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오랜만에 에세이로 돌아왔다.
하기사 논문 아닌, 논문 인 듯, 논문 같은 글을 게재해봤자 춤산책 100회 동안 단 여섯 번 뿐 이었으니 허풍이 없지 않지만, 올해만큼 감정을 드러내기란 경제위기 시절에 혼자 사치품을 구입하듯 조심스럽다고 느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올해는 다사다난했다.
2006년 8월부터 2014년 11월은 자다 깨어나 보니 이만큼 도달해 있는 것 같지만 뒤돌아보면 끔찍이도 오랜 세월이었다. 아기가 태어나 초등학교 1학년이 될 나이니까 말이다. 그간 각자가 원하는 길을 택해 대학원을 다녔던 내 친구들 역시 지금은 어엿한 예술가로 활동하거나 결혼해서 애가 벌써 둘인 이도 있다.
개인사를 뒤돌아보자면 그간 아버지께서는 30여 년을 해오던 업종을 정리하면서 미국에 가셔서 일 년간 머무르다 수술하고 귀국하시고도 6여 년이 지났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하고 졸업했으며, 사업을 시작했다. 10여 년째 살던 집을 리모델링한다고 거의 반년을 떠돌아다녔다. 40대를 맞았고 동시에 춤평론을 시작했다. 글을 쓰며 소위 직업병도 생겼다. 한 10년은 앞당겨 시력도 나빠졌고 무릎도 시큰거리며 제법 흰머리도 나기 시작한다. 독립을 했고. 그간 직원들도 서넛 바뀌었으며, 아버지 수술 차 마련했던 미국 집은 지난달에야 처분하게 됐다. 그리고 지난달 아버지의 팔순잔치를 치렀다. 이런저런 일들 속에서 춤산책이 함께 있었다.

10여 년 동안의 춤산책의 추억의 시작은 조동화 선생님과의 만남부터다.
2005년부터 「춤」지와 인연을 맺고 간간이 금연재에 들르면 내 안부부터 물으시던 선생님은 늘 뭐라도 쓸 것이 있는지 물으셨고 그때마다 나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일기도 쓰지 않는 내가 언감생심 지면에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예정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내게 선생님께서는 두세 번 좌담도 시켜보시고 춤 기행문도 허락하시며 계속 글쓰기를 독려하셨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면서 「이동우의 춤산책」을 시작하게 됐다. 뭐라도 글을 쓰기를 바라시던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니 아예 강제적으로 글을 쓸 만한 구실을 만드신 것이 확실하다. 그렇게 춤산책을 권유받은 다음 달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춤」지 편집장이었던 박민경 평론가와 토요일 오후에 LIG아트홀에서 공연을 본 후 길 건너 스타벅스에 앉아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 ‘춤산책’를 대안할 만한 제목이 있는지 자신소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등등 면담 아닌 면담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한 번이라도 결번하게 되면 그걸로 끝’이 조동화 선생님의 원칙이라며 으름장을 놓던 박편집장 너머 조 선생님이 보였다. 물론 결번 없이 쓰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글쓰기에 초짜인 나에게는 말도 떼기 전에 글부터 기대하는 주위의 부담감인 것이다. A4용지 세 장 분량을 쓰기란 아직도 힘들지만 초반에는 어떻게 글을 이어나갈지 고민하다 컴퓨터 앞에 엎드려 잠이 들 때도 많았다. 관련자료 찾다가 삼천포로 빠져 하루를 허비한 적도 있다.
「춤」지에 나의 첫 글이 개재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남세스러웠는지 몇 년간은 「춤」지를 제대로 펴보질 못했을 정도였고 글을 쓰는 것 보다 글을 확인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원고를 보낼 때는 몰랐다가 지면에서 오타를 발견했다든지, 어색한 문장을 발견할라치면 자책감은 물론이려니와, 선생님을 뵐 면목도 없었다. 오죽하면 조동화 선생님께 「춤」지를 못 보겠다고 하소연했을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소설가 정비석 선생 같은 분도 마감시간을 잘 못 지켜 원고 독촉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도망치려는 걸 “선생, 어딜 가십니까?”하며 붙잡히신 적이 있었다며 고민하는 나를 위로해 주시기도 하셨다.
선생님은 「춤」지에 들를 때마다 그달에 실린 나의 글에 대해 감상평을 해주셨다. 크게 웃으시며 재미있게 읽었다고 칭찬하신 적도 있었지만, “이번 글 주제가 어려웠지?”, “이제 여기에 대해선 그만 쓰지?” 하시며 내가 어떤 마음으로 글을 썼는지 까지 원고를 통해 꿰뚫고 계셨다. 「춤산책」을 초반부터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보냈더니 너무 일찍 자신을 밝히면 필자에 대한 신비감이 사라지니 나중에 소개하자고 해서 부랴부랴 다른 원고를 쓴 적도 있었다.
이렇듯 선생님께서 늘 내 글을 지켜보고 계시기에 긴장도 되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선생님의 표정을 그리면서 쓰기도 했다. 그렇다고 매 달마다 「춤」지 사무실을 방문해서 선생님의 조언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머릿속으론 늘 들러야지 하다가도 생업에 충실 하느라, 학교 다니느라, 게을러서 못 뵐 때가 더 많았다. 특히 아버지 병간호로 6개월여 미국에 머물렀을 때는 미국까지 「춤」지를 보내주시는 배려도 있었다. 그렇기에 졸작을 냈으면 냈지, 결코 빠뜨릴 수는 없었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춤산책 원고는 집이나 사무실에서 뿐만 아니라 비행기 안에서, 호텔이나 식당 같은 객지에서, 아버지의 입원실에서도 탄생했던 원고들도 더러 있었다.
미국에 머물던 집에서 틀어놓은 한국방송에서 나온 명절 트로트 경연대회에 대한 감상을 “명절날 트로트문화 유감”이라는 글을 썼고, 「춘향전」을 모티브로 미하일 포킨이 「사랑의 시련」을 안무했다는 기사를 보고 다음날 링컨센터 도서관에 자료를 찾으러 간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비공개로 열람이 불가했던 모나코발레단의 「사랑의 시련」 리허설 기록 필름에 대해 문의를 하려는데 마침 그 자리에 미주 MBC기자분이 똑같은 문의를 하던 일도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던 필름열람을 동양 남자 둘이 동시에 요청을 하니 사서가 신기해 하던 일이 생각난다. 당시에는 열람이 불가했지만 1주일 정도 만에 포킨 재단의 허락을 받아 공개영상이 되어서 그때의 감상문이 춤산책에 실렸고, 국립발레단의 「사랑의 시련」 초연 프로그램에도 실리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포킨의 「사랑의 시련」을 들여다보다”를 쓰며 발견한 조택원과 김선영의 「광한루 듀엣」 그리고 이토 데이코의 「기생춤」 필름 소개도 그때의 일이다.
생사를 넘나든 아버지의 장기이식 수술 후 계시던 요양원의 TV에서 포드 대통령의 별세와 후세인의 처형 소식을 듣고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글을 썼고, 내가 살던 뉴저지의 포트리 마을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소개한 “미국 역사와 영화의 요람, 포트 리(Fort Lee)를 아시나요?”와 “푸치니의 작업들 곳곳에 숨어있는 그의 사생활” 시리즈는 개인적으로도 공부가 된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전시회 참가로 갔던 라스베가스 호텔방에서 “삼국지의 인물들로 본 인간의 유형과 배울 점”을 썼다. 미국 스타벅스 커피 종이컵에 적혀있는 “The Way I See It(내가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글귀들을 소개하기위해 다 마신 컵들 중 괜찮은 글귀들을 모으며 “무료한 6월에 나만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라는 다소 억지스런 제목의 글을 써보기도 했다.
별 기대하지 않았지만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은 원고도 있다. 반성문과도 같은 “여름비에 생각나는 친구”는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생각나는 중학교적 내 짝에 대한 이야기로 최근까지도 이 글을 읽고 반응해준 이도 있었고, 소소한 느낌으로 쓴 “허접한 한국 춤을 양산해내는 교육제도” 역시 공감을 해주시는 분들이 꽤 계셨다. 조동화 선생님만 읽고 말 줄 알았던 춤산책을 수요모임의 원로분들 그 외 여러 분들까지도 읽고 계시다는 사실이 무척 송구스러우면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글을 쓰며 결번의 위기는 없었지만 평론가가 된 후 조동화 선생님께서 이제 춤산책은 그만 쓰라고 하셔서 예전에 없어졌을 뻔 한 적은 있었다.

춤산책 5월호 원고를 쓰던 4월에는 정말이지 10년 동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한꺼번에 닥친 것 같았다. 세월호 침몰은 물론이려니와, 여러 지인들의 부고 소식, 그리고 조동화 선생님의 타계까지… 내 주위에 늘 있을 것만 같던 사람들까지 올해 따라 많이들 떠났다. 거짓말 같은 일들이 발생하고 어이없이 지나가지만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는 무심함은 나의 머리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조동화 선생님을 석관에 봉인한 그날 저녁부터 청명했던 하늘에 비가 내렸다. 먹먹함에 집밖으로 나와 빗속을 걸으며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이번 달에 과연 글을 쓸 수 있을지 엄두가 안 났다. 게다가 선생님께서 마지막으로 보셨을 4월호는 원고 사고도 있었던 달이었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쉴 새 없는 기침 때문에 응급실에 갈 상황이었어도 글쓰기는 가능했지만, 가장 큰 독자를 잃은 상실감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그 핑계로 결번을 낸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대신 잠을 자기로 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나면 당연히 할 말도 많겠지만 그로인해 상실감이 생긴다면 감정으로도 실어증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무력감을 극복하고 감정을 드러내려니 많은 에너지 소비를 요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얼어붙은 새싹이 돋아날 시기에 나는 땅속으로 기어들어가 긴 여름잠을 시작했다.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로 알려진 프랑스 영화 「Les Uns Et Les Autres (1981)」가 개봉한 지 몇 년 안 돼 한국에서 TV로도 방영한 적이 있다. 한 장면이 기억나는 데 정확하지는 않을 수 있다. 한 남자가 무대에 등장한다. 전석 매진이라는 소문을 듣고 들뜬 마음으로 객석을 바라봤는데 텅텅 비어있었다. 조명 빛 속에서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두 평론가, 이 두 관객 외에는 아무도 없는 사실에 남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윽고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관객을 위해서라도 막은 올라가야한다는 마음으로 공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뜨거웠던 여름동안 늘어지게 잠자고 있다가 찬바람이 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