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사진가 김아타(57)씨가 몇 년 전부터 몰두하고 있는 ‘드로잉 오브 네이처(Drawing of Nature)’는 ‘자연이 스스로 그린 그림’이라 풀 수 있다. 세계 주요 도시와 지점에 대형 화폭을 일정 시간 이상 설치하는 게 핵심이다. 땅 속이나 바다 밑에 묻기도 한다. 이 캔버스는 인간의 간섭 없이 바람과 구름과 비와 눈, 즉 자연과 환경의 변화만으로 제 몸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지구 곳곳에 사과나무를 심듯 캔버스를 심는 것이다. 나무에 사과가 달리듯 그림은 자연이 저절로 그려주게 된다.
지난 달 27일, 김아타 씨가 새롭게 개척한 이 ‘드로잉 오브 네이처’는 역사의 현장을 화실 삼았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동막 사격장’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돌아가는 장병들이 트럭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신록 속에 알록달록 전투복이 눈에 강렬하다. 한창 때 청년들이 젊음을 바쳐 지키는 이 강산의 한여름이 너무 쨍해 눈에 물기가 어렸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예순 해. 정전 60주년을 돌아보는 그의 작업은 일단 멈춤한 전쟁의 포연 속에 펼쳐졌다. 대전차포가 내뿜은 포탄이 날아가 박힌 상흔의 소묘다. 800m 떨어진 야산에 설치된 초대형 캔버스에 포가 날아가 구멍을 내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기이하면서도 아픈 경험이었다. 몸 안의 내장을 뒤흔들고 머리를 띵 하게 만드는 엄청난 굉음의 전차포는 적의 전차를 향해 날아가며 천 갈래 만 갈래 생각을 전파시켰다. 사격이 이어지면서 갈가리 찢어지는 캔버스는 이 땅의 아픔, 이 나라 사람들의 고뇌를 대리했다.
정전(停戰), 문자 그대로 전쟁 행위를 협약에 의해 멈추고 있는 한반도의 오늘은 어언 60년이 흘렀건만 큰 변화가 없다. 남북의 대치는 1953년 7월27일 이후 요지부동이다. 자연을 향해 발사되는 수십 발의 포탄은 결국 우리 가슴으로 날아오는 전쟁의 예고와도 같았다. 김아타 씨는 “한반도에 있으니까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다. 오전과 오후, 사격 훈련이 끝나면 저 산을 기어올라 캔버스를 걷어오는데 온전하게 처음 내건 캔버스 모습은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수거한 캔버스를 파주 작업실로 가져가 조각조각 파편을 기우고, 땜질하고, 이어가며 작품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김아타 씨에겐 일종의 명상과 수련의 시간이다.
한 땀 한 땀 그 찢어진 캔버스를 매만질 때마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공감한다. 40여 점 ‘포탄’ 드로잉은 그가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는 거울이다. 그는 “자연 채집이 내가 작가로 살아온 30년을 반성하게 만든다”고 했다. 캔버스에 뭔가 그려서 일궈온 서양미술사의 완강한 틀을 이 ‘드로잉 오브 네이처’로 깨고 싶다고 했다.
김아타 씨는 “나 이제 카메라를 버렸노라”고 했다. 사진가 말고 그냥 아티스트라 불러 달라 했다. 동막 사격장 포연 속에 서 있는 작가의 모습은 한여름 더위를 서늘하게 만들 만큼 숙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