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길을 꼬부랑 꼬부랑 꼬부랑 넘어간다.” 어릴 때 참 많이 부르던 동요입니다. 꼬부랑 할머니. 예전에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할머니들은 대부분 꼬부랑 할머니였지요. 그래서 저 동요가 더 사실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나이가 들어도 할머니들의 허리가 꼿꼿하지요. 요즘 아이들에게 꼬부랑 할머니는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꽃을 얘기하려고 꼬부랑 할머니 얘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는지 이미 눈치를 채셨을 줄 압니다. 그래요. 할미꽃입니다.

‘뒷동산의 할미꽃 / 꼬부라진 할미꽃 / 싹날 때에 늙었나 / 호호백발 할미꽃 /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할미꽃이라는 전래동요를 기억하실런지요? 이른 봄날 뒷동산 양지 바른 곳이면 슬프게 피어있던 할미꽃을 기억하실런지요? 할머니 무덤 옆에 할머니처럼 허리 굽은 채 피어있던, 할머니처럼 백발이 되어 피어있던 할미꽃을 기억하실런지요?

할미꽃은 노고초(老姑草)라고도 하고 백두옹(白頭翁)이라고도 부르지요. 산이며 들판이며 볕이 잘 드는, 양지 바른 곳에서 잘 자랍니다. 무덤가에 많이 피는 이유도 실은 묘를 쓸 때 양지 바른 곳을 택하는 법이어서 대부분의 무덤은 그야말로 양지 바른 곳이니, 당연히 할미꽃이 많이 피었던 것이겠지요. 게다가 할미꽃은 잔디하고도 궁합이 잘 맞는다니, 무덤가에 할미꽃이 그리 피었던 것이겠지요.

이른 봄에 꽃을 피우는 할미꽃은 줄기며 꽃이며 온통 흰 털로 덮여있지요. 그 줄기는 꼬부랑 할머니처럼 휘어서 꽃은 늘 아래로 향하지요. 비록 허리가 휘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할미꽃이라 불리지만, 백발 속에 다소곳 가려진 그 꽃의 얼굴은 붉은 자주색을 띄고 있으니 가만히 깊게 그리고 오래 들여다보면 고개를 숙인 채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처녀처럼 참 귀엽고 어여쁜 꽃이지요.

그러니 억울한 일입니다. 세간의 편견이란 참 무서운 일이어서 이제 갓 핀 꽃을 보고, 저리 청순하고 어여쁜 처녀를 두고, 허리가 휜 늙은이라 노고초(老姑草)라고 놀리고, 호호백발 늙은이라 백두옹(白頭翁)이라고 놀린 것이니, 할미꽃이라는 그 이름 참 서럽고 서러운, 억울하고 또 억울한 이름이기도 하겠다 싶습니다. 이 아름다운 꽃을 제대로 알아봐준 시인이 있지요. 이향지 시인입니다. 1942년생인 시인은 1989년 마흔 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어느새 일흔이 넘었지만 그의 시는 어떤 젊은 시인들보다 더 젊지요. 그러니 어쩌면 할미꽃을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고울 때 만났습니다. 만나는 순간, 밥도 잠도 아픔도 다 잊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아름다운 곳에, 그대로 두어라. 그래서 그곳에 그대로 두고 나만 돌아왔습니다.
- 이향지, 「동강할미꽃4」 전문

‘가장 고울 때 만났다’는 문장이 ‘그곳에 그대로 두고 나만 돌아왔다’는 문장이 왜 이다지도 먹먹한지요? 동강할미꽃을 바라보는 노시인. 노시인을 바라보는 동강할미꽃. 그 순간 이루어진 두 생명의 교감. 영화 ET에서 이티와 소년이 손가락을 맞대고 나누던 그 우주적 교감.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집니다.

아, 동강할미꽃은 할미꽃의 하나이지만 강원도 정선 동강유역의 산에서 자생하는 주로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자라는 우리나라 특산식물입니다. 산을 따라 계곡을 따라 구절양장 구불구불 휘돌아나가는 동강. 동강에 가시면 래프팅만 하지 마시고 가끔은 산에 올라 곱디 곱게 핀 동강할미꽃과 교감을 나눠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기왕에 동강할미꽃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편 더 소개합니다. 이홍섭 시인의 「동강할미꽃」입니다.

마흔 넘어 낳은 늦둥이 아들놈 보고 싶어 태권도 학원에 갔더니 계단을 내려오던 조무래기 한 놈이 “할아버지세요?”라고 물으며 빤히 쳐다본다. 창졸간에 한 세대를 건너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꽤 무상하기는 한 것이었다.

절벽 끝에서 처녀보다 더 빛나는 동강할미꽃도 자기 이름을 처음 불러준 이가 참으로 미웠을 것이다. 미워서 맑디맑은 동강에 얼굴을 비추고는 동강처녀꽃, 동강처녀꽃 하고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되뇌이다, 되뇌이다 처녀보다 더 빛나게 되었을 것이다.
- 이홍섭, 「동강할미꽃」 전문

여러분은 이 시를 읽고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누구를 떠올리게 될까요? 저는 이 시를 읽다가 문득 동강할미꽃에서 오드리 헵번이라는 여배우를 떠올리는 것인데요. 늙는다는 것.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 늙은 오드리 헵번이 젊은 오드리 헵번보다 더 아릅답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데요. 예쁘기야 젊은 오드리가 더 예쁘겠지만 아름답기로는 늙은 오드리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데요. 성형수술이란 예뻐지려고 늙어서도 예뻐지려고 바둥거리는 것일텐데요. 성형수술이 결코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일 텐데요. 늙어서도 아름다운 사람, 동강할미꽃 같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인데요. 여러분은요?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 우리가 놓치며 사는 것 중 하나가 아닐런지요.

안감이 꼭 저런 옷이 있었다
안감이 꼭 저렇게 붉은 옷만을 즐겨 입던 사람이 있었다
일흔일곱 살 죽산댁이었다 우리 할머니였다 돌아가신 지 꼭 십 년 됐다
할머니 무덤가에 앉아 바라보는
앞산마루 바라보며
생각해보는......

봄날의 안감은 또 얼마나 따뜻한 것이냐

봄날의,

이 무덤의 안감은 또 얼마나 깊고 어두운 것이냐
- 유홍준, 「할미꽃」 전문

유홍준 시인의 「할미꽃」입니다. 일흔일곱에 죽은 죽산댁. 시인은 지금 어느 볕 좋은 봄날 죽은 할머니의 무덤가에 앉아 있는 것인데요. 할머니 무덤가에 피어있는 할머니처럼 허리 굽고 백발 성성한 할미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요.
서두에 할미꽃을 백발 속에 수줍은 듯 붉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꽃이라 했는데, 유홍준 시인은 할미꽃을 일러 ‘안감이 꼭 저렇게 붉은 옷’이라 합니다. 죽은 할머니가 즐겨입던 옷이랍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할미꽃은 “봄날의 안감”이 되고 “무덤의 안감”이 되어 그 붉은 안감이 “얼마나 깊고 어두운 것이냐” 합니다. 꽃이 할머니가 되고 할머니의 무덤이 되는 것이니 시인의 혜안이란 또 얼마나 깊고 어두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옛적 청상과부가 된 여자가 딸 셋을 키워 시집을 보냈다는 얘기. 이제는 늙어서 혼자 살기 너무 어려웠던 여자는 큰 딸을 찾아갔지만 박대를 당하고, 둘째도 셋째도 모른 척 했다는 얘기. 남편 여의고 혼자서 딸 셋 키워 시집도 보냈건만 딸 자식 소용없어 한 몸 뉘일 곳 없게 된 처량한 신세. 그 신세가 한탄스러워 고갯마루에서 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바라보며 허리 굽은 채 고개 숙인 채 그 모양 그대로 죽었다는 얘기. 할미꽃 설화는 그리도 서러운 어머니의 얘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요 옛날 시집 간 딸들은 마당에 할미꽃을 키우지 않았다나요.

그렇다고 할미꽃이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슬픈 꽃은 아닙니다. 할미꽃이 저 북녘에서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맨 처음 봄소식을 알리는 반가운 꽃입니다. 러시아의 아무르 강을 아시는지요? 중국에서는 헤이룽 강(흑룡강)이라고 부르고 몽골에서는 하라무렌(검은 강)이라고 불리는 강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아무르 강 하면 떠오르는 건 박정대 시인의 “아무르 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으로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밑의 어둠

내 머리 위의 어둠, 내 늑골에 첩첩이 쌓여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 박정대, 「아무르 강가에서」 부분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할미꽃으로 돌아와야겠지요. 하여튼 아무르 강 지역. 그곳에서는 할미꽃이 제일 먼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할미꽃을 봄소식을 알리는 꽃으로 “영춘화(迎春花)”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영춘화란 이름을 갖는 꽃은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른 것이니, 때로는 사람마다 저마다의 영춘화를 갖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말이 잠시 딴 길로 샜는데요, 하여튼 헤이룽강 지역에서는 소녀들이 할미꽃이 필 때면 시집갈 날을 손꼽으며 가슴이 부풀어오른다나요. 자료를 찾다 보니 과거 만주 꾸냥(아가씨라는 뜻의 중국어, 姑娘)들은 ‘춘삼월 눈 녹고 영춘화 피면 시집을 갈 테니 이웃 마을 왕씨는 꼭 기다려 달라’는 할미꽃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나요. 그러니 할미꽃 보면서 너무 슬퍼하거나 서러워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어무이요
어여 일나이소
손 잡고 산보 나가입시더
꽃이 천지삐까리니더
- 이인수, 「봄, 할미꽃」 전문

그래요. 더 이상 슬퍼하지 마시고 서러워하지도 마시고, 우리 어여 일나서 손 잡고 산보 나 가입시더! 봄볕은 쨍쨍하니 여기도 할미꽃! 저기도 할미꽃! 하고마! 꽃이 천지삐까리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