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살롱

한국의 무대미술처럼 온갖 풍상을 견뎌낸 예술이 또 있을까. 무엇보다 무대미술은 순수미술이라고 해도 독립된 예술이 아니다. 마당쇠나 마름의 예술이다. 제작과정에서는 희곡작가와 연출가의 지시를 받고 공연과정에서는 배우의 연기에 봉사해야 한다. 어쩌다가 독재적인 제작자나 연출가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무대미술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로 전락한다.
우리는 이따금 한국의 궁중극장과 민속연희장에서 최고의 공간적 형식과 미학을 발견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개화기의 한국연극에서 무대미술은 간판 그리기와 비슷한 것이었다. 천조가리에 어디서 본 듯한 풍경을 하나 그려서 내걸면 그것으로 무대미술은 끝났다. 일본에서 서양식 무대미술의 개념이 들어왔어도 처음에는 그림그리기 수준을 맴돌았고 그런 개념을 알고 있더라도 제작비가 없어서 그대로 실천하기가 어려웠다. 서양식 사실주의와 양식주의를 실천하게 된 것은 해방 이후라고 해야 한다.
김정환과 장종선이 그 시기의 개척자이다. 김정환이 사실주의에서 양식주의로 시야를 확장했다고 하면 장종선은 양식주의로 일생을 마쳤다. 이들의 후배로서 한국적 무대미술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 최연호이다. 그는 다작을 하는 한편으로 나름대로 한국적 공간, 선, 색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상호문화적 시대에 들어와서 무대미술에서 제 역할을 수행한 사람은 이병복이다. 그녀는 서양에 유학하여 본 고장의 무대미술을 공부한 한국최초의 무대미술가로서 서양과 한국의 공간과 미학을 결합하고 충돌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한국 무대미술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이병복은 지난달부터 아르코 미술관에서 자신의 연극인생과 무대미술 작업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이병복, 3막 3장」이라는 제목으로 열고 있다. 그녀의 3막 3장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시기적으로는 불란서에서의 수업 시기, 극단 자유의 대표 시기, 무대미술가로서의 시기로 구분할 수 있지만 전시회는 갤러리1과 갤러리2로 섹션을 구분하여 그녀의 인생과 예술을 소개하고 있다. 말하자면 갤러리1은 ‘이병복과 사람들’, ‘연극인생’, ‘이병복의 작업노트’를 자료적으로 전시하고 갤러리2는 직접 그녀가 제작한 과거와 오늘의 무대장치와 의상을 전시하고 있다.
갤러리1에서 핵심적인 것은 극단 자유의 연극활동과 관련된 포스터, 리플렛, 전단, 공연사진 등의 자료이다. 이병복은 1950년대 초 파리에서 조각과 의상을 공부하고 귀국한 후에 극단 자유의 대표를 맡아서 ‘카페 테아트르’를 열고 문화상호적 연극을 제작하여 세계의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하는 등 전천후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런 자료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유럽에서의 공연성과를 증거하는 현지신문의 기사가 아니라 카페 테아트르의 폐쇄를 알리는 영업정지명령서라는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안타깝다.
갤러리2는 무대미술가 이병복의 인생과 예술이 응축적으로 녹아있는 공간인 것 같아서 성스럽기까지 하다. 헝겊, 종이, 새끼줄 등 한국적 소재로 제작된 무대의상과 가면은 더 할 수 없을 만큼 인간적 품격과 깊이를 느끼게 하며 특별히 옮겨놓은 작업실은 그녀의 고통과 안식을 동시에 보여준다. 아쉽게 생각한 것은 정녕 그녀의 예술관과 무대미술이 영구적으로 계승되고 보관될 수 있는 길은 없는가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