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설이 있는 달이어서일까. 유난히 나이 먹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마침 손에 잡힌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중편소설집 「55세부터 헬로라이프」가 픽션이면서도 논픽션같은 긴박감을 주어 더 실감나게 ‘반퇴(半退) 세대’라는 신조어를 곰곰 들여다보았다. 무라카미의 소설은 “체력도 약해지고, 경제적으로도 만전을 기하지 못하고, 이따금씩 노쇠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답이 펼쳐진다. “정년이라는 게 미리 경험할 수 없는 거잖아. 인생의 반을 훌쩍 넘긴 시점에 다들 처음으로 정년이라는 것을 맞이하는 셈이지. 이런 무기력한 시절은 일찍이 없었다고. 옛날에는 분명 가난했고 돈이나 물건도 없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발전했지 쇠퇴해가지는 않았으니까.”(「캠핑카」 중에서) 올해 예순 셋이 된 무라카미 류가 이 다섯 편 중편소설을 쓰면서 가장 깊이 의식하며 쓴 말과 개념이 ‘신뢰’라고 했다. 받아 든 목숨, 길어진 목숨, 버릴 수 없는 목숨 앞에서 겸허하게 거듭나기를 해야 할 나이가 된 인간에게 마지막에 기댈 곳은 신뢰밖에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한때 인사동은 미술애호가와 기자에게 이런 신뢰의 장이었다. 미술에 관한 그 어떤 의문도 이곳에 가서 물으면 믿을만한 증빙과 소신의 답이 나왔다. 화가도 화상(畵商)도 미술사가도 미술평론가도 제 이름을 걸고 믿음을 주는 말과 행동을 보여줬다. 지금 인사동에 나가면 씁쓸하다. 불과 10여 년 만에 중국 관광객을 위한 값싼 공예품과 화장품을 파는 상점들의 거리가 됐다. 물론 새로운 미술의 거리가 인근 사간동과 소격동, 조금 멀리 북촌과 서촌 지역으로, 또는 멀리 강남에 조성됐지만 옛날 인사동의 무게와 역사를 되찾기는 어렵다.
이 와중에도 인사동에는 신뢰라는 단어에 걸맞은 화랑이 몇 군데 남아있어 아쉬움을 달래준다. 그 중 하나가 나무화랑(대표 김진하)이다. 계단으로 오르는 건물 4층에 자리한 나무화랑은 그 이름 그대로 나무처럼 수십 년 인사동에 미술의 쉼터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근래 나무화랑에서 전시를 끝낸 정복수(58) 화가는 「뼈 속 풍경」이란 화집에 피를 토하듯 화가된 자의 소임을 적어 넣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화가가 아니고 그림과 싸우는 사람이 화가입니다. 그림으로 통곡하는 사람이 화가입니다. 그림은 나를 몸부림치게 합니다. 더러운 화가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더럽게 기억될 것이라면 연기로 사라지겠습니다.”
최근 「분홍」이란 도발적 전시회를 연 최민화(61) 화가는 “우리는 흰색과 붉은 색만을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나는 분홍의 그 방대한 범주를 제시하고자 한다”는 선언문 같은 글을 내놨다. 1980년 이후 일종의 부랑공간을 이룬 대한민국의 속 모습을 그는 분홍이란 주관적 색채학으로 풀어놓는다. 분홍에 다다르게 된 그의 마음의 행로는 이런 결구로 끝난다. “끝없이 깊은 절망의 가장 밑바닥을 칠 때, 비로소 노래할 수 있다. 젊음을, 청춘의 뒤안길을, 아련한 꿈의 황금빛 번쩍거림을!”
인사동에 대한 헌사이기도 한 이 구절 속에 반짝거리는 나무화랑에게 신뢰의 한마디를 보내고 싶다. “나무화랑이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