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 「평론가가 뽑은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Critics’ Choice 2015)」(6월30일~7월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한 평론가가 뽑은 젊은 무용가 초청공연은 이제 「크리틱스 초이스(Critics’ Choice)」란 명칭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난립할 정도로 많은 젊은 기획공연들 사이에서도 높은 인지도와 공신력을 확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댄스포럼」 주도로 20년 가까이 꾸준하게 이어오는 저력이라든가, 무용가나 기획자 주도가 아닌 평론가 추천에 의한 선발이라든가, 젊은 기획으로는 드물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진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가장 주목할 점은 「크리틱스 초이스」를 통해 김은희, 박호빈, 이윤경, 최지연, 강경모, 장은정, 김윤수, 우혜영. 이경은, 김윤규, 류석훈, 박나훈, 이태상, 이해준, 정영두, 홍혜전, 신종철, 박순호, 한창호, 정연수, 윤푸름, 신창호, 이혜경, 윤수미, 김판선, 김형남, 김경영, 차진엽, 김보람, 조주현, 노정식, 정보경, 오창익, 정형일, 안영준, 이영일, 전혁진(이상 기수 순)등 현재 우리 무용계를 이끄는 무용가들을 상당수 배출하였다는 것이다.
올해는 6월30일부터 7월7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이루다, 김경신, 김재승, 장혜림, 김윤아, 배준용, 조현상, 서연수, 이동원이 차례로 신작을 선보였다. 그 중 가운데 날인 7월 3~4일의 공연을 조명한다.

장혜림의 『숨그네』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성과 소멸의 이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들의 갈등과 고뇌를 그린다. 하지만 이를 어둡고 기이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젊은 감각의 세련된 연출과 안무로 실현하였다.
오케스트라단에 자리 잡은 라이브 연주단은 국악과 양악을 절묘하게 융해하고 있다. 검은 바지에 색색 티셔츠를 입은 여섯 명의 여성무용수들은 차분하면서도 선명하게 변화하는 파스텔 색조의 조명 아래에서 움직인다. 그녀들은 몸의 선형을 드러내는 춤을 추었는데, 의식적인 포즈를 연속함으로써가 아니라 움직이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여성적 선형을 내비친다는 점에서 심미감을 배가시킨다. 일상성 짙은 몸짓에 한국무용의 어름과 굴신을 어우른 지점이 절묘하다. 여기에 한국무용 특유의 여백의 미를 시기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데, 여백 즉 휴지(休止)를 밀도 있게 채우는 무용수들의 역량이 돋보인다. 강렬하게 타진하는 라이브 연주 속에서도 밀도를 유지하면서 차분하게 걸을 수 있는 능력은 한국무용수들의 강점이다.
다만 동작들이 너무 단정하게 연결되어 공간이 빈 듯한 장면들도 있었는데 몰아칠 때는 확실히 몰아치는 것도 필요하다. 안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다가도 절정구에서는 안무 구성을 좀 더 복잡 다양하게 엮어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다. 음악, 조명, 의상 등에서 세련된 연출을 구사하면서 한국무용의 원리적 탐구를 바탕으로 한 컨템포러리댄스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장혜림의 발전 가능성은 높게 평가될 수 있다.

김윤아는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종이’ 즉 백지란 의미의 『타불라 라자(Tabula Rasa)』를 선보였다. 인간은 빈 백지와도 같은 상태로 태어나며 외부 세상의 감각적인 지각활동과 경험에 의해 서서히 마음이 형성된다는 로크의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 김윤아는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충족되지 못하는 잔여를 지니고 있으며 채워지지 않은 욕망의 장소에서 다양한 결핍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막이 오르자 무대에는 곽티슈로 둘레를 쳐놓은 커다란 무대장치가 눈에 들어온다. 그 가운데에는 크고 작은 변기들이 놓여 있다. 화장실을 연상시키는 장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출구에 대한 상징으로 여겨진다. 뒤 막의 거대한 구멍에서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일종의 배설을 형상화하는 듯하다. 때론 그 구멍에서 대량의 휴지들이 변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열 명 정도의 무용수들은 각기 다른 성격의 인물을 묘사하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주제 이미지를 형성해간다. 그들은 끊임없이 두셋씩 혹은 무리지어 움직인다. 몇몇 무용수들은 부조리한 몸짓들을 펼치면서 한 대상을 압제하기 시작한다. 그 괴롭힘은 당기고 밀고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진화되어 정교한 안무 구성을 이루기도 한다. 절정구에 엄청나게 날리는 휴지들 사이로 김윤아의 독무가 펼쳐지는데 춤추는 몸의 선, 특히 다리에서 발끝까지 이어지는 선에서 탄탄한 기량을 느낄 수 있다. 그녀에게 이끌리듯 무용수들은 휴지를 사정없이 뽑아내고 날리면서 광란과 환희가 뒤섞인 듯한 몸짓을 펼친다.
김윤아가 그 동안 보여주었던 무용수로서의 행보는 인상적이었으나 안무가로서의 역량은 아직 미지수였다. 이번 『타불라 라자』에서 그녀가 보여준 연출력은 안무가로서의 앞날도 밝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다만 절정구에서 동작 기교와 안무 구도를 확장하는 등의 디테일에는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배준용의 『쾌락신경』은 욕구를 채우는 뇌의 화학작용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절단된 마네킹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살색 서포트만 걸친 남녀무용수들이 온 몸의 관절을 활용하는 듯한 움직임을 느릿하게 전개한다. 어떤 면에서 목각인형의 제스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관절을 활용한 부드러운 움직임은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가는데 그 과정에서 배준용의 안무 능력을 읽을 수 있다. 일련의 모티브를 연속하고 발전하여 점진적으로 확장해가는 방법을 취한다고나 할까. 현대무용에 곡예나 힙합까지 넘나들면서 움직임의 다각화를 꾀한다는 점 역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쾌락신경』 같은 작품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기계적이고 무기질적인 움직임으로 진행되어가야 한다. 무용수들이 기계인형처럼 움직이면서 기묘한 미감을 돋우는 방향이 맞는 작품이란 의미다. 하지만 동작을 예리하게 맞춰가기에는 무용수들의 기량이 다소 부족한 듯 보였다. 의상, 무대미술, 조명 같은 부분에서도 보다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할 필요는 있다. 특히 마지막에 무대 뒤 문을 개방하여 거리가 노출되자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으려 했던 (기이하진 못해도) 독특했던 분위기마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쾌락신경』에서 배준용은 남다른 안무 능력을 발휘하였으나 이를 최대한 돋우는 세련된 연출력에는 약점을 보였다. 작품을 실현하는 무용수들의 기량 면에서도 아쉬움이 남는다.

이번 「크리틱스 초이스」는 기대주와 다크호스 사이에 명암이 극명하였다. 기대주들이 무언가를 의식하면서 과대 포장함으로써 예술적인 핵심을 흐트러뜨렸다면, 다크호스들은 예술성을 높이는데 집중력을 발휘함으로써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위의 다크호스들이 기대주들을 압도하는 비결이야말로 모든 젊은 예술가들이 잊지 말아야할 예술 창작의 정석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