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단 하루라도 좋다. 100원만 내렸으면!” 「문화예술진흥기금(문예진흥기금)」 모금 제도 폐지를 코앞에 두고 당시 문화관광부와 기획예산처의 담당 공무원들이 되풀이하던 말이다. 영화 관람료에 포함하여 거둬오던 450원 내외의 「문예진흥기금」이 2004년 1월1일부터 없어지게 되므로 그만큼의 관람료가 인하돼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국민 부담금을 없앤다는 것이 모금 중단의 명분이었기에 관람료 인하가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확인해주는 터였다. 그러나 관람료는 단 반나절도, 단돈 1원도 내리지 않았다. 극장들은 정부가 놓을 수밖에 없었던 「문예진흥기금」 모금 바구니를 그대로 관객들에게 내밀었던 것이다.
모금이 여남은 날밖에 남지 않은 2003년 12월18일 “공연장 등의 이용은 더 이상 특정 계층의 국민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공연을 관람하는 일부 국민들만이 문화예술의 진흥에 특별한 부담을 질 합리적인 이유도 없다”는 내용으로 위헌 판결이 났는데, 이는 「문예진흥기금」 모금 제도 폐지 논란의 결정판이다. 그러나 극장들은 정부 정책에도 법원 판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기금 모금분만큼을 가로채간다. 급기야 한국소비자연맹은 2004년 여름부터 영화요금 부당이익반환 청구소송 운동을 벌인다. 이 소송은 2006년부터 영화발전기금 모금 제도를 새로 도입하기로 한 탓인지 유야무야되고 만다.

공연장, 전시장 등에서 하던 「문예진흥기금」 모금은 1973년 7월11일부터 2003년 12월31일까지 계속되면서 그 액수가 4,186억 원에 달하였다. 이와 별도로 2002년까지 국고 1,847억 원이, 2005년까지 방송발전기금 1,673억 원이 「문예진흥기금」으로 출연되었으며, 모금 폐지 첫 해인 2004년부터 복권기금이, 2010년부터 경륜·경정 수익금이 전입되었다. 적립금 운용 수입과 민간 기부금까지 더하여진 「문예진흥기금」은 지난해까지 1조 6천여 억 원이 집행되었다. 적립 액수로만 치면 2004년 5,273억 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계속 감소하였으며, 현 지출 규모를 유지한다면 2016년 말 거의 소진되어 2017년 기금예산 편성이 불가하다는 것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원회)의 설명이다.
사실 2003년부터 국고 출연이, 2004년부터 모금이 중단되면서 「문예진흥기금」은 곧 바닥을 드러낼 운명이었다. 그 대안인 복권기금 전입금은 올해 예산 기준으로 631억 원에 이르지만 소외계층 중심의 국민 문화향수 사업에만 집행해야 하는 구조이고, 부대조건이 없는 경륜·경정 수익금은 120억 원으로 규모가 훨씬 작다. 그러므로 예술 창작, 국제 문화교류, 지역문화 활성화, 그리고 문화예술 현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업들의 추진을 위해서는 원금을 헐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315억 원 규모의 국고사업을 「문예진흥기금」사업으로 이관 편성하는 등 현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에 따른 기초예술 활성화 사업의 대폭 확대로 기금 고갈 추세가 더욱 가팔라졌던 것이다.

「문화예술진흥법(문예진흥법)」은 1년가량의 공개적인 준비 과정을 거쳐 1972년 8월14일 제정된다. 이 법에 의해 한국문화예술진흥원(문예진흥원,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전신)이 이듬해 3월30일 법인 등기 후 10월11일 공식 개원하며, 그 사이 「문예진흥기금」 모금이 시작된다. 그리고 유신 선포 1주년 되는 날인 10월17일 제1차 문예중흥5개년계획(1974~1978)이 공표되니, 「문예진흥기금」을 주재원으로 하여 문예중흥계획을 실질적으로 집행하는 기구가 바로 문예진흥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문예진흥기금」 정책은 국가주의에 바탕을 두고 문화예술을 견인하려 했다는 역사적 비판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에도 경제발전에 따른 국민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줌과 아울러 경제발전의 과실을 문화예술 부문에 실제 투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막대하다.
당시 언론계와 문화계의 시선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현실적으로 문화예술계의 자율적인 발전이 힘든 여건에서 바람직한 것”(경향, 1971.11.10.), “정부의 지나친 규제보다는 자율적인 방향으로, 따라서 기구 운영도 민간 중심으로”(경향, 1971.11.20.), “진흥원은 순수한 민간단체가 되어야 하며, 위원 선정 등에 객관성이 있어야 … 법안대로 주체가 정부인 점은 재고해야”(문학평론가 백철), “순수예술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난점이 많은 것으로 좀 더 광범위하게 규정되어야”(국악인 조상현), “국가에 의한 지원은 창작의 한계를 설정하게 되는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어 자율적 운영 등 기금 사용 방법상 묘를 살려야”(동아, 1974.2.2.) 등등.
또한 문예진흥원은 제1차 「문예중흥5개년계획」의 첫해인 1974년을 결산하는 앙케이트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진흥기금의 혜택으로 무용계가 전례 없는 활기”, “진흥원의 설립 자체가 고무적”, “전 국민의 손때 묻은 돈을 모아 진흥 운동을 한다는 그 자체에 큰 의의” 등 대체로 호의적인 응답들과 함께 “졸속한 전시나 안이한 편승을 경계하고, 질적 내실을 하도록 요청하고, 거시적·중점적 지원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충고하는 의견도 있었다(매일경제, 1975.2.11.). 이에 “창작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경제 조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 창작, 연구, 공연·전시 활동 등 모든 문예중흥사업의 기본 원동력이 되는 것은 바로 「문예진흥기금」”이라는 당시 평가는 당연하였다.

일부 우려 속에서도 문화예술계의 거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를 업고 전개된 문예중흥계획의 핵심 수단이 「문예진흥기금」이었던 것이다. 이후 40여 년 동안 「문예진흥기금」은 ‘문화예술계의 젖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기금 집행의 중앙 편중 지양(동아, 1977.6.15.), 기업인들의 참여(경향, 1977.11.19.), 예술인들의 의견 최대 반영(동아, 1978.12.29.), 정부예산 투입(매일경제, 1983.1.19.)과 같은 과제들의 필요성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끊이지 않고 제기되었다. 장르별 편중 지원, 졸속 및 불공정한 심의, 정부 비판적 예술 지원 배제 등도 오래도록 뜨거운 논란거리였으나, 사회 일반 및 기금 지원 제도의 변화와 함께 지금은 대체로 사그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문예진흥기금」의 완전 고갈이 가시권에 있다. 여기서 잠깐 1961년부터 운영해온 일반 기금 정책을 살펴보면, 기금은 그 규모의 지속적인 확대와 비효율적인 집행, 그리고 해당 부처의 자의적·정치적인 집행이 늘 문제였다. 이에 5공 정부 초창기부터 일반회계예산과 기금의 통합 편성(매일경제, 1980.8.6.), 기금관리법 제정(매일경제, 1982.1.30.)과 같은 계획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기금관리법을 제정하자는 당시 야당과 여러 매체의 지속적인 주장은 정부·여당의 반대 입장(동아, 1989.5.31.)을 10년이나 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1991년 12월31일 「기금관리기본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법은 다시 2007년 1월1일 예산회계법과 합쳐져 「국가재정법」으로 일원화하였다.
재정학 교과서에 따르면 기금의 목적은 원래 정부예산제도의 경직성을 탈피하여 자율성과 탄력성을 확보하는 데 있다. 「문예진흥기금」의 완전 고갈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정부는 문예진흥사업의 경우 기금회계가 아닌 일반회계로 집행하면 그만이라는 입장이다. 결국 문예진흥사업은 굳이 자율성과 탄력성의 원칙하에 별도의 기금으로 추진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문예진흥 재원이 정부의 일반회계로든 기금회계로든 편성만 하면 그만인가? 흑묘(黑猫)든 백묘(白猫)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기능적 실용주의를 여기서 적용해도 되는 것인가?
실은 「문예진흥기금」의 존치 필요성에 대한 기획재정부의 입장은 조금은 어정쩡해 보인다. 지난 2013년 기획재정부는 「문예진흥기금」 존치평가 때 ‘존치 이유가 여전히 유효하며 더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일반회계로 편성해도 된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다른 기금으로 충당해 보라고도 한다. 결국 문예진흥 재원은 정부의 일반회계 예산으로 편성하든, 다른 기금이나 재원을 전출 받아 문예진흥기금화하여 편성하든 무방하다는 입장인 셈이다. 실제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위원회는 체육진흥기금, 관광진흥개발기금, 방송통신발전기금, 경마사업 이익금, 카지노업 순매출액 등으로부터 「문예진흥기금」 재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문예진흥기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일반회계로 대체하는 것만큼은 안 될 말이다. 일반회계는 국회 심의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직접 놓이게 됨으로써 자율과 탄력을 생명으로 하는 문예진흥사업의 특성이 훼손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또한 재원 확보의 예측불가능성과 불안정성으로 인하여 사전 준비, 다년간 계획 수립 등의 절차를 밟아 추진하는 비교적 자잘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들이 큰 차질을 빚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지원기관으로서의 문화예술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을 미약하게 함을 넘어 문예진흥과 문화융성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예술지원기관은 자율성과 책임성이 아울러 보장되어야 하는 ‘팔 길이 기관(arm’s length organization)’으로서 그 재원 또한 ‘팔 길이 예산(arm’s length budget)’이어야 한다.

「문예진흥기금」은 그대로 존치해야 하며,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문예진흥법」 제17조(「문예진흥기금」의 조성) 제①항 제1조의 정부 출연금, 즉 국고의 출연이며, 다른 하나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위원회가 기대하고 있는 다른 기금이나 재원으로부터의 전입이다. 앞엣것은 그 지속성에 의문이 들어 법령상 일정 수준 이상의 출연을 의무화하는 강제 조항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이 국고 출연과 병행하여 다른 기금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