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세계의 춤기행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로부터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극장”이라는 평을 받은 바 있는 “로얄 코트 씨어터(Royal Court Theatre)”를 내가 처음 알게 된 건 첫 학기 때 수강했던 “런던 캐이스북(London Casebook)”이라는 수업을 통해서였다. 봄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수업의 일환으로 로얄 코트 씨어터를 방문하게 되었다. 잠시 과목에 대한 설명을 잠시 곁들이자면, 런던 캐이스북이라는 이 생소한 이름의 과목은 런던의 극장, 영화관, 무용 공연장, 박물관 등등을 찾아다니며 그 곳에서 현재 일어나는 다양한 예술이벤트를 관람하고, 관련 예술가들 및 예술기관의 행정가들을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는 수업이다.
학기 중이면 학교가 있는 길포드(Guildford)지역에만 늘 갇혀 있었던 내게 ‘런던’이라는 이름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내게 무엇을 공부하는 지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매주 수업을 통해 런던 기행을 할 수 있다는 매력이 더 컸기 때문에 이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생각 보다 쉽지 않은 과목이라는 것을 과제를 내야 하는 시점인 학기말에 와서야 깨닫고 수강을 후회했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어쩌면 평생 가보지 못할 수도 있는 런던 구석구석의 의미 있는 예술기관과 현재의 다양한 예술을 만날 수 있었던 상당히 값진 경험이었기에 이제 그 시절 기말과제의 고단함 쯤은 내게 가치 있는 훈장처럼 느껴진다.
로얄 코트 씨어터를 찾게 되면 그 앞으로 슬로언 광장(Sloan Square)이 눈앞에 펼쳐진다. 로얄 코트 씨어터 앞은 영국의 대표적 상징중의 하나인 빨간색 2층 버스들이 끊임없이 지나고 있고, 슬로언 광장에 늘어선 명품 의류 브랜드 매장들과 감각적인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고급스러운 카페들은 오래된 로얄 코트 씨어터의 건물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영국의 이른 봄날, 일조량이 많아져서 햇빛이 강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변덕스럽고 쌀쌀한 기온 탓에 초겨울 코트를 걸치고 나는 로얄 코트 씨어터를 찾았다. 극장에 다른 일행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와 친구들은 슬로언 광장 주변을 둘러 보기로 했다. 광장 주변은 학생 신분으로는 도저히 들어가 볼 엄두조차 안 나는 고가의 브랜드 의류 매장들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한껏 멋을 부린 카페 그리고 그카페 분위기에 걸맞게 멋스러운 옷을 입고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까지…. 그 곳의 아우라는 낯선 이방인인 우리를 더욱 이방인처럼 보이게 했다.
마치 어떤 연출가에 의해 꾸며진 가상의 세트처럼 슬로언 광장이라는 하나의 미장센(mise-en-sc럑e)은 완벽한 세련됨으로 채워져 있었다. 우리는 즐비하게 늘어선 아름다운 카페들을 지나쳐 그 중 나름 덜 세련돼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와 스낵을 즐겼다. 그 곳에서 맘 편히 수다를 떨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 약속시간이 다 돼서야 그 곳 명품거리를 종종걸음으로 빠져 나와 극장으로 향했다.
명품거리를 등지고 로얄 코트 씨어터를 바라보며 걷고 있자니, 왠지 로얄 코트 씨어터가 그 자리에 안 어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888년 처음 지어진 로얄 코트 씨어터의 건물은 현재의 명품 거리의 화려함에 묻혀 다소 소박해 보이는 외관을 하고 슬로언 광장 한 복판에 서서 ‘로얄 코트 씨어터’라는 자신의 이름을 붉은 네온사인 조명으로 밝히고 있었다. 교수님과 일행을 만난 우리는 먼저 극장 뒤편 별관에 마련된 사무실로 향했다. 그 곳엔 창고 형 건물로 된 아주 소박하게 꾸며진 연습실과 회의실이 있었고, 극장을 운영하는 운영진들의 사무실이 있었다. 갖가지 서류 뭉치들과 매해 3,000 편이 넘는 아마추어 신진 극작가들부터 날아온 대본 봉투들로 가득 채워진 사무실 벽면은 이 작은 사무실의 영향력과 열정을 반영하는 듯 했다.
로얄 코트 씨어터는 영국 내의 최소의 국립 극단으로서 영국의 극작가들을 위한 극장이다. 영국의 급진적이고 독특한 시선의 신진 극작가를 발굴하여 그들의 작품을 로얄 코트 씨어터에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또한 세계 각국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은 급진적이고도 독창적인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기존 전통 연극계에 자극을 주고 영국 연극계의 작품의 다양성을 꾀하고자 노력하는 즉, 영국 정통 연극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이다. 특히 로얄 코트 씨어터는 젊은 신인 극작가들을 발굴하고 꾸준히 지원하는 것을 주된 사업의 목표를 하고 있어, 무명의 젊은 극작가들에게 있어 세계적인 작가로 뻗어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자 꿈의 등용문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앞서 언급했듯이, 로얄 코트 씨어터를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극장’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이 날 관람한 연극도 로얄 코트 씨어터에 의해 발굴된 영국의 인도인 이민자 3세인 신예 여류 극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녀의 작품은 영국 속의 다문화 사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영국은 과거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인도인들을 품기 위해 그리고 이슬람권과 여러 주변 국가에서 모인 이주자들의 문화적, 종교적, 인종적 이질감을 줄이기 위한 고심이 크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마 로얄 코트 씨어터는 인도인 이민자 3세인 그녀의 작품을 통해 영국의 다문화 사회를 되짚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작품은 한 이민자인 인도인 3세가 영국사회 속의 텔레마케터로 일하면서 접하게 되는 고객들과 대화를 통해 영국내의 다문화 사회가 가지는 문제점과 모순을 진지하고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우리 일행은 이곳의 또 하나의 특별한 운영 프로그램 중의 하나인 유료 극장 투어를 하였다. 입장료를 지불하면 하루에 한 번 극장 관계자가 나와 극장을 돌며 구조와 역할 등등을 설명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극장 투어에 앞서 극장장을 만나 로얄 코트 씨어터의 역할과 비전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극장장과의 만남은 교수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아마 학교 수업의 일환이었기에 가능했던 극장장의 특별한 배려였을 것을 것이다. 그 후 우리는 극장 안내원을 따라 극장건물의 전반을 둘러보았다.
우선 우리는 로얄 코트 씨어터 안에 있는 두 개의 극장 중, 메인 스테이지 격인 저우드 씨어터 다운스테어(Jerwood Theatre Downstairs)를 안내 받았다. 몇 번의 실내 재건축을 거친 후 지금의 모습을 갖춘 저우드 씨어터 다운 스테어 극장내부는 1888년 건축 당시의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극장의 구조는 무대에서 객석까지 이어진 둥근 원형을 띄고 있었다. 19세기의 고전적 극장 무대의 기술과 구조를 그대로 드러낸 무대와 당시의 인테리어 양식을 반영한 나무로 된 둥근 아치형 발코니, 그리고 어린 양 가죽으로 만든 400개의 객석의자는 마치 문화재를 접하는 것 같아 참 인상적이었다.
극장의 인테리어 구조와 장식 그리고 모든 재질들은 오랜 세월의 때가 묻어 그 빛이 바랬지만, 아직까지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관리가 잘 돼있었다. 3층으로 된 발코니 객석은 무대전체를 골고루 내려다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둥글고 아담한 극장전체의 구조와 조화를 이루어 안정감을 주었다.
당시의 체취가 묻어나는 극장의 발코니의 나뭇결을 만지고 19세기 만들어진 양 가죽 시트로 된 객석에 앉아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니 내가 마치 19세기의 사람들과 함께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개의 극장 중 다른 하나는 저우드 씨어터 업스테어즈(Jerwood Theatre Upstairs)인데, 우리가 이날 연극을 관람한 4층에 위치한 소극장이다. 관람석이 90석 밖에 계단식 객석을 갖춘 이 스튜디오 형태의 소극장은 신진 극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유명한 극작가들의 신작과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무대이기도 하다.
이 날의 모든 공식적인 일정을 마친 후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비공식적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극장 지하에 위치한 바(bar)로 향했다.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의 극장들은 대부분 극장 내부에 간단한 스낵과 술과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바나 레스토랑을 갖추고 있다. 어떤 극장들은 바와 레스토랑을 극장 출입구 근처에 두어 공연을 찾은 관람객들이 공연 시작 전과 후에 다과와 음료를 즐기며 친분을 다지는 사교의 장으로 또 공연에 대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는 토론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로얄 코트 씨어터 건물의 아담한 크기를 고려해 보았을 때, 지하실 한 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바의 크기는 이들이 공연 전후에 즐겁게 먹고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시간 조차 공연문화의 매우 중요한 크기로 생각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저녁이 되어 어두워진 바의 조명은 오크색 벽면과 어우러져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화려한 명품거리에서 골동품 같은 인테리어를 고집하는 로얄 코트 씨어터는, 그 외관은 작고 소박해 보이지만 그 기능과 역할에선 어느 무엇보다 급진적이고도 미래 지향적이었다. 로얄 코트 씨어터가 있는 한 영국의 연극계의 현재와 미래는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