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살롱

연극의 길고긴 역사를 되돌아 보면 지구의 어느 곳에서나 연극신(演劇神)이 존재했다. 수많은 연극인들은 고달프고 비천하기 짝이 없는 연극을 하면서 만일 연극신이 있어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한 몸이 되고 그들의 고통을 대신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한시도 떨치지 못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바로 연극신이었다. 서양연극의 발생에서 볼 수 있는 이집트의 오시리스나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는 권력의 신이기 전에 대속(代贖)의 신이었다. 일찍이 인본주의와 합리주의가 정착하면서 서양연극에서는 셰익스피어처럼 예술적으로 유능한 연극인을 숭상하기도 했지만 몰리에르처럼 사회적 천시와 차별의 환경에서 연극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연극인을 하나의 신처럼 숭상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신 중심의 동양연극은 종교를 떠나 존재할 수가 없었다. 동양연극에서 신화와 전설은 그대로 예술의 내용이고 현실이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영원불멸하는 것이었다. 묘당(廟堂), 신당, 마을광장은 신들이 거주하는 곳이며 거기서 행해지는 춤, 노래와 흉내내기는 모두 신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환경에서 동양의 연극인들이 연극신을 모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양에서 연극신의 존재는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니다. 인도에서 시바와 크리슈나는 종교신이자 연극신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특이하게 그림자연극의 어릿광대 역할에 속하는 세마르가 연극신으로 숭앙되고 있다. 동양의 어떤 지역보다 연극신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곳은 중국이다. 경극에서는 오래 전부터 당나라의 현종이 연극신으로 숭배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이 예술가적인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 궁중에 일종의 배우학교라고 할 수 있는 이원(梨園)을 설치하고 수백 명의 연극인을 양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경극의 배우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이원제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동양의 연극인들이 연극신을 모시는 것은 무조건적인 은혜를 입고자 하는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연극신에게서 연극인으로서의 모범적 자세를 배우는 중에 자신의 예술적 향상을 도모하고 극단의 규칙과 질서를 지키게 하고 한편으로 종교적 신앙을 지니게 함으로써 험난한 환경을 이겨나갈 지혜와 심리적 안정을 부여할 수 있었다.
한국연극에서 연극신의 관념이 사라진지는 오래 전이다. 자료를 보면 고대의 연극인들이 민속신에게서 연극의 무사한 연행을 기원했다는 예는 얼마든지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남사당의 바우덕이처럼 연극을 위해 헌신한 모범적인 연극인을 숭앙하는 제의를 행하기도 하였다.
연극행위가 폭발적으로 빈번해지면서 연극신의 존재는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지만 연극신으로 추앙할만한 연극인은 한 사람도 없다. 일제 치하 친일분자, 해방 이후 정치와 연극을 왕래하는 연극인, 최근에는 상업주의의 신을 자처하는 연극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연극신의 존재가 필요하다. 선지자 요한처럼 광야를 방황하면서 우리들에게 연극신의 존재가 없다면 연극의 미래도 없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