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1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 마른 뿌리로도 목숨을 대어주었다 / 이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 이 자갈 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나오는가? / 사람들이여, 너는 말하기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 그곳엔 해가 쪼여대고 /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 단지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 T. 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서

흰 꽃눈이 흩날리는 찬란한 봄날, 다시 돋아나는 그리움이 하나의 기억을 깨웁니다. 선생님께서는 단단해 보이는 알뿌리 하나를 건네주시며 어렸을 때 살았던 고향은 너무도 추운 곳이어서 봄이 너무나도 늦게 왔다고, 먼 북쪽의 추위와 차가운 땅을 생생하게 떠올리셨습니다. 봄이 머지 않았는데 사방은 아직도 눈으로 덮여 있고, 그 어디서도 생명의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던 세상은 마치 황무지처럼 차갑고 어둡고 쓸쓸했을 테지요. 그때 기적처럼 피어 있는 그 꽃을 발견했던 감격을 “야아, 대단해”라는 한마디에 담으셨습니다. 그 푸르른 색이 얼마나 선명했으며, 먹을 것도 부족하고 얼어 죽을 것만 같은 겨울에 그 생명이 가져다 준 안도감과 위안이 얼마나 고마운 것이었는지를 설명하시던 모습에서, 저는 아름다움의 순간을 생각했습니다. 그토록 예뻤던 겨울꽃, 히아신스를 기억하며 선생님은 편집실 창가 잘 보이는 곳에 알뿌리를 놓아두셨습니다. 선생님은 춤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 우연이었다고 말씀했지만, 저는 아름다움에 대한 감수성이 선생님을 춤으로 이끌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순간적이어서 아주 잠깐 미풍처럼 스치고 지나가 버리니…. 인간은 아름다움의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서 예술을 탄생시켰지만 그렇게 물화되자 생명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춤만이 물화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음을, 춤은 아름다운 순간 사라져버려 결코 붙잡아 놓을 수 없기에, 그 매력이 선생님을 가슴 뛰게 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조동화 선생은 척박한 시대, 황무지 같은 땅을 일구어 수확을 낼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우리 모두의 스승이었습니다. 1세대 무용평론가로서 그리고 무용전문 잡지의 발행인으로서 그 존재감은 귀중하게 남을 것입니다. 일찍이 언론인으로서 무용평론을 신문과 잡지에 실으며 춤의 위상을 드높였고, 월간지 「춤」을 발간해 무용계를 이끌며 춤의 발전에 그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던 유일무이한 스승입니다. 춤에 작가적 정신을 부여해 인식의 폭을 넓히고, 춤이 시대정신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로서의 지평을 열었으며, 더불어 현대적 의미의 춤다움을 고양시킨 멘토의 역할을 갖춘 분이 다시는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서 선생의 수많은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입니다. 그 업적은 후배이자 제자로서 여기 오신 수많은 무용인의 이름으로 대신합니다. 조동화 선생이 개척한 땅에 함께 씨를 뿌리고 가꾸어 온 이들이야말로 선생이 가장 자랑스러워할 업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비호와 후원, 지도 아래 우리의 춤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풍요로운 성과를 거두며 성장했고, 마침내 제 빛을 발하며 오늘의 발전된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2006년 「춤」지가 30주년이 되던 때 선생께서는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다”며, 마치 자식을 다 키워내 소임을 다한 부모처럼 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서른 살이면 이제 어른이라고, 30년 동안 발전한 현대의 우리 춤도 이제 성인이 된 셈이니 잘하나 못하나 알아서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무용계 형편을 세세히 챙기며 관여하기보다는 조금 더 뒤에서 지켜보는 쪽으로 기우셨습니다. 멋모른 사람들은 선생이 나이가 드시니 기력이 약해져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기 쉬웠지만, 타계하기 전까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얼마나 건강한 분이셨는지 주위사람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내셨는지도요. 선생은 살아계셨을 때도 춤의 역사였지만 앞으로도 생생한 역사일 것입니다. 선생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 그 높은 뜻을 우리가 항상 지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지병도 없이 건강하시던 선생님이 주무시다 이 세상과 조용히 작별을 하신 지 1년. 이제 더 이상 우리 곁에 있지 않음을 실감했을 때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생겨났지만, 선생님이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미련없이 떠나셨을 거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습니다. 오늘, 다시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하며 추모의 정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 글은 4월 17일 예술가의 집에서 열린 추모회 「조동화 선생을 생각하는 밤」에서 낭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