혹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거의 한 달에 두 세 번은 패스트푸드를 먹는다. 체중조절 등 몸매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리허설과 연습을 통해 이미 체력은 떨어지고 기운도 없어진다. 그럴수록 우리는 스스로 몸을 위해 건강식품들을 찾게 된다. 하지만 가끔씩은 패스트푸드를 먹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3년 전, 워싱턴 키로프발레학교에 다니면서 주말에 친구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실버스프링(Silver Spring)이라는 곳으로 놀러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거기에는 프로즌 요거트(Frozen yogurt) 아이스크림도 팔고, 유기농 식품들이 파는 홀푸드(Whole Foods) 라는 마트도 있다. 학교 근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영화관들도 있고 맛있는 음식점들도 많이 있다. 친구들과 함께 사진도 찍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웃고 떠들며 주말을 보냈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기억에 떠오른다. 별거는 아니고 소소한 것들이지만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정말 몇 년이 흘러도 평생 잊혀 질 수 없는 추억들 인 것 같다.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친구들이 있는 발레단으로 와 보니 또 다른 경험과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들이 많은 것 같다. 물론 처음에는 많이 서먹하고 어색하지만 생각보다 편해지기 쉬운 외국인 친구들이 많다. 솔직히 한국인이 나밖에 없어서일까 말하기도 두렵고 선뜻 다가가기도 어려웠지만 항상 아빠가 말씀하신대로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가 보니 어느새 내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일본, 중국, 타이완, 영국,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등 여러 나라의 친구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리고 먼저 손 내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먼저 내게 다가와 주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가장 많이 느낀 점이다. 아무도 내 옆에 없다고 느껴질 때면 내가 먼저 한걸음 다가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기대면 된다는 것을.
미국뿐만 아니라 타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공감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바로 스트레스. 누구나 한 번쯤은 벽을 치며 미친 듯이 운적이 있을 것이다. 그 누구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만의 스트레스를 혼자 푸는 일이란 쉽지 않다. 더군다나 홀로 타지에 있다면 말이다. 가족에게 전화해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낼 수도 없고 불평불만을 얘기 할 수도 없다. 우리를 걱정 하시는 부모님 때문일까. 솔직히 어디가 아파도 쉽게 얘기도 못한다. 그러면 정말 내 옆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느끼지만 그럴 땐 나는 생각한다. 이런 힘든 고통들을 내 스스로 이겨내고 견뎌내지 못하면 스스로 컨트롤 하지 못하면 더 이상 이겨낼 수도 버텨낼 수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스스로 다짐한다. ‘그래 나는 강한 사람이다. 할 수 있다. 지금의 순간들만 잘 보낸다면 더 강해질 수 있다’ 라고.
나에게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발레로 받은 스트레스를 발레로 푸는 것이다. 막상 몸이 힘들어 지쳐있어도 아름다운 음악에 몸을 맡기고 그 역할에 충실하게 춤을 추다보면 어느 새 나의 얼굴엔 미소가 지어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이다.
나도 모르게 춤을 추다보면 나의 모습이 아닌 맡은 역할에 푹 빠져 춤을 출 때가 많다. 그리고 느낀다. 발레도 하나의 연기구나 라는 것을. 연기를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그것도 누군가의 앞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춤을 춘다는 것은 내가 아닌 역할에 몰입해 그 역할을 표현하는 것이지 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잊을 수 없는, 처음으로 겪은 갈비뼈 부상. 이달 10월 말에 『로미오와 줄리엣(Romeo and Juliet)』 공연이 있어 저녁까지 리허설 하는 도중 파트너가 내 왼쪽 갈비뼈를 잡는 순간 갑자기 어지러우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그렇지만 나는 리허설을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끝까지 계속 이어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데 정말 걷는 것도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순간 겁은 났지만 단순히 근육이 긴장돼 뭉쳐서 그렇겠지 하고 넘겼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정말 이렇게 말하지 못할 아픈 고통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픈 몸을 일으켜 일단 리허설 생각만하고 발레단 갈 준비를 했다. 막상 발레단에 가니 주저앉을 수도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곧바로 발레단 근처 병원으로 갔다. X-ray를 찍고 결과를 기다리는데 서러움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몇 주밖에 남지 않은 공연을 앞두고 부상이란 걱정 때문이었을까. 의사선생님께서 다행히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한국말로 타박상 이라고 조심하라고 하셨다. 나는 정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병원을 나왔다. 처음 경험해본 갈비뼈 타박상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2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아직 갈비뼈 통증 때문에 약을 먹으며 연습중이다. 이럴 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많이 아파도 막상 연락할 곳도 얘기 할 곳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내 스스로 깨우치고 견뎌야한다는 것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이번 기회는 더욱 강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정말 많이 외롭기도 했지만 말이다.

2014년 지금, 생각보다 단순한 나의 발레단 일상, 특별히 즐거운 것도 재밌는 것도 하지 못하는 똑같은 일상, 한번 쯤 상상했던 나의 발레단 생활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한국에서 발레단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단순한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긴다.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문에 많이 바쁘고 정신도 없는 하루지만 틈틈이 한국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도 보며 스트레스도 풀며 울고 웃는다.
정말 해보고 싶었던 작품 중의 하나가 『로미오와 줄리엣』 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줄리엣 역을 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 하지만 제일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제대로 해보지 못한 연애 경험이다. 직접 경험을 해보지 못해서 그런지 많이 어색하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최대한 그 역할에 몰입해야지 하고 생각도 해 보지만 이번 작품은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많은 발레 비디오도 보면서 그 역할에 대해 연구도 하고 느끼고 배워서 그런지 지금은 한결 편해진 느낌이다. 처음 보는 로미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은 서먹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아닌 줄리엣 역으로 그 친구에게 한걸음 다가가는 거라 생각하며 나의 마음을 표현해보려 노력중이다. 연애의 경험이란 직접 해보지 않으면 정말 많이 어색하고 서투르다. 그렇지만 언젠가 진짜 나만의 로미오가 나타나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역할에 몰입하는 중이다.
슬프지만 기쁜 경험들을 하는 요즘,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