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미국의 대표적인 인류학자 크로버(A. L. Kroeber)와 클럭혼(Clyde Kluckhohn)의 조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발표된 문화의 정의는 적어도 164개이다. 이는 문화가 하도 광범위하여 쉬 정의할 수 없음과 함께 아주 보편적임을 뜻한다. 아무리 그래도 문화가 인간의 지혜와 경험으로써 자연의 상태와 질서를 바꾸어낸 물질적·정신적·제도적인 그 ‘무엇’이라는 포괄적인 정의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복잡다단한 게 문화지만, 인간에 의해 만들어져 인간 누구에게나 누려지는 만큼 우리에게 문화는 가장 가까운 낱말이다.
지지난 참여정부는 문화행정의 주요 개혁 방안 중 하나로 “문화행정직렬제”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정부 출범 초기 의욕적으로 검토되었지만, 일부 부처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중장기과제로 바뀌면서 슬그머니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물론 이후에도 일각에서 간간이 거론해 왔고, 또 지난해 지방선거 직후 시·도문화재단대표자회의와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가 공동으로 연 세미나(2015.6.14.)의 종합토론 자리에서도 향후 적극 추진해야 할 문화정책의 한 과제로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친근한 문화를 행정으로 담아가는 데 “직렬제”라는 특별하고도 선택적인 인사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문화행정에는 확실히 일반과는 다른 전문성과 지속성이 요구되고, 이를 위한 최선의 길이 직렬제이기 때문이다. 문화행정직렬제가 논의되던 당시 지방도시 공무원 544명을 설문 대상으로 한 필자의 연구 “기초자치단체 문화행정 실태분석 및 개선방안”(「문화예술」 2005년 8월호) 중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문화행정직 공무원에게 가장 필요한 조건으로 응답자들의 64.2%가 ‘문화예술의 전문성’을 들었으며, 문화행정사무와 일반행정사무의 전문성에 대하여는 반가량(51.1%)은 ‘둘 다 각기 요구된다’고 하면서도 일반행정사무(6.4%)에 비해 문화행정사무(38.6%)의 전문성을 여섯 배 이상으로 인정하였다. 공무원 인사제도 안에 문화행정직렬제를 도입하는 방안에 대하여는 51.5%가 찬성, 14.3%가 반대하였다. 찬성자들의 77.5%가 ‘문화행정직렬제가 전문적·창의적 문화행정을 수행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라고 답한 한편, 반대자들의 46.2%가 ‘문화행정직렬제가 또 다른 인사적체 요인이 될 것이기 때문에’, 33.3%가 ‘현행 순환보직제하에서도 문화행정분야 공무원에 대한 전문교육을 제도화하는 등 문화행정분야를 전문화할 수 있기 때문에’라고 답하였다.
문화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면서 때로는 우리의 삶 자체를 뜻하기도 하지만 문화의 열매는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 회임 기간이 매우 길다. 이러한 문화의 열매를, 가시적인 성과와 단기적인 평가를 중시하는 일반행정의 수레로 실어 나르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마땅히 문화행정은 전문성과 함께 지속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문화행정직렬제는 10여 년 전 추진되다 흐지부지되었지만 최근 필요성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는 문화행정이 전문적이고도 지속적인 경험과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말 그대로 ‘문화적인’ 철학과 시스템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프랑스를 문화대국이라고 일컫는 데는 아마 10년 동안씩 문화부장관을 한 앙드레 말로와 자크 랑의 역할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말로 장관(1959~1969년)은 민주화, 확산, 창작의 세 정책이념을 「근대화 5개년 계획」에 반영한 후 스스로 집행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정책인 「문화의 집(Maison de la Culture)」 사업에 역점을 두어 결국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은 자신이 구상한 정책을 스스로 실천하고 확인해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랑 장관(1981~1986년, 1988~1993년)이 시대에 부응하여 문화정책의 영역을 크게 확대하고 분권화 조치를 단행한 후 1993년 문화예산을 정부 총예산의 1% 이상이 되도록 한 것도 10년 장관직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장관이야 그렇다 치자.
순환보직제 아래 문화행정을 담당하는 우리 공무원들은 대개 수개월 이상의 업무 파악 과정을 거친 후 문화예술과 그 현장을 다 아는 진짜 전문가가 되든지, 적어도 전문가연해야만 한다. (나랏일을 하려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1~2년 문화예술인들과 문화예술현장을 다룬 뒤에는 다른 부서로 옮긴다. 후임자들도 대체로 마찬가지다. ‘그 자리’나 ‘그 사람’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니, 행여 오해는 마시라. 바로 이러한 공무원 순환보직제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에 문화재단이 존재한다. 단, 문화예술의 본래적 속성에서 연유하는 자율성과 유연성이라는 굵은 방점이 찍힌 필수덕목들이 더해진 채 말이다.
정책대상으로서의 문화는 문화예술, 더 좁게는 예술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문화행정은 확장된 예술행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닷가에서 물놀이나 낚시를 때때로 즐긴다고 뱃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이따금 공연장이나 전시장을 찾는다고 문화행정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다를 알아야 뱃사람이 될 수 있고 문화예술을 알아야 문화행정가가 될 수 있다. 문화는 보편적이지만 문화행정은 전문적이다. 누구나 누리는 문화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게 문화행정이다. 문화행정기관의 수장들이 정치적 흥정의 희생물이 되어서는 결코 문화국가로 나아갈 수 없다. 문화행정과 그 직(職)이 제도적으로 존중받는 문화행정직렬제 또한, 다시 논의해 봄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