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나는 무용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종합예술로서의 무용언어가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에 매료되어 가끔 그 공연장을 찾는다. ‘김화숙 & 사포현대무용단’의 작품은 김교수와 같은 대학에 적을 두고 있다는 연으로 접하기 시작했지만 내겐 늘 크고 작은 울림을 일으켜왔다. 지난 6월 1일 오후 5시 전주 소리문화의 전당 연지홀에서 공연된 ‘사포’의 정기공연 『우리는 사랑했을까…』*도 그러한 작품 중 하나였다.
무용언어는 내가 느끼기에 가장 원시적인 혹은 가장 상징적인 몸의 언어다. 말 이전의 언어, 그래서 잘 정제된 이 상징적 몸의 언어는 그 환기력이 클수록 좋은 작품일 것이다. 김화숙 교수의 이번 작품은 그런 측면에서 빼어난 수작임에 틀림없다. 이미지로 말하는 이 작품은 한 편의 잘 다듬어진 시처럼 역동적인 상상력을 가동시키면서 관객에게 큰 울림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나는 이 공연을 통해 내가 읽어낸 메시지들과 내 안에 일어난 그 주관적인 울림들을 자유로운 형식으로 말해보고자 한다.

작품의 주제
‘우리는 사랑했을까?’ 제목부터 작가는 사랑, 그 덧없음에 대해 시사하며 다음과 같이 작품의도를 밝히고 있다.
“진정한 사랑은 비밀의 문안에 박제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본 작품은 삶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면서 ‘사랑’을 춤추고자 한다.”
작가는 그를 위해 네 개의 사랑이야기를, 바람 소리, 어둠, 하얀 달 이미지와 연결시켜 형상화시켜 보여준다. 아득한 사랑의 기억, 절망뿐인 사랑, 애달픈 사랑, 현실적인 사랑이야기가 그 네 개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보편적인 사랑의 경험에 호소한다. 사랑의 경험, 그것이 주는 설렘, 행복, 갈등과 안타까움, 상처와 절망, 회한과 그리움 등등. 무용수들은 때론 아련하게 때론 애잔하게 때론 절망적인 몸짓으로 그 다양한 감정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하며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연출가(김 교수)는 그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진정한 사랑의 본질이 뭔지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사랑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덧없는 감정의 유희인가? 어떠한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그 주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세부적으로 따라가 보기 전에 무용수들이 움직이는 공간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먼저 짚어보자.

공간
이 작품 속 기본 공간은 기실 어둠이다. 무대 위의 어둠. 그것은 사실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다. 많은 것을 말하는, 많은 것을 내포하는, 많은 움직임이 저 심연에서 꿈틀거리는 태초의 공간 같은 어둠이다. 이 익명 상태의 공간은 배경음악과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조명에 의해 끊임없이 다른 모습을 띠며 변화해간다. 그 어둠은 때론 아련한 꿈의 공간처럼 혹은 모태공간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때론 절망의 바윗덩이처럼 우리를 압박하고 때론 번개 치는 밤하늘처럼 분열한다. 때론 미묘한 음영의 뉘앙스가 만들어지며 바람이 일렁이는 숲속이 되기도 하고 때론 깊은 바다 속 심연 혹은 우주공간의 카오스를 연상시키기도 하며 때론 전체의 어둠 속에 몇 개의 빛의 문이 만들어지며 주인공이 갇힌 내적공간이 형상화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주인공들의 내면공간의 어둠을 형상화하는 듯한 이 어두운 무대에서 조명은 특별한 기능을 한다. 특히 무용수가 마치 그 어둠의 일부인 것처럼 검은 의상을 입고 그림자처럼 움직일 때 한 줄기 빛이 무용수의 머리 위에 떨어지며 어둠 속에 감춰진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이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 순간 그 한 줄기 빛은 무용수의 인식의 빛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그 시각적 영상 하나만으로도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한 컷의 예술사진이 되지 않는가.

음악, 무용수들의 내면언어
사포의 공연을 볼 때마다 내가 매번 감탄하는 것 중 하나가 음악선곡이다. 어쩌면 저렇게 표현하려는 주제와 딱 어우러지는 음악인가. 가끔은 음악이 영감을 주어 탄생된 작품들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김화숙 교수의 음악적 선곡은 매우 탁월하다. 그의 작품에선 무용수들이 음악에 맞춰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몸짓 자체가 음표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이번 공연도 프롤로그에서 용재 오닐 연주의 「Durante-Preghiera」부터 에필로그에서 2 Cellos의 「The Resistance」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사포의 무대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다. 거기서 음악은 무용수들의 호흡이요, 그들의 내면언어다. 무용수들의 몸짓은 마치 음악 자체의 몸짓인 것처럼 느껴진다.

프롤로그
꿈속 공간 같은 어두운 무대. 용재 오닐 연주의 「Durante-Preghiera」, 그 서정적이고 애절한 현들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면 약간의 빛 속에 그림자처럼 등장한 남자무용수와 두 여자무용수가 몽환적인 프롤로그를 펼쳐 보인다. 무용수들은 마치 망각의 어둠 속에 파묻혀버린 사랑의 기억을 꿈결에 더듬어 찾듯 환영처럼 움직이는데 그 모습은 온전한 실체라기보다는 실루엣에 가깝다. 망각 속에 잠긴 기억의 몸들을 형상화하듯 포개진 세 무용수들의 몸이 꿈결에 뒤척이다 의식의 수면으로 잠시 떠오른 기억의 잔영들처럼 하나씩 일어난다. 그리곤 잠시 빛 속에 떠올랐다가 곧 사라지고 만다. 몽유병환자처럼 안타깝고 덧없는 몸짓이다. 비단 사라져버린 사랑의 기억만이 그처럼 안타까우랴?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시간에 대한 기억이 다 그러하리라.
이 프롤로그에서 세 무용수가 표현한 그 안타까운 내면의 말들을 나는 내가 이해한 대로 다음과 같이 시 형식으로 옮겨보았다.

굳게 닫혀있던 너에 대한 기억의 성벽
조심스레 그 문 열고 들어가 보니
강 저편에서 누군가 나 부르는 듯
거기 방금 네 그림자 스쳐지나간 듯
어둠에 길들여진 내 눈과 귀
한껏 열어젖혀 그 속 파헤쳐 봐도
자꾸 시야를 가로막는 이 어둠
마음의 눈 덮어 가리는 이 장막
가뭇없이 사라지고 마는 너의 환영
아프다 사랑이여 나를 돌아봐다오

내 온몸 온 혼 흔들어놓는 이 거센 바람
되살아난 사랑의 기억이 나를 흔들어놓는구나
너는 분명 거기 내 앞에 있으나
손 뻗어 붙잡아 보려 해도 잡히지 않는구나
사랑이여 나를 건져내다오 이 어둠 속에서
나를 가두고 있는 이 감옥 이 벽
아무리 두들겨 봐도
꿈쩍도 않는 이 바윗덩이 무덤
가위눌림 같은 이 장벽
사랑이여 제발 나를 여기서 꺼내다오

프롤로그에서 그렇게 시작된 사랑이야기는 네 가지 무대로 형상화된다. 그 첫 이야기는 아득한 사랑의 기억을 표현하는 무대로 ‘바람의 소리“ 이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이미지 1. 바람의 소리(음악: Kodaly, 무반주 첼로 소나타 Op 8. ‘Sonatina’)
연출가는 7명의 무희들의 군무로 표현되는 이 무대가 바람소리 이미지를 통해 아득한 사랑의 기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고 팸플릿에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군무에서 내가 느낀 지배적인 이미지는 무엇보다 물결이미지다. 사실 나는 이번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가 다양한 물의 이미지라고 봤다. 하지만 두 개의 이미지는 기실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 바람과 물결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함께 작동한다. 바람의 일렁임, 파도의 일렁임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군무 속에서 무용수들의 이미지는 아프로디테의 실루엣을 떠올린다. 그들의 몸을 감싸며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흰 너울 같은 드레스들의 출렁임, 그 선이 형상화하는 움직임은 다양한 물결 이미지다. 출렁이거나 회오리치거나 혹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일렁이는 물결 이미지. 멀리서 전체를 보면 고요해 보이는 호수도 가까이 다가가보면 그 수면에 다양한 물의 움직임이 있듯이 군무의 큰 일렁임 속에서도 개별적인 몸짓과 움직임의 작은 파문들이 잠시 일다가 사라지곤 한다.

구도의 대비와 중심 이미지
작품 전체에서 군무는 두 번 나오는데 그 움직임과 구도가 solo, duet, trio 등의 그것과 대비를 이룬다. 개인적 몸짓들은 대체로 강렬하고 격렬하고 단속적인 감정의 소용돌이를 표현하고 있다면 군무는 하나 된 움직임 안에 개개인의 몸짓의 단속성 또한 포용하며 하나하나의 몸짓이 전체적 연결 선상에 있음을 보여주는 구도를 띤다.
그러한 구도 속에서 개별적인 움직임은 여러 가지 물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때론 수면에 스치는 바람의 입김에 이는 파문처럼, 때론 기억의 호수에 물수제비뜨기 하듯 던져진 누군가에 대한 기억의 돌멩이가 일으킨 파문처럼, 작고 큰 파문이 일어나 각각 나름의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간다. 잠시 서로의 파장이 마주치는 듯하다가 결국 각자 제 파장만큼만 퍼져나갔다 소멸되어 하나로 돌아가는 움직임. 개체의 외로운 몸짓들은 각자의 동심원 안에서 맴돌지만 그러나 결국 전체의 움직임 속에 용해되어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
이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형상화하는 이미지는 아마도 이렇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거센 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는 몸들
어둠 속에서 떨어지고 흩날리는 낙엽 같은 기억의 편린들, 삶의 파편들
떨어지며 하나씩 회오리로 흔들리다 사라져간다
하나하나 그렇게 사라져간다.

이미지 2. 그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음악: 피아졸라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계 중 ‘가을’)
1. 절망뿐인 사랑을 표현하는 이 무대는 세 파트로 나눠진다. 그중 단연 압권은 첫 부분 남성 무용수의 솔로 파트다. 전체의 어둠 속 한복판에 작은 빛의 문이 만들어지면서 그 빛의 사각틀 속에 남자무용수가 등장한다. 이때 빛의 사각틀은 그가 갇혀 있는 감옥, 폐쇄적 내적 공간을 형상화하는 듯하다. 거기 그림자처럼 갇힌 남자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