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살롱

「이브의 모든 것」(1950)이라는 고전 명작이 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 마고(베티 데이비스)가 자신의 비서인 이브(앤 박스터)에게 처참하게 밀려나는 내용인데,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은, 마고가 떠나자 그녀의 분장실을 사용하게 된 이브가 전신거울 앞에서 커튼 콜 답례인사를 하는 대목이다. 그 거울은 마고가 쓰던 것이었다. 뭐라고 할까? 한 시절을 풍미했던 여배우의 쓸쓸한 퇴장, 영원하지 않은 인기, 인생의 덧없음, 아 옛날이여 등등. 「클라우즈 오브 쉴즈마리아」(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극영화, 스위스/프랑스/독일, 2014년, 124분)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영화 마지막에 신참나기 할리우드 배우 조앤(클로이 모레츠)에게 관록의 배우 마리아(줄리엣 비노쉬)가 조언을 한다.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 대화가 끝나고 내 방에서 바로 나갈 게 아니라 시간 간격을 조금 두고 나가면 어떨까? 홀로 남은 나에게 관객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말이지.” 조앤은 그녀의 청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들이 출연한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는 40대 여사장 헬레나와 젊고 매력적인 여직원 시그리드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더욱 잔인한 부분은 20년 전에 마리아가 같은 연극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았고 상대역을 했던 여배우는 자살했다는 사실이다. 마리아는 같은 운명에 놓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다 부질없는 노력이다. 「클라우즈 오브 쉴즈마리아」의 주제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하다. 이 영화의 실제 장점은 주제와 관련된 세련된 은유들과 그리고 스위스의 멋들어진 자연이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이다. 특히, 마리아의 비서 발렌틴 역을 맡은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대단했다. 몇 편의 뱀파이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암울한 분위기와 「웰컴 투 마이 하트」(2010)의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연기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님을 보여주었다. 이 배우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 알프스에서 스위스 쪽으로 안개가 넘어오는 날이 있다. 뱀처럼 스멀스멀 산골짜기를 타고 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온 산과 골짜기를 뒤덮어 마치 구름바다에 섬들이 떠있는 풍광이 펼쳐진다. 100년 전 쯤 어느 작가가 흑백으로 담아놓은 필름이 있고 이어서 현재 모습을 천연색 카메라로 잡는다. 관객은 대기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장관을 목격한다. 그러고 나면 이제는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 쉴즈마리아로 날아가 실제로 구름바다 위에 서 있고픈 욕망이 발생한다. 영화의 감흥 그대로 관객의 감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곳에 서면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유학시절 스위스를 한두 번 가보았지만 급히 지나치는 관광객의 시선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니 그렇게 지나칠 게 아니었을 성 싶다. 알프스의 웅장한 자연을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인생에 대한 통찰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든 자연과 같이 화면에 담아놓으면 깊은 인상을 넘겨받을 수 있다. 자명한 이치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익히 알았던 주제와 전개방식, 연기력이 빼어난 배우들, 칸 영화제 작품상 후보 등등 영화에 달린 계급장들을 떼고 보아도 훌륭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