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글쓰기 전용 노트패드를 큰 맘 먹고 장만했다. 기존의 노트북은 대용량 이동식 하드디스크에 옮겨도 돌이키지 못 할 만큼 느려 터진 것도 모자라 무겁기까지 한 구식 휴대용 컴퓨터여서 몇 년 동안 씨름하다 ‘오로지 글쓰기 전용으로만!’ 이라는 전제를 못 박고 휴대성만 따져보고 구입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 돈을 들일 때는 신중해야 하지만, 컴퓨터를 새로 장만하기 전 사용용도를 꼭 못박아야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나의 ‘저장욕’ 때문이다.
방방곡곡 어느 곳이든 무선 인터넷이 가능한 IT강국에서 살다보니 현실적으로 ‘글쓰기 전용 컴퓨터를, 글쓰기 전용 컴퓨터로만(!)’ 사용하기란 불가능 했다. 정보검색을 위해서라도 인터넷을 사용해야 하는 구실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검색으로만 그치지 않고 필요한 이미지와 문서를 저장하고, 책갈피를 할 만한 홈페이지 주소를 즐겨찾기에 저장하다보면 용량은 금세 포화상태로 다다른다. 뿐만 아니다. 스마트폰까지 쓰다 보니 때로 컴퓨터를 통해 충전하면 휴대전화기로 찍었던 사진저장을 제안 받게 되며, 음악은 물론, 동영상 파일까지 담게 되는 것은 자연적 이치다. 막상 저장해야 할 원고는 몇 없다. 그렇게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사용하던 새 컴퓨터도 일 년이 못 가 컴퓨터 전원만 키면 ‘디스크 공간 부족’이라는 경고문구와 함께 급 노화한 중고품이 되어 버린다. 다 내 과욕 탓이다.

내가 처음 ‘춤산책’ 연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무선 인터넷이 용이하지도 못하고 정보도 그리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전을 뒤적이고 도서관에 가서 과거 신문기사들을 찾아보던 번거로움이 있었다. 공간과 시간을 절약 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 소유에 대한 가치관도 바꾸어놓았다. 도서관의 열람 정책 때문에 자료수집이 불가능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는 어느 도서관이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수준이 매겨지는, 자료의 분량이 곧 권력이 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희귀자료들도 간단히 열람, 복사, 저장이 가능하게 되어서 미술작품정도는 몰라도 원본이 별 가치가 없게 되었다. 지금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유수 미술관이나 도서관의 자료들을 모니터를 통해서 탐방할 수 있을 정도로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만큼 볼거리와 알거리가 넘쳐나는 정보의 시대에서 살고 있다. 나 혼자만 들여다보고 만족하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뜻이다. 도리어 서로 공유를 통해 사람을 모으고 인지도를 키워나가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이렇듯 손바닥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와중에도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하나의 습관(?)이 생겨버린 것을 발견한다. 비견한 예로 영화 「친구」가 2001년 개봉했을 때만 해도 화제가 된 복고열풍은 한때의 현상으로 여겼었지만 정확히 10년이 지난 2011년에 개봉한 영화 「써니」 역시 화제가 되었고 동명의 주제곡을 부른 추억의 독일그룹 ‘보니 엠(Boney M)’의 내한공연이 영화특수로 이루어졌는데 그사이에도 잊을 만하면 복고적 영화들이 꾸준히 개봉하곤 했다. 2014년에도 연말에 개봉된 「국제시장」이나 올 초에 개봉한 「세시봉」도 식지 않는 복고열풍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장면에서 나오는 추억의 소품들은 나의 70, 80년대 사진 속에도 들어있을 만한 것들이다. 하루가 다르게 최첨단 기술이 탄생되는 이 시점에도 심심치 않게 이러한 추억의 이야기들을 보고나면 뭣하나 버리기가 더 어려워진다. 추억을 상기시키는 영화 속 아날로그 제품들은 오늘날의 디지털 제품에 비하면 훨씬 정겹다고 기억 한다. 제품 뒤에 담겨진 사연들 때문이다. 또한 그 당시에는 어느 정도 편리를 충족시키기는 문명의 이기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본다면 이것들도 얼마나 번거롭고 공간을 차지하는 물건이었는지. TV 채널을 돌리고 싶으면 TV 앞으로 오거나 딸깍거리는 리모컨을 손가락 아프게 움직여야했고, LP 레코드판을 앞뒤로 뒤집었어야 했던 번거로움을 상기시킬 필요도 있다.
영화를 통해 비춰진 과거의 삶은 역사적 기록속의 것과 차원이 다르다. 왜냐면 다큐멘터리를 포함해서 영상이라는 매체는 한 순간도 관객의 마음을 밖으로 벗어나게 만들지 않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공분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을망정, 관객의 기대를 무시하는 연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은 극대화시키고, 추한 것도 그럴듯하게, 악한 것마저 멋지게 미화시킬 수 있다. 좀 지난 공익 광고 중에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을 추억으로 여기는 이유는 어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이라는 멘트가 있었다. 추억이란 모든 것이 용서되고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하나의 착각이라 생각되는데 우리가 가끔씩 복고의 향수에 젖고, 또 대중매체가 이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이유는 현실이 너무 힘들고 사람들이 영악해졌기 때문이다. 복고에 대한 열광을 이러한 선상으로 본다면 현실도피의 하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빠지는 듯 해보이지만, 버리지 못하는 것은 물건뿐만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의 부조리하거나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순간까지도 ‘그때가 좋았었지’라며 도매금으로 과거 전체를 미화시켜버리는 것처럼, 자기 손에 들어온 모든 것에 필요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여 미화시키며 애니미즘(animism)과 같은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신을 철저히 가두게 된다.
하지만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나 혼자 사는 공간이 아닌 이상은 내 만족으로만 살 순 없다. 다른 이들과 맞추며 살기 위해서는 과감히 버릴 건 버리고 고쳐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서적 류나 영상은 오래 묵혔다가 꺼내보면 감회가 새로울 때가 많다. 나 같은 경우, 글감을 위해서라도 저장욕이 생겨버렸다. 매달 집으로 배달 오는 무료 잡지나 사보도 한때는 열어보지도 않고 버렸지만 그 안에서도 유익한 내용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꼼꼼히 훑어보고 버릴지 안 버릴지를 결정하게 돼버렸다. 그런데 유익한 기사는 꼭 한두 페이지라도 있기 때문에 번거롭게 스크랩하기 보다는 통으로 보관할 때가 더 많다. 그러다보니 책들이 집안에 너저분하게 쌓이게 됐는데 몇 년 전 오래된 집을 리모델링한다고 해서 이삿짐을 정리했을 때 하나도 버리지 않았던 것만 봐도 나의 저장욕을 설명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다행인지는 몰라도, 이러한 문제는 비단 나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최근에 다음과 같은 신조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저장장애”
글자로만 유추한다면 ‘저장을 못하는 뜻’으로 간주하기 쉽다. 그런데 반대로 ‘버리지 못하는 병’이라는 뜻을 가지며, 주변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죽은 시신을 묻지 못하는 수준까지 경중이 다양한 현대병임은 부인할 수 없다. 나의 경우, 글을 쓰면서, 글감을 모으기 위한 여러 가지 형태의 자료를 모으면서 컴퓨터 안의 자료들을 차츰 버리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든 자료가 필요할 때 쉽게 찾을 수 있고, 자료의 유실을 방지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증거자료로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증세(?)는 물증은 있으나 심증은 확실하지 않은 경우다. 나의 모으기 증상은 무난한 것인지, 또 장애가 맞는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 자가진단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저장장애자는 평균적으로 국내인구 중 2~5%이며, 남성이 더 많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젊은 성인보다 노인에게 3배 정도 많게 나타난다고 하니 현재까진 나에게 불리하게 다가오고 있다. 소유물에 대한 애착과 과도한 책임감, 소유물 통제에 대한 열망 등은 물론, 사물을 버리거나 소유하지 못할 때의 불안감, 죄책감은 물론 애도감 마저(!) 수반된다고 한다. 장애증상은 11~15세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번 증상이 시작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어 종종 만성이 되기 때문에 나이가 들수록 나빠진다고 한다. 무엇보다 저장장애 환자를 치료할 약물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어쨌든 위의 증상들로 유추해 보면 나는 버리지 못하되 장애 수준은 아니며 대신, 정리가 서투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장장애자의 큰 특징은 사물을 남에게 빼앗아 오는 한이 있더라도 공간을 채우는데 의의를 둘 뿐이다. 진정한 저장장애자란 남의 것을 빌려와도 돌려줄 줄 모르며, 자기의 것을 공유 할 줄도 모르고, 나도 쓰지 않을 거면서 남도 못 쓰게 하는 이기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누가 버리기라도 하면 자살까지 불사하는 극단적인 성격까지 생기기도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은 작은 부분에서부터 출발하는 법. 앞으로 살날이 많은 나이기에 자잘한 것까지도 연민을 두고 정리하지 못하는 것을 반성하며 저장장애로 번지기 전에 일단 정리하는 능력을 좀 더 키워야겠다.

기록의 중요성, 보관의 중요성을 무시할 순 없다. 남들은 하찮게 여기더라도 언제든 뒤적거리며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큼 귀중한 가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과유불급이라고, 보는 것 마다 추억이 있고 버리지 못한다면 집착이 된다. 대부분 우리는 ‘정리정돈’의 뜻을 기존의 물건들을 적재적소에 단정히 두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정리는 ‘문제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을 줄이거나 없애서 말끔하게 바로잡음’이고 정돈은 ‘어지럽게 흩어진 것을 규모 있게 고쳐 놓거나 가지런히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두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한다. 오늘날과 같이 경쟁이 치열하고 물질이 정신을 앞지르려는 세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잊지 말고 무엇을 보존해야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하다.

현대는 정보가 너무 흔해져서 쉽게 잊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