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 최상철 안무 『외침』(9월 30일~10월 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최상철 안무의 『외침』(영어명 ‘Cry’)은 흰색 블록들로 높게 쌓은 장벽이 있는 무대에서 펼쳐진다. 블록들은 이동이 가능하고 하얀색 배경은 스크린 역할을 하며 공간을 다양하게 변화시킨다. 직육면체 블록들에 투사된 영상들은 매우 입체적이다. 무대 뒤편에 일렬로 가로막고 있는 벽에 영상화면으로 ‘문’이 잠깐 그려졌다 사라진다. 관객들은 벽 쪽을 향한 채 문을 찾고 있는 무용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게 되는데, 순간 관객 역시 꽉 막힌 벽 앞에 서 있는 듯한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잠시 생성되었다 곧 사라져버린 문, 이제 탈출구는 없다.
이 같은 첫장면은 이 작품에 대한 주제적 이미지를 압축적으로 제시해준다. 공간을 상당히 압박하는 벽은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다. ‘외침’은 탈출구가 없는 현대인의 끔찍한 삶에서 들리는 소리다. 외부세계인 사회적 환경의 억압은 개인의 내면세계 또한 강하게 제약하는데, 내면의 저항은 울부짖음이나 절규 등으로 표출된다. 그것은 본래 사적인 경험에서 비롯되는 슬픔이나 아픔과 차원이 다른 절망이고 상처로 남은 기억과 관련이 있으며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요청을 담고 있기 때문에 더 괴롭고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외침』은 그처럼 악한 사회에서 무력한 개인의 외침을 시각화한다. 먼저 다양한 색채와 패턴의 영상에 의해 무대는 다변적이며 강력한 시각적 효과로 관객을 자극한다. 그 안에서 무용수들의 움직임은 비틀려 있다. 영혼이 없는 좀비처럼 사지가 흐느적거리기도 하고, 네 발로 다니는 짐승처럼 몸통이 숙여져 있거나 다리가 절단된 불구처럼 무릎으로만 걷고 회전하며 이동한다. 무릎을 꿇은, 이른바 ‘굴복한 자’들은 그로데스크한 분장의 악녀 같은 ‘악한 자’의 지배 속에서 신음한다.
이 작품은 부자유스러운 몸짓으로 암담한 심리적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불편부당함을 고발하고 자유를 향한 외침을 의식하게 만든다. 안무자는 명확하게 주제의식에 집중하고 작품의 전체 이미지들이 그 한 점으로 모아지게 구성했다. 하지만 울림이 기대만큼 강렬하지 못하다. 테크놀로지를 이용해 공간을 확장시키고 속도감을 증가시키는데, 이것은 한편으론 시공간적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 같다. 그 속에서 춤은 실제로 소리 질러 울부짖는 것보다 더 강력한 외침을 만들어내야 했지만, 영상에 의한 자극과 그에 따른 속도에 덮여 말 그대로 소리 없는 외침이 되어버린 듯하다.
요즘 융복합 공연들에서 시각적 효과는 점점 더 자극이 커지고 있다. 현대의 테크놀로지는 ‘새로운 예술’의 주역이다. 본래 예술은 테크닉(즉,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분야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그림이나 조각 그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하는 전통적인 예술은 모두 인간이 하는 행위이지만 테크놀로지(즉, 과학기술)가 바탕이 된 미디어아트는 기계가 구현하는 예술이다. 최근의 융복합 개념은 이렇게 전통적인 예술에 테크놀로지가 결합된 형식에서 나온 것인데, 테크놀로지가 소리나 움직임 그리고 평면적 회화뿐만 아니라 입체적 형태 역시 자유자재로 구현함으로써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문제는 테크놀로지가 주는 자극이다. 자극의 강도, 즉 세기가 전통적 예술과 비교할 수도 없어 무한히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자극이 다른 자극보다 더 강하다면 그 센 자극만이 남는다. 다른 것들은 모두 지각되지 못한다. 따라서 융복합에서 테크놀로지의 자극이 강력할수록 춤으로 표현되는 섬세하고 미묘한 감각들은 모두 덮여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미 일상에서 더 큰 자극들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몸과 움직임을 기반으로 하는 무대의 춤은 심심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은 일상보다 더 큰 강도의 자극으로 승부하기보다 그것과 다른 감각으로 저항한다. 어떤 점에서 보수적 혹은 전통적/복고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오늘날의 춤은 그 기본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그것은 곧 춤추는 몸인 무용수에 대한 집중으로 이어진다. 테크놀로지는 감각적인 자극일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감정이 더 강하게 표현되고 전달될 수 있는 힘은 춤에 있다.
『외침』이 비록 순수 춤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 영상과 긴밀한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최상철의 안무는 상징적 표현이 많고 무용수들의 정교한 표현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외침』을 지금 우리의 분노를 담은 작품이라고 볼 때 무용수들의 춤에서 더 강력한, 고통의 이유를 찾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