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2011년 겨울, 3주 정도 여행하려고 떠났던 뉴욕에서 나는 뜻밖에 많은 기회들을 만나 6개월간 다양한 페스티벌에 참가하며 공연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에서 보고 느꼈던 새로움과 긴장감은 늘 꿈을 꾸는 듯한 설렘과 활력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사실 한국에서 발레단 퇴사 후 조금은 정체되어있었던 나의 무용인생에 자유와 기회의 도시 뉴욕이 날 춤추게 했다.
뉴욕 무대에서서 공연하고, 안무자들과 댄서들을 만나고, 또 많은 공연들을 보면서 무용을 해서 행복하다는 생각을 참으로 오랜만에 했던 순간인 것 같다.

처음으로 공연하게 된 곳은 매년 12월 마다 열리는 「뉴욕 웨스트 페스트 댄스페스티벌(WEST FEST DANCE FESTIVAL NYC)」이었다. 약 20개의 수많은 무용단과 프로젝트 팀들의 작품이 4일간 베신가(Bethune Street)에 위치한 머스커닝햄극장(Merce Cunningham Theater)에 올랐고 나는 지인의 소개로 『플로우(Flow)』라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현재는 폐쇄된 머스커닝햄극장에 내가 설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의미가 깊었다. 당시 뉴욕 무용예술의 흐름은 이미 춤의 장르가 무너지고 발레와 릴리컬 재즈를 바탕으로 한 컨템포러리 작품들이 많았기에 컨템포러리 발레 스타일을 고민해오던 나에게는 다른 팀들의 리허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자극이 되었다.
미국 관객들은 대부분 공연 후에 로비에서 출연자들을 기다렸다가 한마디씩 건네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인 듯했다. 알지도 못하는 노란머리 백인과 흑인들이 나에게 감탄사를 건네주니 참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무사히 첫 공연이 끝나고 몇 주 뒤 뉴욕에서 열리는 가장 큰 안무가전 「APAP 2012」 무대에 오르는 기회를 얻었다.

5일간 바러크대학(Baruch College) 안에 있는 바러크퍼포밍아트센터(Baruch Performing Arts Center)에서 당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안무자들 위주의 실험적이고 트랜디한 작품들이 올랐다. 미국 댄스오디션 TV쇼 「유캔댄스(So You Think You Can Dance)」에 출연해 이슈가 되었던 빌리 벨(Billy Bell)과 같은 날 공연하게 되었는데 역시나 그와 그의 작품을 보러온 관객이 정말 많았다. 그에게 열광하는 팬들을 보면서 미국 춤계는 방송으로 인지도를 쌓은 스타댄서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나 역시 그의 팬이었기에 TV쇼 봤던 얘기를 건네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수십 번 돌려봤던 동영상 속의 댄서가 내 앞에서 춤을 추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유캔댄스」 같은 TV쇼를 동경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공연이 끝나자 로비는 음료와 다과들이 가득했고 출연자들과 관객이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는 축제의 분위기였다. 출연자와 안무자들끼리도 영어자체의 억양이나 제스처 때문인지 서로의 작품에 대한 칭찬과 격려들이 오고가며 서로 잘 모르는 사이인데도 작품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 나누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았다. 인색한 호평들 사이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는 더 겸손해져야하는 국내 안무자들의 모습과는 정말 다른 분위기였다.
그 당시 내가 절실히 느낀 점은 관객의 문화 수준이나 활발히 돌아가는 문화산업의 수요가 국내 무용시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뉴욕 춤시장은 댄서들이 설자리가 훨씬 많다고 느꼈다. 극장도, 페스티벌도 많고 프리랜서 댄서들의 아르바이트 개념인 상업적인 뮤지컬이나 쇼들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뉴욕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각종 페스티벌에 지원신청서와 DVD를 제출하여 공연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지원금 부분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공연활동에 열정이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안무작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가 다양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나의 안무작을 선보이고자 뉴욕에서 오랜 시간 공연기획과 무용단 단장으로 활동해 오신 김영순 선생님과의 인연이 되어 「쿨 뉴욕댄스 페스티벌(COOL NEW YORK DANCE FESTIVAL)」에 참가하게 되었다.
김영순 선생님께서 열정을 쏟아 오신 극장 존롸이언시어터(John Ryan Theater)는 뉴욕의 아트스팟으로 불리는 브루클린 덤보에 위치해 있었다. 극장에서 나오면 바로 브루클린 브릿지가 보이던 덤보지역은 젊은 아티스트들이 모여드는 핫플레이스였다.
매년 이 극장에서 시즌마다 페스티벌을 열어 수많은 댄서들의 공연할 기회를 마련하신 김영순 선생님이 존경스러웠다.
약 10일간 이어지는 이 행사에 한국댄서로는 나와 정석순 씨가 참여했고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십 명의 댄서들이 무대에 올랐다. 덤보지역의 특성 덕분인지 매 공연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객석이 꽉 찰 정도로 관객이 많았다.
이 때 초연한 안무작 『블랙 볼레로(Black Bolero)』는 라벨의 명곡 「볼레로」를 듣다가 뱀이나 동물의 움직임이 떠올랐던 영감을 살려 한 마리의 검은 생명체가 탄생되고 다시 죽음의 이르는 과정을 안무했다. 동물적이고 괴상한 느낌의 동작들을 발레테크닉과 접목하여 구성했는데 미국문화와 잘 맞았던 것인지 반응이 기대이상으로 좋았고 관계자들에 의해 다른 페스티벌에서도 재공연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 후 뉴욕 테리타운에 125년 넘은 역사 깊은 극장 테리타운뮤직홀(Tarrytown Music Hall)에서 「에볼브 댄스 페스티벌(EVOLVE Dance Festival)」에 참가했고, 또 다른 초청으로 해밀턴대학(Hamilton College) 안에 웰린홀(Wellin Hall)에서 열리는 「뉴욕 스프링 댄스 컨서트(Spring Dance Concert NY) 무대에도 올랐다. 어마어마했던 해밀턴 컬리지 캠퍼스 규모만큼이나 극장 역시 재학생들을 수용할 만큼의 대극장(Schambach Center for Music and the Performing Arts) 이었다.
당일 공연은 해밀턴 컬리지 출신 댄서들의 무대와 재학생 공연이 올랐고 나를 포함한 축하공연 순서들이 이어졌다.
짧은 영어실력이지만 대기실에서 해밀턴 무용과 학생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누며 뉴욕 춤의 동향을 물어보고는 했다. 당시 가장 뜨고 있던 무용단 ‘씨더레이크컨템포러리발레(Cedar Lake Contemporary Ballet)’와 색깔이 뚜렷한 발레단 ‘컴플렉션컨템포러리발레(Complexions Contemporary Ballet)’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발레단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인 작품들을 올리는 무용단들만큼이나 댄서들에게 발레라는 것은 무용에서 세분화된 하나의 카테고리 아니라 당연히 댄서가 기본으로 갖춰야만 하는 필수조건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무용과가 발레, 현대무용, 한국무용으로 나눠지는 국내 대학과는 다르게 미국 최고의 예술학교 줄리어드스쿨 조차도 무용과는 하나로 통합되어 파트가 나눠져 있지 않다. 이미 움직임의 경계가 없어진지 오래인데 이것은 발레, 저것은 현대무용 이라고 정의 내리는 일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인가 싶었다.
그때 내가 여기서 공연만 할 것이 아니라 뉴욕에 있는 무용단들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씨더레이크무용단에는 같은 대학 동기였던 ‘최수진’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컴플렉션무용단에는 ‘주재만’ 선생님께서 디렉터로 계셨기에 두려움 없이 두드려보자고 마음 먹었다. 고맙게도 수진이의 도움으로 나는 씨더레이크무용단 클래스에 들어갈 수 있었고 뉴욕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댄서들과 몸을 풀며 작품 리허설들을 참관했다.
훌륭한 댄서들의 몸 푸는 모습마저 배울 점이 많았고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안무자들의 작품을 사오기로 유명한 씨더레이크의 다양한 작품연습 장면을 보면서 매일 바로 앞에서 공연을 보는듯한 값진 경험을 했다.
안타깝게도 최근에 접한 소식으로는 대기업에서 후원하던 씨더레이크무용단조차도 문을 닫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뉴욕 최고의 무용단도 자금난은 견디기 힘든 숙제인 것 같다. 문화산업의 중심이 순수무용 보다는 엔터테인먼트 쪽에 기울다보니 후원, 투자 역시 영화나 뮤지컬 쪽에 쏠리는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그 이후 나는 컴플렉션무용단에서 주최하는 겨울집중프로그램(Winter Intensive)에 등록했다. 2주간 하루에 세 클래스 씩 발레클래스, 컨템포러리, 레퍼토리, 요가, 즉흥 수업 등 하루에도 레오타드를 여러 벌 갈아입을 만큼 많은 땀을 흘렸던 혹독한 훈련이었다.
컴플렉션무용단만의 컨템포러리 발레 스타일이 워낙 확고해서 레퍼토리 수업에서 접한 컴플렉션의 변형된 발레동작들이 나에게 가장 큰 공부가 되었던 것 같다.
컴플렉션 단원들이 돌아가면서 티칭을 했는데 사실 그들의 시범을 보는 것만으로도 얻는 것이 많았다. 특히나 흑인댄서들의 남다른 탄력과 움직임의 컨트롤은 상당한 자극이 되었고 2주간의 인텐시브 프로그램을 통해 나의 동작의 범위가 확장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쯤 되니 내가 직접 뉴욕에서 공연을 기획하고 뭔가를 만들고 싶어졌다.
극장을 대관할 자신은 없었지만 공간만 있다면 공연을 올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영어도 잘 못하는데 예술가들의 갤러리와 작업실이 모여 있기로 유명한 첼시에 찾아가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녔다.
때마침 퍼포먼스에 관심을 보였던 아트게이트미술관(Art Gate Gallery)에서 무상으로 공간을 빌려주기로 하면서 기획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갤러리가 꽤 넓은 편이였고 천장도 높은데다 걸려있는 작품들도 마음에 들었기에 부푼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했던 기억이 난다.
뉴욕에 거주 중이던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현대무용수 임종경, 김유식 두 명을 섭외하고 줄리어드에 재학 중인 뮤지션 제레미 스미스(Jeremy Smith)도 지인의 소개로 섭외했다.
공연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 의미가 깊은 80년대 나의 어머니의 「비엔나안무대회」 수상작 『검은 영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