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수상작은 배가 있었네

어쩌다 새벽에, 특히 이른 새벽에 눈을 뜰 때에는 바깥세상이 달라보이고 익숙한 사물들과 해야 할 일들이 새롭게 여겨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장 아누이(Jean Marie Lucien Pierre Anouilh. 프랑스의 희곡 작가 1910~1987)도 그의 희곡 「안티고네(Antigone)」에서, 왕이 된 숙부의 명령을 어기고 죽은 오빠를 묻어주러 가는, 오이디푸스 왕과 그 어머니 사이의 딸 앙띠고느(Antigone)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름다웠어요. 모든 것이 회색이었죠. 지금은 벌써 모든 것이 분홍빛, 노란빛, 초록빛이지만요. 그림엽서가 되어 버린 거죠. 더 일찍 일어나야만 해요, 무채색의 세상을 보고자 한다면요.”
“정원은 아직 잠들어 있었어요. 내가 갑자기 찾아간 거죠. 짐작도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서 본 거죠. 아름다워요, 아직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는 정원은.”
“들판에는 모든 것이 젖어 있었어요.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난 길에서 홀로인 채 커다란 소음을 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거북스러웠어요. 그래서 난 신발을 벗고 눈치 채지 못하게 들로 미끄러져 갔어요….”
그리고 언니 이스메느(Ism뢮e)가 오빠를 묻어 주려 하다가는 죽음을 당할 것이라면서, 그렇게 오빠를 묻어 주려 하다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냐고 묻자 앙띠고느는 이렇게 대답한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 오직 맨 살갗에 차가운 공기를 느끼기 위하여 아침에 제일 처음으로 일어나던 누군가가? 밤에 조금 더 살아 있기 위하여 피곤해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제일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들던 누군가가? 너무도 많은 작은 동물들이, 너무도 많은 풀의 싹들이 풀밭에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이미 아주 어린 나이에 울음 울던 누군가가?”
막연히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늘상 맞추어 둔 기상 시간을 알리는 알람시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늦게 자리에 든 것을 핑계로 느지막하게 일어나던 어느 때인가, 문득 어둠을 걷고 날빛이 조금씩 밝아 올 무렵이란 마치 이제 낮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동지(冬至)와도 같이 새롭고 낯설고 신선하고 경건하기까지 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일어나는 시간을 동 트는 때로 더 앞당겨서 일어나 무언가 하여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새벽에 일어나 움직이게 될 때면 의례히 생각나는 것은 대학 때 배우던 희곡에서의 앙띠고느의 그러한 대사, 아무도 없는 가운데 밤새 이슬이 내린 대기를 피부에 느끼며 무채색의 세상으로 미끄러지듯 조용히 걸어 나가는, 그리하여 조그만 몸으로 힘과 권력에 맞서 실제로는 작지만 상징적으로는 커다란 의미의 행동을 하러 나아가던 한 인물의 읊조림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진정 이러한 대사에서 드러나는 새벽의 느낌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느껴보고자 한다면 우리가 있는 곳이란 동이 트기 전부터 차량들이 오가는 번잡한 도시 속이 아니라 보다 한적한 시골의 품이어야 할 것 같다. 더하여 한 겨울 눈 내린 산 속, 짐승들의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아마도 더욱 고즈넉한 느낌을 오롯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벽은 종종 연인의 이미지에 연결되곤 한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서 전래되던 시를 뷔씨느(Romain Bussine. 프랑스의 시인이자 바리톤 성악가 1830~1899)가 번안한 가사에 포레가 곡을 붙인 가곡 「꿈을 꾸고 난 후에(Apr뢵 un r릚e)」는 잠들어 꿈속에서 본, 매혹시키는 모습을 하고 불타는 신기루와 같은 행복을 꿈꾸게 해 주던, 더욱 부드러운 두 눈과 청아하고 울림 있는 목소리를 가진 연인을, 마치 새벽이 깃든 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고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는 연인의 부름에 따라 지상을 떠나 함께 빛을 향하여 달아났고, 여러 겹의 하늘은 자신들에게 그 구름들을 갈라서 열어 주었으니 그것은 미지의 광채와 언뜻 보이는 신성한 섬광이었다고 말한다.
1965년 영화 「고백」(원제 The Sandpiper 도요새)에 삽입된 영화음악으로 아카데미상(Academy Award for Best Original Song)을 수상하고 다음 해에 토니 베넷(Tony Bennett)이 부른 노래로 그래미상(Grammy Award for Song of the Year)을 수상한, 작곡 맨델(Johnny Mandel 미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1925~), 작사 웹스터(Paul Francis Webster 미국의 작사가 1907~1984)의 「그대 미소의 그림자(The Shadow of Your Smile)」 또한, 연인과 함께 보내던 시간이 지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연인이 더 이상 옆에 없을 때에도, 연인이 짓던 미소의 그림자가 자신의 꿈들을 온통 채색하고 새벽을 비추어 준다고 한다.
신화적으로도, 그리스 신화 속 새벽의 여신 에오스(Eos)는 끊임없이 젊고 잘 생긴 남자를 찾아다니는 욕망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새벽의 여신은 젊고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모든 남자들의 연인이 된다는 것이다. 에오스는 트로이의 왕자인 인간의 젊은 청년 티토누스(Tithonus)에게 반해서 그를 납치하여 서로 연인 사이가 된 다음, 사람의 아들인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너무 안타까웠던 나머지 제우스(Zeus)를 찾아가 그를 죽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제우스는 그 소원을 들어 주었지만 간청한 내용대로만 들어 준 탓으로 티토누스는 나이가 들어 늙을 대로 늙어 가되 결코 죽지는 않는 기구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영원한 젊음, 즉 새벽의 여신의 연인이 될 수 있도록 새벽의 젊음도 주어 달라고 하는 것을 그만 빠뜨렸던 것이다.
웨버(Andrew Lloyd Webber. 영국의 뮤지컬극 작곡 및 기획자 1948~)가 작곡한 뮤지컬 「캣츠(Cats)」에서 한 때 미모를 자랑하였으나 이제는 말할 수 없이 늙고 초라해져 버린 그리자벨라(Grizabella) 고양이가 부르는 노래 「메모리(Memory)」의 가사는 「캣츠」의 감독인 넌(Trevor Robert Nunn. 영국의 연극.영화.드라마 감독 1940~ )이 엘리엇(T. S. Eliot)의 「서시(Preludes)」와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Rhapsody on a Windy Night)」의 시들에서 단어와 구절과 이미지를 차용하여 와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넌은 그리자벨라로 하여금 아름답던 시절, 행복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면서 엘리엇으로부터 차용하지 않은, “새벽이 오면 오늘 밤 역시 하나의 기억이 될 거야(When the dawn comes Tonight will be a memory too)”라는 자신의 문장을 전체 시 가운데 결론을 짓는 부분의 가사로 넣어 부르게 하였다. 여기서 오늘 밤이란, 달도 기억을 잃어버린 채 홀로 미소 짓고 있고, 가로등 속에 시든 잎들이 발아래 몰려드는데 바람은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그러다가 체념하듯이 등불이 팔딱거리며 타는 가운데 누군가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며 지나가는 그러한 밤이다.
말하자면 외롭고 초라하고 시들고 힘든 밤이 기억 속으로 지나간다는 것이지만, 좋은 시절 또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니, 이러한 가사는 여전히 성서 가운데 베드로 전서 1장 24절에서 따온 브람스(Johannes Brahms. 독일의 작곡가 1833~1897)의 「독일 레퀴엠(Ein deutsches Requiem)」의 2번째 곡의 처음 부분 노래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인간의 모든 영화는 풀꽃과 같은데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나니(Denn alles Fleisch ist wie Gras / und alle Herrlichkeit des Menschen / wie des Grases Blumen. / Das Gras ist verdorret / und die Blume abgefallen.)”라는 구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리자벨라의 노래는 그것이 노쇠함이나 죽음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요, 부활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 위하여, “그리고는 새 날이 시작된다(And a new day will begin)”, “가로등이 꺼지고, 또 하나의 밤이 끝나면, 또 다른 날이 밝아온다(The streetlamp dies, / another night is over / Another day is dawning)”, “보라, 새 날이 시작되었다(Look / A new day has begun)”라고 덧붙인다.
새벽의 여신은 이렇게, 아무리 암흑 속에 있거나 아무리 절망하였거나 아무리 노쇠하여 기력이 없거나를 묻지 않고 새 날이 밝아옴을 알리며 지치지 않고 우리에게 연인의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