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숭문화광장

지난 6월 8일 화가 송수남 씨가 타계했다. 송 화백은 1980년대 수묵화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수묵화 운동은 미술계 한편에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일정 부분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송 화백이 한국화가 큰 위기를 맞고 있으며 대대적인 변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국내 미술계에서 서양화가 각광을 받았던 반면, 한국화 또는 동양화는 급속히 하향 곡선을 그리던 시기였다. 전시회를 열면 서양화는 상대적으로 잘 팔렸지만 한국화는 판매 부진에 허덕이기 십상이었다. 한국 미술의 본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한국화가, 동양화가들은 크게 낙망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시점에 송수남 화백이 한국화의 현대화가 필요하다고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안팎의 세월이 흐른 현 시점에서 한국화의 여건을 살펴보면 그때보다 더 악화된 느낌을 받는다. 최근 만난 한 화가는 국내에 한국화가로서 그림이 제대로 팔리는 작가는 손으로 꼽을 정도라고 사정을 전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탓에 그림 수요가 줄어든 이유도 있을 듯하다. 하지만 우리 국민소득은 지금이 1980. 90년대보다 훨씬 높아 불황만 탓하기는 힘들다.
그는 요즘 주거 환경으로 인해 한국화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파트 등 서구화된 실내에 흑백 톤의 단조로운 한국화는 잘 어울리지 않아 사람들이 그림 걸기를 꺼린다는 얘기다. 화가들도 미술품 구매자들의 입맛에 맞출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전처럼 수묵을 이용한 산수화 풍의 그림들은 별로 그리지 않는다. 대신 채색을 이용한 그림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 정도라면 한국화의 위기는 더 이상 일시적 불황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화 자체의 생명력이 위협 받고 있는 상황이나 다름없다. 이 말을 들으면서 전통예술의 위기가 어찌 미술 하나뿐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 국악과에 재직 중인 한 교수로부터 “제자들이 3, 4학년이 되면 복수전공을 통해 국악 쪽을 사실상 포기하고 취업이 가능한 분야로 전공을 바꾼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국악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바로 실업 상태에 빠진다는 말도 했다.
전국 22개 대학의 국악과에서는 해마다 900명 정도의 졸업생이 배출된다. 그리 많지 않은 숫자인데도 이들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다. 일부만 공연단체에 취직하고 나머지는 시간강사 등 비정규직으로 가거나 실업자가 된다. 장래가 불안하니 국악 지망생도 줄어들고 있다. 지방대학에서는 문을 닫는 학과들도 나타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쪽도 궁지에 몰려 있다. 지난해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나 전수조교가 없는 종목이 전체 116개 가운데 27.6%인 32개에 이른다. 무형문화재의 대(代)가 끊기고 있는 것은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더라도 생활 자체가 어려운 탓이 크다. 보유자에 대해 정부가 지급하는 지원금은 최대 월 130만원에 불과하고 전수조교에게는 월 70만원, 전수 장학생에게는 월 20만원이 주어지고 있다.
무형문화재는 오랜 기간 고된 훈련을 통해 길러지므로 금전적 보상 이전에 사명감이 필요한 분야이기는 해도 사회적으로 무형문화재를 높이 평가하는 풍토가 갈수록 사라지고 있어 단절을 더욱 부채질 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태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전통예술과 전통문화는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
전통예술이 현대적인 문화에 밀려 위협받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우리나라는 특히 심한 듯하다. 지난 5월 일본 도쿄의 가부키 극장이 재개관했을 때 공영방송인 NHK의 밤 9시 뉴스는 프로그램 맨 앞에 생방송으로 현장을 연결했다. 가부키는 일본 전통예술의 상징 같은 존재다. 이 극장은 2010년 노후화되어 문은 닫은 뒤 가부키극장을 운영하는 회사가 5000억 원을 투입해 최고의 자재와 기술로 재건했다. 일본인들도 가부키 극장 재개관에 열렬한 반응을 보였다. NHK가 생중계로 이 소식을 전한 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이 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KBS 같은 공영방송이 9시 뉴스 앞머리에 전통예술 뉴스를 전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처럼 각국은 국가의 정체성 수호 차원에서 전통예술을 적극 지원하고 배려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가 예산을 들여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전통예술이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선진국일수록 국민들이 전통예술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성향도 두드러진다. 국민들이 전통예술을 자주 찾고 관람해야 수요가 만들어지고 이 분야를 택한 젊은 세대에게도 일할 기회가 많아진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통예술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점차 옅어지고 있는 것이 가장 걱정스럽다.
우리가 TV드라마나 대중가요 등에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해외에 선보이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전통예술과 문화를 잘 보존하고 더 발전시키는 일도 필요하다. 한류가 소재 면에서 다양해지고 양식 면에서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전통예술로부터 채택해야 할 것들이 많다. 전통예술이 활성화되면 한류 역시 더 발전할 수 있다. 전통예술과 한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국민들이 전통예술을 더 사랑하는 자세를 보인다면 전통예술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 전통예술인들도 국민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량을 선보여야 한다. 수 십 년 뒤 전통예술의 단절에 우리 모두가 땅을 치며 후회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