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미국에서 온 편지

박남표(朴楠杓)*가 학도병을 피하여 동경에서 회령으로 온 것은 해방 전전해 가을이었다고 생각된다.
원래 남표는 고향인 만주로 가야 할 텐데 부모님이 갑자기 소련 땅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회령에 사시는 숙모댁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남표는 이때부터 혼자였다.
남표가 회령으로 온다는 날, 나도 숙모를 따라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그를 마중하러 역으로 나갔었다.
‘동경유학생’에 관심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그때까지도 내가 상상했던 남표라는 학생은 일본에서 초라하게 쫓겨 오는 불쌍한 조선 학생의 모습으로만 상상했는데 플랫폼에 내린 박남표라는 청년은 사각모를 쓴 건강하고 당당하게 광채 나는 그런 멋진 사내였는데 놀랐다.
검은 사지 양복, 핸섬한 구두, 신식 트렁크에 손에는 암파문고(岩波文庫) 하나 들고…. 일본 순사가 그렇게 무섭던 그때 회령역에서 남표에겐 아무 조사 없이 보고만 있던 일도 기억한다.
바로 이런 식 이런 모습의 ‘남표’,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당당하고 굽히지 않고 자기를 흩트리지 않는 ‘남표’는 이미 그때부터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게 느껴진다.
해방되던 해 가을부터 남표는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재촉하였다. 우리는 그때 국민학교 대용교사(代用敎師)였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정확한 대학시험 날짜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서둘러 떠난다는 것은 무모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나의 신중론, 그래서 남표는 연방 용기 없는 나를 공박하였고……. 어째든 그래서 우리의 월남행(越南行)은 차일피일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3월초 어느 날 서울에서의 ‘대학 시험 4월 초!’라는 소식이 날아왔다. 우리는 부랴부랴 륙색을 차려 메고, 무개(無蓋) 석탄 화물차에 올라타고 천신만고 끝에 서울로 달려 왔다.
그러나 이때 대학 시험은 벌써 끝난 후였다. 사실 이때부터 우리의 고생길이 시작된 셈이다.
어쨌든 서울에서의 우리는 잠시 강원용(姜元龍) 목사가 경영하는 ‘선린형제원’에 있다가 공제회(共濟會)라는 학생료(學生療)에서 깡통에 밥을 지어먹으면서 살다가 이내 남표는 사관학교로 가버렸다.
비좁은 방에 네 사람이 같이 사는 동안 남표의 청결벽(淸潔癖)과 부지런함은 미울 정도로 철저하였다.
그뿐인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남표만은 흙을 파는 힘든 노동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는 끈기와 부지런함을 보였다. 그러면서 서울운동장에서의 운동경기나 비싼 음악회나 오페라 같은 구경은 빼놓지 않는 그런 괴벽한 면도 가지고 있었는데 생각하면 오늘의 박남표 역시 이미 그때에 만들어졌던 것 같게 생각된다.
남표는 나와 동갑 친구이나 나는 늘 그가 나의 형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사실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고 판단이 옳고, 실천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이 나이되도록 같이 붙어살게 되는 운명에 대하여 나는 종종 조용히 생각하여 볼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시기, 역사의 격동기에 같은 꿈과 애환(哀歡)을 공유했던……, 그런 인생의 누적(累積) 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남표는 나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으며, 나는 늘 그것을 받기만 하고 갚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남표는 누구에게나 불편하게 하지 않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런 남표의 심성을 존경하며 경탄한다.
요즘도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우리 처음 만났을 때의 사소한 일들이 아름답게 떠오를 때가 있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먹었나 보다 하고 생각되는 대목이다.
예컨대 회령교회에서 찬양대를 할 때의 일, 남표와 나는 베이스 파트였다. 해방된 그 해, 크리스마스 찬양예배 준비로 대원들은 밤마다 교회로 나가야만 했다. ‘할렐루야’며, 기타 ‘칸타타’ 등을 이재면(李載冕) 목사의 지도로 연습하기 위해서였다. 남표와 나는 학교일이 바빠서 이 때가 아니면 사실상 만나기가 힘들었다. 우리가 연습 도중 서울로 도망칠 공모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때 밖에 없었다.
이번 남표가 자기의 살아온 일에 대하여 책으로 엮는다기에 같이 살아온 나도 한 말 보태고 싶었다. 필경 큰일을 많이 한 남표는 우리의 이런 사소한 추억을 뺐을 테니까.
1994년 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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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표: 본지 발행인 故 조동화 선생의 친구. 1923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나 동경 중앙대 법과 수학 중 8·15로 귀국. 연세대학교 대학원, 육군사관학교, 미국보병학교,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졸업. 한국전쟁참전(소령, 5사단), 맹호사단 참모장(대령), 백마사단, 보병21사단 연대장(대령), 국방대학원, 논산훈련소 소장 후 예편. 대한사이클연맹회장(연임). 1973년에 도미.

※ 본 글은 박남표의 저서 「국경의 벽 넘고 넘어서」에 실린 조동화의 추천사로, 이번 1주기를 맞아 저자가 「춤」지 사무실로 편지로 보낸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