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2012년 말, 한 행사장에서 잠깐 다녔던 서울예고시절 단짝이었던 성재를 만났다. 아니, 그 친구가 행사초청인의 한 사람으로 온다기에 대기실을 찾아간 것이 더 정확하다.
내가 한국에 돌아오기는 1996년 10월이었지만, 20여 년 만에 한국에서 동창을 만난 건 두 어 건 밖에 안 된다. 그것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로비에서 인파에 치여 스치듯 말이다. 이번에 만난 친구는 나와 함께 작곡과를 다녔고 학창시절 땐 꽤나 잘도 붙어 다닌 친구였다. 방학 때 잠깐씩 한국에 들어왔긴 했지만, 입시로 예민해져가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왠지 폐가 될 것 같아 고2때 학교를 한 번 방문한 이후로 초, 중, 고 친구들과의 연락을 아예 끊고 살았다. 졸업 후에라도 누구는 재수를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기 때문에 연락을 안하다보니 아예 잊고 산 것이다.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제일 먼저 근황을 듣게 된 것이 바로 함께 작곡과를 다니던 성재였다. 한때 밤마다 즐겨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재즈 연주자로 소개가 되어 그의 근황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된 것이다. 막상 만나면 굉장히 반가워할 줄 알았는데 자기 연주 순서를 기다려서 그런지 의외로 차분한 그 친구가 좀 섭섭하기도 했다. 하지만, 행사의 성격상, 연주에 앞서 자신의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관객 중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내 생각만 했던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상대방을 너무 배려한 나머지 연락할 기회를 여러 번 놓치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5월과 6월은 서울예고 개교 60주년으로 기념 무용제와 음악회가 각각 5월6일과 27일에 예술의전당 내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에서 거행됐다. 그 사이 5월18~26일에는 미술과 출신 동문 전시회 또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반쪽짜리라도 동문은 동문이라고, 예고 무용과 공연에 김순정 교수께서 챙겨주셔서 어머니와 함께 2층 귀빈석에 앉아 관람할 수 있었다. 참고로 김순정 교수는 내가 1985년 임성남발레학원을 다녔을 적 고(故) 임성남 선생과 번갈아가며 우리들을 가르치던 교사이기도하다. 전시회는 참석 하질 못했다. 무용과 음악에 비해서 관심이 적어서였을 수는 있지만, 나도 모르게 이번 기회를 통해 친구들을 만나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무용과와 음악과 행사에 더 컸던 것이다.
개교기념 공연의 개막을 알린 무용과 공연에는 무용과 학생뿐만 아니라 음악과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다. 프로그램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공연장에 들어와 관람했던 관계로 첫 막을 장식한 발레 『백조의 호수』의 반주는 서울예고 1학년생으로만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맡았는데 졸업생 오케스트라인 줄 알았을 정도로 완벽한 선율을 이루었다. 주역은 졸업생들이 맡았고 코르 드 발레는 동문과 재학생들이 함께 맡았다. 그렇지만 재학생과 졸업생의 기량이 조화를 이루며 완벽을 기했다. 특히, 멀리서 볼수록 가장 눈에 잘 띄는 코르 드 발레의 정확성은 유수의 성인 발레단 버금갈 정도였다 확신한다. 오죽하면 발레가 끝나고 현대무용과가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한 남학생이 암전 속에서 “야, 무용도 재미있네!”라는 말에 내가 다 뿌듯함을 느꼈을까. 2부는 동문들의 안무작품들로 이루어졌다.
첫 막은 주름종이를 오브제로 사용해 독특한 무대를 선보인 차진엽의 『로튼 애플(Rotten Apple)』과 빛의 이미지가 인상적인 이혜원 안무의 『결정적 순간』이, 한국춤 무대에서는 직접 안무와 출연한 김향금의 독무 『비천무』, 까망 빌로드 저고리에 오색 치마가 어우러진 정혜진의 『장고춤』과 전통춤을 응용한 윤성주의 『신명』 그리고 피날레를 장식한 마혜일의 『새의 향연』이 공연되었는데, 여건상 발레작품 외에는 모두 녹음 음악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예고 무용과 동창은 당시 유일한 무용과 곱슬머리의 광민이라는 친구 한 명뿐이다. 그렇지만 제대로 말을 해 본 적은 없다. 그 친구 자체도 조용하고 온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광주시립발레단에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바로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예고 입시를 준비하기 시작하던 중학교 2학년, 나도 강남으로 피아노와 발레를 배우러 다닌 기억이 난다. 진흥아파트 길 건너에 있던 임성남발레학원에서였는데, 그곳에서 남자는 나와 역시 서울예고 무용과를 준비하던 진만 이라는 중3 형이 있었다. 도착하는 시간은 서로 달랐어도 집으로 가는 시간은 거의 같이 다녔다. 당시 마이클 잭슨이 한창 유행할 때 TV를 보며 춤을 따라하던 아들을 본 어머니께서 예술 쪽으로 방향을 선도 (?)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임성남 선생께 보낸 것이다. 나의 경우는 음악을 하기위해 발레를 배운 것인데, 당시 교장이셨던 고(故) 정우현 선생께서 작곡을 하다가 나중에 지휘까지 하려면 펜싱이나 발레를 가르치라고 어머니께 조언을 하셔서 주중에 여의도에서 반포까지 피아노 레슨도 버거운 마당에 토요일 오후마다 발레 수업까지 받으러 68번 버스를 타고 다녔다.
진만이 형은 발레와는 무관한 외모와는 달리 감성이 풍부해 연습 중간 중간이나 버스정류장으로 갈 땐 나에게 조근 조근 좋은 이야기도 많이 해주고 자기가 좋은 문구가 있는 서적을 가져와서 보여주곤 했었는데, 나는 그 형에게 비하면 그다지 마음 문을 열지 않았다. 여의도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은 이해할 법한 일인데, 같은 곳에서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 이어 고등학교까지 20여 년을 살게 되면 자연히 섬나라 사람 기질이 생겨나서 외부인들의 접근이 어렵다는 것을 여의도를 벗어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서울예고에 입학한 후 교정에서 만났던 진만이 형은 다른 과에 비해 특히 매서웠던 무용과 남자 상급생들과는 달리, 그들 옆에서 방관하는 듯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예고 남자학생들은 소수민족(?)에 불과해서 남자 선후배의 각별한 친분을 도모하기 위해 어디서 만나더라도 하급생은 상급생에게 90도 각도로 인사해야했다. 체벌 신고식도 있었고, 교정 뒤 개울에 빠뜨리는 과정도 있었지만, 고3에 재학 중인 둘째 누나 때문인지 이 모든 신고식이 나와는 무관했다.
같은 음악과 남자 상급생보다 무용과 남자 상급생들이 훨씬 매서웠는데, 진만이 형은 나와의 친분 때문에 차마 그러지 못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학교에 제대로 적응을 못해 방황을 했다는 사실을 지난달 크리틱스 초이스가 있던 대극장 로비에서 김예림 씨로 부터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분도 나와 같은 동급생이다. 어릴 때 이미 기본기를 끝내고 테크닉을 다져야 할 시기에 발레를 시작해 다른 친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니 실기로나, 교우와의 관계에서나 적응이 힘들었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성적표는 숨길 순 있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실기가 학생의 가치와 평으로 결정되는 특수학교가 일반학교보다 못한 점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순수하게 접했던 춤이 이러한 추억 때문에 춤을 멀어지게 만들지는 않았을지…, 그 형의 연락처가 궁금하다.
음악과와 무용과 두 개를 뗄 수 없는 독특한 인연 때문에 5월27일 음악과 연주회 역시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내가 답례로 김순정 선생을 초대하는 형식이었다. 음악과 연주는 첫 막을 재학생 오케스트라가 재학생들과 동문들로 구성한 합창단과 함께 연주했다. 2부에는 동문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가 등장했는데, 호른을 전공한 동창 석준과 바이올린에서 비올라로 전환한 경환이가 보여 반가웠다. 그렇지만 성인으로 변한 동창들을 알아보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에 합창단석이나 객석에는 누가 앉아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내 모습을 알아 볼 수는 있을런지, 연주회의 감동과 더불어 아쉬움의 만감이 교차된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연주회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TV에도 얼굴을 보이는 첼로를 전공한 규식이도 지난 4월에 한 자선 콘서트에서 만난 적이 있다. 우리 회사건물 1층에 못 보던 포스터들이 붙어있어 자세히 보니 그였다. 사회복지재단에서 주최하는 미혼모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 광고인데, 연예인인 부인이 사회를 맡아 함께 출연하는 콘서트였다. 이 재단을 후원하시는 1층 사장님으로부터 입장권을 선물 받아 연주 후 이루어진 사인회에서 재회하게 됐다. 수 년 전에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도 개인 독주회가 끝난 후 로비에서 만나 명함을 주었는데, 잃어버려 연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4명의 남자 음악과 동창중 네 명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연속 재회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11명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지에서 확대되어 여자 동창들도 궁금해진다. 요새는 세상이 좋아져서 페이스북만 검색해도 나올법한데, 나만 해도 드러내는 것이 싫어 실명을 쓰지 않고 커버사진에 얼굴사진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이름이 흔할수록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페이스북에서 ‘파도타기’만 해도 심심치 않게 동창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동창 전원을 찾아 낼 수는 없지만, 연락줄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모두의 행방을 찾지는 못했지만 대부분은 결혼했고, 지방에서 살거나 외국에서 활동하는 친구도 있다. 그리고 남자들은 변함없이 연주생활을 계속하고 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