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너, 원래 공연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는 거였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짜여진 것처럼 보였어. 그런데 안무서웠어, 높이 뛰는 거?”
로테르담 극장에서 다음 공연을 기다리면서 안면이 없던 사람들이 물어온다. 사실은 이런 질문에 익숙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부끄러운 것이 정말 많은 사람이라는 거 모르는 사람들에겐 천연덕스럽게 역할을 마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가스통 위에 널판지를 대고 균형을 잡는 것으로 내러티브가 형성되는 인익스트리미스트 극단(Cirque Inextremiste)의 『첨단(Extr릑it럖)』(2011)에서 우연히 관객으로서 공연에 참여한 후, 나를 본 사람들의 반응이다. 서커스 페스티벌(Circusstad) 관계자와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 말고도 일반 관객들도 말을 건넨다. 직선적이고 숨김없는 성격의 소유자들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로테르담 스타일 그대로다.
휠체어를 타고도 널판지와 가스통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잡던 레미(R럐i Lecocq)가 나를 쳐다보지 않았던들, 그가 간곡히 자신의 벗겨진 신발을 다시 신겨달라고 심각한 눈빛으로 청하지 않았던들, 내 주변엔 아이들만 있지 않았던들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무대 위로 나가기까지 얼마나 뜸을 들였는지는 핀란드에서 온, 거의 매번 옆자리 앉았던 사라(Sara Nyberg)가 이해한다. 한참 후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 자신은 안경을 쓰고 가방을 안고 앉아 있었기에 다행히 선택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좋은 자리가 비어있을 땐 다음부터 좀 생각해보고 앉아야겠다고 농담을 해주었다. 그런 사라는 당황해 웃는 나를 보고, 어서 나가라고 부추기면서 나의 숨겨졌던 성격을 근접한 거리에서 목격했다. 하지만 그 말고는 거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듯한 나의 부끄러움. 그냥 웃으며 질문을 받아친다.
“물론 짜여진 건 아니지. 나도 나를 지목해서 당황했다니까. 하지만 난 원래 두려움이라곤 없는 사람이야. 무서운 거, 힘든 거, 아주 좋아하지. 게다가 튼튼하고.”
레미의 신발을 신겨주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는 줄 알았던 나는, 바로 극단의 리더격인 얀(Yann Ecauvre)과 사적인 대화를 하게 된다.
“안녕, 나는 얀. 춤 출줄 알아요? 난 남자고 당신은 여자니까, 리드하는대로 하면 되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커플로 춤을 추다가 몇 발자국 걸은 후 내 뒷발에 걸린 것은 바로 그 널판지. 얀은 웃으며 여기서 끝나지 않고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속삭인다.
“그냥 내려다 보지 말고, 나를 쳐다보면 되요.”
판단을 할 새가 없이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었다. 그들이 하던 높이 그대로 그 속도 그대로 나는 가스통을 가운데 두고 널판지 위에서 얀과 함께 뛰어 오른다. 관객석에서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런 속도와 높이쯤이야. 내가 정말 무서운 건 외부의 시선인데, 춤이건 이런 스턴트건 간에 그 안에 있으면 그런 건 전혀 감지되지 않고, 어느 덧 그냥 아이가 되어 상태를 즐기게 된다. 영원했으면 좋겠는 순간. 아쉽게도 그 시간이 길지는 않다.
컨템포러리 서커스는 지금 연극과 무용이 한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관객과의 연계가 한층 더 발달되어 있는 예술이었고, 거의 매 공연이 관객을 무대 위에 등장시킨다. 극단 사세크리파(Cie Sac럎ripa)의 물체극보다 훨씬 물체극스러운 추상적 저글링을 선보인 「뷰(VU)」(2012)에서처럼 에티엔(긲ienne Manceau)의 시선을 애써 피하지 않은들, 한국의 마당극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는 리안드레(Leandre Ribera, Cia Leandre)의 「노세(No s?」(2013)에서처럼 아예 가시거리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앉지 않은들, 관객의 단발적이고 우연한 공연 참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흔한 일이다. 아주 아팠던 봄에 대한 보상치고는 참 근사하다. 이미 「언팩디아츠(unpack the arts)」라는 유럽연합의 문화 프로젝트에 필자로 초대 받았던 것 자체로 충분했는데, 이런 기억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암스테르담 공항에 도착한 날은, 네덜란드에서 여왕의 날이자 새로운 국왕이 어머니께 왕위를 물려받는 날이었다. 온통 국가 상징색인 오렌지색으로 온 나라가 요란했다. 나를 위한 것은 아닐 테지만, 누군가 나를 기다리고 환영하는듯한 느낌을 누릴 수 있었다. 로테르담의 일정을 마치고 새 아파트를 구하는 대신 대안으로 하게 된 런던 행은 페스티벌의 배려로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었다. 런던에 도착한 늦은 저녁 다음 날은 연휴 이후 월요일 하루를 더 쉬는 관례에 의해 생긴 뱅크홀리데이로, 일요일이지만 토요일처럼 여유로왔다. 일요일을, 아니 토요일을 하루 더 받은 셈이었다.
베를린에서 소식통을 통해 전달받은 이메일에서 궁금했던 세미나들과 행사들이 포진해 있는 달인데다, 서커스 페스티발의 원고와 다음달 컨퍼런스 원고를 써야하는 시기여서 런던에 오게 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처음 행선지는 연극학교로 특성화 된 왕립CSSD(Royal Central School of Speech and Drama). 최근 관객 연계 공연 개발로 활발히 연구 및 후학 양성에 매진하는 헬렌 니콜슨(Helen Nicholson)과 응용연극(applied theatre)의 핵심 연구자가운데 하나인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의 세미나다.
강연 장소에는 학교 학생들 이외에도 인기 저자인 제임스 톰슨과 공부하고 싶어하는 석사 졸업자들이 여럿 와 있었다. 공연을 통해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는 헬렌과 이미 세계 여러 곳, 특히 오지 마을에 연극을 가져가본 적이 있는 제임스의 이야기는 연극이 사회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직접 경험한 공연예술과는 다른 거리가 느껴지는 경험이었다.
바로 다음 주 새로운 교직원들의 대거 영입으로 과거의 명예를 누리고 싶은 미들섹스 대학(Middlesex University)에서는 최근 미국 템플대(Temple University)로 교편을 옮긴 댄스리서치 학술지 편집장이자 무용사가, 무용사회학자인 마크 프랑코(Mark Franko)를 초빙교수로 영입했다. 그 첫 번째 행사는 그와 함께 이틀간 집중해서 위르겐 하버마스(J웦gen Habermas), 샹탈 무페(Chantal Mouffe) 등의 원서를 읽고, 빌 티 존스와 아나 할프린의 비디오를 보면서 관객 연개와 안무에 대한 세미나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 꼬박 6시간이 되는 세미나 시간은 애매한 독일어식 영어 번역문에 기인한 여러 의미에 대한 추측, 비디오 감상에 토론을 더해 의견 개진 시간이 모자란 판이었다. 원래 뭔가 영감을 얻기를 기대하고 왔기 때문일까, 아는 것이나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은 즐거웠지만 하지만 어려운 텍스트나 영어로 안되는 설명을 더 길게 하는 과정 보다는 21세기에 20세기를 반추한다는 사실이 그 시간을 가끔 길게 늘여버렸다.
마크와 짧은 인사를 나눈 후 다음날 향한 곳은 퀸메리대학(Queen Mary University)의 연극학과와 IFTR(International Federation of Theatre Research)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연극학회 중 하나인 타프라(TaPRA - Theatre and Performance Research Association)의 철학분과가 함께하는 “상서로운 경험(Mystic Experience)”에 관한 컨퍼런스였다. 무언가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열심히 설명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경이롭다. 하지만, 이론에는 항상 틈새가 있고 또한 철학의 해석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을 구분하는 눈과 귀가 생기기까지는 한참이 걸렸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테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항상 다른 이들과 함께 의견을 교환해야 하지만, 상서로운 경험을 내가 내가 아닌 밖으로 나가는 상태(ex-status)로의 경험을 언어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면 여기 연구 주제도 안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흐릿해져가는 기억을 더듬으며 쓴 서커스타드의 원고는 이미 송고할 수 있는 글자 수를 넘어 있었고, 컨퍼런스 페이퍼에 대한 윤곽도 대충 잡혔다. 부족한 것이 없는 것만 같은 나날들. 하지만 무언가 잊어버린 듯한 봄날씨를 느끼는 순간 오랜 작업동료인 작곡가 엘로는 말을 걸어온다.
“우리 수요일에 공연할 수 있어?”
“어 시간은 되지만, 연습할 시간이 필요한데. 월요일에 일단 만나자.”
전화로는 잘 설명이 안되는 상황. 작업의 이야기는 아무리 잘 편지로 써도, 아무리 말로 잘 설명해도 소용이 없다. 그게 누구의 작업이든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만나기로 했다.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는 스크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기념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그날이 100년 전 5월29일이므로 시간이 무척 없기는 할 테지만 수요일에 바로 공연을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공연의 컨셉은 원곡의 재현이 아니라 동기의 차용. 뤼미에르라는 바에서 두 달에 한 번씩 음악즉흥을 하는 모임을 갖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지만, 그리고 거기 오는 연주자들이 대단한 실력가들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공연의 급조란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심호흡을 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느낌은 아주 좋은 프로젝트이지만 어떻게 할지 어리둥절한 상태로, 엘로가 박자를 끊어 적어준 노트를 받아든다. 이 비트를 알면 된다고. 물론이다. 최초 니진스키가 도전한 것도 박자 사이를 파고드는 다시 말해 박자에 맞추지 않고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는 안무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므로 우선 박자를 체화하도록 여러 번 듣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르 사크레 드 프렝탕』. 이건 니진스키이후 거의 모든 안무가가 도전했던 거다. 피나 바우쉬, 모리스 베자르 같은 거장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안무가들이 『봄의 제전』으로 안무했다. 춤추지 않는 자비에 르 로아는 그걸 틀고 지휘를 해보여주기까지 했다. 올해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는 자샤 발츠에게 이 작업을 의뢰해 둔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