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패랭이꽃, 하면 무엇이 떠오르냐고 물었더니 조현정 시인이 그러는 겁니다. 비누꽃. 보랏빛 꽃을 따서 두 손으로 비비면 비누처럼 거품이 생겨서 그 꽃을 비누꽃이라고 했다고. 그 꽃을 비누 삼아 소꿉놀이를 했다고.

꽃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들꽃에 대한 경험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묻곤 하는데, 서울에서 자란 나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패랭이꽃이 비누꽃이라는 말. 이번에도 뜻밖의 소득을 얻은 셈입니다.

그래요. 오늘 띄울 꽃은 패랭이꽃입니다. 패랭이 아시지요? 조선시대 양반이 쓰던 갓이 아니라 역졸이나 보부상 같은 신분이 낮은 상민들이, 천민들이 썼던 패랭이삿갓. 댓개비를 엮어 만든 갓말입니다. 그 패랭이를 닮았다 해서 패랭이꽃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들꽃. 우리나라의 들꽃이 으레 그런 것처럼 지천에 낮게 낮게 피어 이놈 발 저놈 발에 숱하게 밟혀왔던 앉은뱅이꽃. 아무나 아무렇게나 꺾고 또 꺾곤 했던 천덕꾸러기 들꽃. 그래서 조금은 슬픈 꽃. 이성복 시인이 얘기했던 “당신을 찾아가는 곳 어디에나 돋아나던 붉은 반점” 같은 꽃.

정적 하나가 내 가는 길과 들판을 몰아 옵니다 나직하던 발걸음 소리가 나둥그라지며 패랭이꽃이 피어납니다 당신을 찾아가는 곳 어디에나 붉은 班點이 돋지요 거친 호흡과 身熱은 내 것이고요

휘말린 새들과 뿌리 뽑힌 나무를 움켜쥐고서 순식간의 분노를 느끼게 하세요 정적이 나를 피해 갑니다 달아나는 정적을 내가 입맞춤하게 해주세요
- 이성복, 「정적 하나가」 전문

패랭이꽃을 한자로 석죽(石竹) 혹은 천국(天菊)으로 부르기도 하는데요. 우리말로 풀면, 돌대나무와 하늘국화이지요. 돌 틈을 비집고 자라는 대나무라니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일테구요, 하늘에 핀 국화라니 그 모양과 색깔이 아름답다는 것일테지요. 석죽하면 떠오르는 시가 여럿 있겠지만 천국(天菊)의 이미지까지 고려하면 저는 고려 때 시인 정습명의 「석죽화(石竹花)」를 떠올리는 것인데요.

世愛牧丹紅 栽培滿院中(세애목단홍 재배만원중)
세상에선 모란꽃 붉은 색이 곱다고 화원 가득 심고 가꾸지만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수지황초야 역유호화총)
누가 알까, 풀이 우거진 들판에도 더 좋은 꽃들이 피어 흐드러졌는데
色透村塘月 香傳娘樹風(색투촌당월 향전낭수풍)
그 빛은 연못 속에서 달빛에 어리고 그 향기는 바람따라 언덕을 넘어가는데
地僻公子少 嬌態屬田翁(지벽공자소 교태속전옹)
궁벽한 산골이라 잘난 사람들 없으니 그 아름다움은 오직 농부들 것이네
- 정습명, 「석죽화(石竹花)」 전문

아, 패랭이꽃을 하늘국화라고 부르면 또 슬그머니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지요. 류시화의 「패랭이꽃」입니다.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 류시화, 「패랭이꽃」 전문

붉은 패랭이꽃.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는 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는 꽃. 하늘을 닮은 꽃. 패랭 패랭 패랭 읊조리다 보면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패랭 패랭 부르다 보면 헤어진 옛 애인의 눈물이 얼핏 떠오르기도 하는 것인데요. 그래서 그런가요. 시인은 사는 일이 힘들 때면,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꽃이라 합니다.

한편 석죽(石竹)하면 생각나는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오랑캐꽃(제비꽃)을 쓰면서 한 번 언급하기도 했더랬지요.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입니다. 누런 고양이가 나비를 놀린다는 뜻인데 제목과는 달리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는 게 아니라 나비가 고양이를 놀리고 있는 것 같은 그림이지요. 그런데 김홍도는 고양이와 나비를 그리면서 두 개의 다른 꽃을 또한 그려 넣었는데요, 바로 제비꽃과 패랭이꽃(석죽)입니다. 김홍도는 왜 고양이와 나비, 그리고 제비꽃과 패랭이꽃을 함께 그린 것일까요.

고양이 묘(猫)는 늙은이 모()와 발음이 같고, 나비 접(蝶)은 노인 질()과 발음이 같습니다. 이런 연유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고양이와 나비 그림을 통해 노인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던 것인데, 김홍도 또한 이런 뜻에서 고양이와 나비를 그려 넣은 것이지요.

제비꽃은 한자로 여의초(如意草)라 부른다 했지요. 제비꽃은 ‘모든 일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상징한다고 지난번 오랑캐꽃을 이야기하면서 이미 말씀을 드렸었지요. 패랭이꽃은 왜 그렸을까요. 패랭이꽃을 석죽(石竹)이라고 부른다고 했지요. 바위(石)와 대나무(竹)는 영원불변을 상징합니다.

이해되셨는지요? 그러니까 황묘농접도는 그림을 의뢰한 분(그분은 아마도 노인이었을테지요. 아니면 의뢰인의 부모이던가)의 무병장수와 소원성취의 기원을 담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런데, 패랭이꽃을 자세히 보면 우리가 아는 어떤 서양꽃과 무척 닮았습니다. 바로 카네이션입니다. 실제로 카네이션은 야생하는 패랭이꽃을 개량한 원예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같은 꽃이지요. 다만, 패랭이 꽃잎은 홑잎인데 반해 카네이션 꽃잎은 겹으로 핀 것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어버이날 화원의 비싼 카네이션 대신 들판에 흐드러진 패랭이꽃, 석죽화를 한 다발 안겨드리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어버이날, 어쩌면 우리는 형식적으로 꽃집에 들러 형식적으로 카네이션을 사고 형식적으로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선물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니 조금 멀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어느 들판에 나가 패랭이꽃을 찾아 오래오래 무병장수하시기 바라는 그 마음을 꽃과 함께 묶어서 부모님께 드리는 것, 그게 진짜 선물이고, 자식 된 도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패랭이꽃은 없다. 영등포구 개봉동 쪽 2층 문에 기대어 손을 흔드시던 작은 꽃, 패랭이꽃은 지고 없다. 가는 줄기에 작은 꽃 매달고 서 언제나 나 사는 쪽 바라보시던 꽃, 대학병원 20층 집중치료실 병상 산소호흡기 달고 누워 계시던 꽃,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자시던 여든두 살 파싹 마른 손, 사그러든 심장 때문에 폐에 물이 차오른 꽃, 신장도 간장도 신열에 싸인 채 바람에 불리던 작은 꽃 이제 알부민 주사도 링겔도 버리고 그냥 하늘이 된 꽃, 가거라, 잘 가 힘든 목소리로 흔들리고 있는 야윈 꽃.
- 이건청, 「패랭이꽃-어머니」, 전문

패랭이꽃은 어떤 척박한 환경에도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하다못해 바위며 돌 틈에도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는, 이른 봄부터 피기 시작해 서리가 내리기 전 늦가을까지 끊임없이 꽃을 피우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꽃이지요. 그래서 조상들은 패랭이꽃을 석죽(石竹)이라 불렀지요. 우리의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렇게 사셨지요. 가진 자들의 모진 핍박과 가난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왔지요. 패랭이꽃처럼 착한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착한 사람을 닮은 패랭이꽃인가요.

착한 사람들은 저렇게 꽃잎마다 살림을 차리고 살지, 호미를 걸어두고, 마당 한켠에 흙 묻은 삽자루 세워두고, 새끼를 꼬듯 여문 자식들 낳아 산에 주고, 들에 주고, 한 하늘을 이루어간다지.

저이들을 봐, 꽃잎들의 몸을 열고 닫는 싸리문 사이로 샘물 같은 웃음과 길 끝으로 물동이를 이고 가는 모습 보이잖아, 해 지는 저녁, 방마다 알전구 달아놓고, 복(福)자 새겨진 밥그릇을 앞에 둔 가장의 모습, 얼마나 늠름하신지, 패랭이 잎잎마다 다 보인다, 다 보여.
- 이승희, 「패랭이꽃」 전문

이번 주말에는 식구들하고 패랭이꽃 보러 소풍을 가야겠습니다. 보랏빛 이슬방울, 눈물방울, 그리하여 황홀한 보석. 그 패랭이꽃 보러 가야겠습니다. 두 딸내미들과 함께 그 꽃 비벼 비누거품도 만들어보고, 보랏빛 설움을 함께 적셔도 봐야겠습니다.

앉아 있어라
쪼그려 앉아서 피워 올리는 보랏빛 설움이여
저기 저 다스운 산빛, 너로 하여, 네 아픈 젖가슴으로 하여 한결 같아라
하나로 빛나고 있어라
보랏빛 이슬방울이여
눈물방울이여
언젠가는 황홀한 보석이여
앉아서 크는 너로 하여, 네 가난한 마음으로 하여 서 있는 세상, 온통 환하여라
환하게 툭, 터지고 있어라
- 이은봉, 「패랭이꽃」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