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요즘 내가 세들어 사는 아파트를 환하게 해주는 꽃들이 있습니다. 아침 저녁 출퇴근길에 다소곳이 나를 배웅하고 마중해주는 꽃들이 있습니다. 네, 구절초입니다. 「구절초꽃」이라는 시에서 김용택 시인이 그랬지요.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 달만 떠오릅니다”고 말입니다. 저 구절초 꽃들이 다 지고나면 가을도 가고 겨울이 오겠다 싶은 요즘입니다.
구절초 하면 떠오르는 시인, 떠오르는 시가 있지요. 바로 박용래 시인의 「구절초」입니다. 정지용 선생이 그랬다지요. “북녘 땅에 소월이 있다면, 남녘 땅에는 목월이 있다”고. 이를 두고 누군가는 또 그랬다지요. “북 소월, 남 목월 그리고 중도(中都) 용래”라고 말입니다. 또 누군가는 “북녘에 백석이 있고, 남녘에는 박용래가 있다”고도 했다지요. 김소월과 박목월 그리고 백석과 박용래. 사실 누가 있어 그들의 순위를 매길 수 있겠습니까. 나처럼 평범한 시인들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찬, 그저 높고 높은 시의 봉우리들이니 말입니다. 하여튼 구절초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박용래의 구절초란 얘기를 한다는 것이 그만 주저리주저리 길어졌네요.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 박용래, 「구절초」 전문

구절초가 누이랍니다. 가을이면 지천으로 피는 사랑이랍니다. ‘단추 구멍에 달아도’ 좋고,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이랍니다. 스무 살. 사랑하기에 딱 좋았던 그 시절에는 왜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콩딱콩딱 뛰었더랬는지요. 가을이 오고 구절초 피고 그리고 박용래의 시가 떠오르면 문득 문득 그 시절에 닿곤 합니다.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 이 대목에서 혹시 문득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지요? 너무 어려운가요? 그렇다면 “웰컴 투 동막골”이란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혹시 영화 속 배우 강혜정을 기억하실런지요? 너무 순박해서 약간은 모자란 듯한 강원도 두메산골 처녀로 분했더랬지요. 그때 강혜정이 머리에 꽂고 있던 꽃을 기억하실런지요? 네. 그 꽃이 바로 구절초입니다. 순박한 이미지의 가을꽃으로 구절초만한 것도 없겠지만, 아무래도 감독이 박용래의 시를 알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한편 시에 나오는 마아가렛(Marguerite)은 구절초와는 엄연히 다른 꽃인데 구절초와 그 생김새가 똑같아서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아가렛은 5~6월에 피고 구절초는 9~11월에 피니 그 개화시기가 다를 뿐 일반인이 그 모양새만으로 두 꽃을 구별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어디 구절초와 마아가렛만 그런가요?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이 알고 보면 구절초, 쑥부쟁이, 감국, 산국, 벌개미취, 참취 같은 꽃들입니다. 이런 꽃들이 하나 같이 다 비슷해서 그것을 제대로 구분하기는 무척 어렵지요. 들국화라는 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가을이면 들녘으로 서로 다투어 피는 이런 꽃들을 일러 들국화라 부르는 것이니, 예로부터 애써 구분하지 않고 그냥 이도저도 하나로 들국화라! 불렀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 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
- 안도현, 「무식한 놈」 전문

그러니,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서 크게 이상할 것도 없으려니와 더더욱이 안도현 시인처럼 자책할 필요는 없겠지요. 그저 박용래의 시 구절 하나 정도 외우고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절초(九節草)는 구일초(九日草)라고도 불리고, 선모초(仙母草)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름의 유래를 찾다보니 1970년 2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오더군요.

“… 충남에서는 구일초라고 부르는데 유래인즉 음력 9월 9일 채취해서 말려두었다 다려먹으면 가장 약효가 있다는데서 온 이름이라는 것이다. 전남과 전북 일대에서는 이것을 선모초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이 풀을 다려먹으면 부인병이 없어지고 훌륭한 옥동자를 낳을 수 있는 어머니가 될 수 있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 이영로 /이대문리대 교수

어떤 자료에는 구절초가 5월 단오에는 그 줄기가 다섯 마디였다가 음력 9월 9일이 되면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해서 구절초라 불렸다는 설도 있는데, 구절초나 구일초라는 이름은 아무래도 중국의 가장 큰 명절인 중양절(重陽節)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중국에서는 음력 9월 9일을 구(九)가 겹친 날이라 하여 중구(重九)라 부르거나 혹은 홀수(1,3,5,7,9)인 양수(陽數) 중에서도 극양(極陽)인 9가 겹친 날이라 하여 중양절(重陽節)이라 부릅니다. 중양절에는 국화주나 국화차를 마시며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귀신을 쫓는 풍습도 있었는데 이를 두고 중양절을 국화절(菊花節)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딴 데로 새고 말았는데요, 국화과에 속하는 구절초가 가을 들녘에 가장 흔하게 피었을 테니, 아무래도 음력 9월 9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절초를 꺾어 술로 마시고 차로 마셨을 겁니다. 해마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만 되면 애꿎은 사람들의 술로 차로 쓰이기 위해 가지를 꺾여야 했던 꽃. 그런 연유로 구절초, 구일초라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마 그게 정설일 듯합니다.
이름 얘기를 하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시가 하나 있습니다. 최광임 시인의 시, 「이름 뒤에 숨은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너와의 만남에는 목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헤어짐에도 이유가 없다
우리는 오래 전 떠나온 이승의 유목민
오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 그래야만 비로소
너와 나 들꽃이 되는 것이다
달이 부푼 가을 들판을 가로질러 가면
구절초밭 꽃잎들 제 스스로 삭이는 밤은 또 얼마나 깊은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
가벼운 짐은 먼 길을 간다
내가 한 계절 끝머리에 핀 꽃이었다면
너 또한 그 모퉁이 핀 꽃이었거늘
그러므로 제목없음은 다행한 일이다
사람만이 제목을 붙이고 제목을 쓰고, 죽음 직전까지
제목 안에서 필사적이다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 만약
인간의 제목들처럼 집요하였더라면 지금쯤
이 밤이 휘영청 서러운 까닭을 알겠는가
꽃대궁마다 꽃피고 꽃지고, 수런수런
밤을 건너는 지금
- 최광임, 「이름 뒤에 숨은 것들」 전문

‘꽃은 달이 기우는 뜻을 묻지 않고/ 달은 꽃이 지는 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니,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서로 묻지 않으며/ 다만 그곳에 났으므로 그곳에 있을 뿐’이니, 그냥 ‘오가던 길로 그냥 가면 된다’고 합니다. 참 쿨한 이별인데요. 말이야 쉽지. 그게 참 어렵고 또 어려운 일이지요. 아닌가요?
가을이면 여기저기서 구절초 축제가 열리는데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전북 정읍의 구절초 축제와 충남 공주 영평사의 구절초 축제가 유명하네요. 그런데 저는 그런 축제보다는 오히려 화순 적벽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단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이영진 시인의 시, 「구절초」와 함께 가셔야 한다는.

화순 적벽가는 길가에 구절초 피고 수몰지 물 그림자 단풍져 붉다. 낡은 자전거에 도시락 얹고 페달에 힘을 주며 폐광이 다 된 광산을 향해 광부 하나 하얗게 가고 있다. 불꽃이었던 옛 사내, 어둔 땅 속으로 불을 캐려 간다. 푸른 하늘가, 농창 익은 연시가 불송이 보다 더 밝은 대낮, 화순 적벽가는 길가에 구절초 피어 저 홀로 한 세상 깊어만 가고.
- 이영진, 「구절초」 전문

화순적벽(和順赤壁). 전남 화순에 있는 적벽이지요. 중국 양쯔강 남안의 적벽. 조조가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던 적벽대전. 그 적벽과 닮았다 해서 적벽이란 이름이 붙은 곳. 동복댐의 건설로 수몰마을이 생기고, 적벽의 일부도 물에 잠겼지만 여전히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한 풍광을 자아내는 곳. 그 화순 적벽가는 길에 “홀로 핀 구절초”가 지천을 이룬 구절초 꽃밭보다 더 아름답겠다는 생각. 붉은 단풍 물 그림자 바라보며 ‘저 홀로 한 세상 깊어만 가’는 구절초가 오히려 심금을 울리겠다는 생각. 올 가을에는 축제 대신 홀로 핀 화순 적벽의 구절초를 보고 오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