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평

*안성수픽업그룹과 WHS의 『투오넬라의 백조』(10월 23~25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올해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여 국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행사가 풍성하다. 주로 음악계 행사이긴 하지만, 무용계에서도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바탕으로 한 컨템포러리댄스&서커스 작품이 이목을 끌었는데 바로 안성수픽업그룹과 WHS의 『투오넬라의 백조』다. 이 작품은 9월26일 시벨리우스의 출생지인 하멘린나에서 세계 초연한 후 10월 23~25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국내에 첫 선을 보였다.
안성수픽업그룹이야 한국 컨템포러리댄스를 대표하는 단체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컨템포러리 서커스단인 WHS은 생소하다. 컨템포러리 서커스를 한 마디로 이해가능하게 설명하자면 ‘이 시대의 감각에 맞게 공연예술화된 서커스’라고 할 수 있다. 저글러 빌레 왈로와 마술사 칼레 하키라이넨이 이끄는 WHS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컨템포러리 서커스 단체로 저글링과 인형극을 중심으로 시각예술, 미디어, 신체극 등이 통섭된 공연예술을 지향하고 있다. 2012년부터 안성수픽업그룹과 협업을 이어가는 것도 보다 높은 예술적인 수준과 가치를 추구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시벨리우스의 음악 제목이기도 한 『투오넬라의 백조』는 핀란드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레민카이넨에 관한 이야기에 근거한다. 황천 투오넬라의 검은 강에는 슬픈 노래를 부르는 신성한 백조가 있다. 레민카이넨은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투오넬라의 백조를 잡으려 하지만 그만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게 된다. 그 후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각각 안무와 연출을 맡은 안성수와 빌레 왈로는 이러한 소재를 담은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컨템포러리댄스와 서커스가 융해된 작품을 완성하였다.
피아노, 첼로, 드럼의 3중주가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가운데 안성수픽업그룹의 이주희, 김지연, 김현, 양희훤 그리고 WHS의 빌레 왈로, 노라 유피가 출연하고 있다. 오프닝을 장식한 이주희는 웅크린 몸을 서서히 일으켜 쭉 펴고는 앞으로 놀라운 각도 기울이기 시작한다. 중력의 법칙을 무시한 기울기여서 순간 놀라움을 선사하였으나 이내 숨겨진 와이어와 같은 장치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인상적인 오프닝은 이후 뻔한 춤적 전개를 보이지 않을 거라는 암시를 충분히 주었다.
안성수픽업그룹의 무용수들은 현대춤의 자유로운 구성과 나선형의 유영이라든가 한국춤의 순환적 호흡, 낮은 굴신, 팔의 어름, 발의 디딤을 어우르는 움직임을 펼친다. 안성수가 도전적인 협업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국립무용단과 국립발레단 같은 다른 춤 장르의 단체들의 러브콜을 자주 받는 이유는 특정 춤 장르로 한정되지 않는 포괄적인 흡착력을 지닌 움직임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장점이 이 작품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나 있다.
연출을 맡은 빌레 왈로의 영향으로 백조 인형, 새의 머리, 하얀 깃털 같은 구체적인 소품이 다수 등장하였다. 이는 작품의 소재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대중적인 수용력을 높이긴 했으나 그 동안 안성수의 비구체적이고 비서사적인 춤 스타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칫 유치해질 수 있는 표현을 어느 정도 방어한 것은 안성수의 형상화 작업이었다. 이를테면 여성무용수 셋의 조형적인 움직임으로서 백조의 몸체 윤곽을 잡고 유영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그밖에도, 신체 모양 풍선으로 저글링을 하고 폴(pole)댄스와 부채춤을 교차하는 등의 알기 쉬운 표현들이 작품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이렇듯, 안성수의 예술적인 추구와 빌레 왈로의 대중적인 표현은 끊임없이 접점을 향해 갔다. 그 과정에서 안성수는 추상적인 미감을 양보하였고 빌레 왈로는 저글러의 본능을 자제하였다. 양자 간 중요한 무기를 하나씩 내려놓은 것인데 그렇다고 이를 손실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빌레 왈로는 컨템포러리 서커스의 공연예술화에서 필요한 예술성을 획득하였으며 안성수로서는 약점이었던 대중적 수용력과 해외무대 진출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무용계의 예술적 관점으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으나 실보다 득이 많은 협업이었음은 틀림없다. 앞으로도 분야와 문화를 넘은 협업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하니 보다 발전적인 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겠다.

* 한층 완성된 형태의 협업을 이룬 국립무용단과 테로 사리넨의 『회오리』(10월7~1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근 몇 년 간 국립무용단의 행보는 도전적이다. 1962년 창단 이래로 ‘전통에 근거한 현대적인 창작’이라는 모토로 주로 신무용 스타일을 지향해왔으나 근래 들어 동시대의 새로운 무용추세에 동참하려는 시도를 가시화하고 있다. 특히 2012년 국립레퍼토리시즌을 기점으로 극무용 형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함께 외부 예술가들과의 협업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단』, 『묵향』, 『토너먼트』, 『회오리』, 『완월』 등이 그러한 맥락에서 제작되었다. 그 중 2014년 봄에 초연하여 올해 10월7~1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재연한 『회오리(Vortex)』는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을 수 있겠다.
『회오리』는 국립무용단이 핀란드 현대무용가 테로 사리넨에게 안무를 의뢰한 작품이다. 테로 사리넨은 세계 정상급 무용단인 네덜란드댄스시어터, 바체바무용단, 리옹오페라발레단, 마르세이유국립발레단에서 초청안무가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지난 10년 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인지도와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다.
테로 사리넨은 현대춤과 발레뿐 아니라 일본전통춤과 부토를 섭렵하였으며 근래에는 경극이나 한국춤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면서 자기만의 예술적 색깔을 확고히 하고 있다. 자연주의적인 춤이 그것이다. 이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자연스러움을 내재한 춤을 추구하는 것으로, 두 발을 대지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동시에 대기 중으로 떠오르는 영혼을 느끼는 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친화적인 선을 가진 한국무용과 보편적으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으므로 국립무용단이 그를 선택한 것은 현명해 보인다.
서로 다른 장르와 문화의 예술가들이 충돌과 융합을 거쳐 한데 어우러지는 과정을 실현하는 『회오리』는 물결, 전파, 회오리의 세 장으로 진행된다. 횡적인 힘의 탐구인 ‘물결’과 내면의 탐구인 ‘전파’를 거쳐, 외부로의 확장을 이루는 ‘회오리’에서는 테로 사리넨과 국립무용단 단원들의 조화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막이 오르자, 영화 「인터스텔라」의 블랙홀을 닮은 원형의 빛은 기묘한 신비감을 돋운다. 그 앞에서 음영으로 형태를 드러낸 무용수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일련의 입자들처럼 움직이기 시작한다. 움직임은 잔잔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관계성, 공간성, 연쇄성과 더불어 낮은 무게중심, 순화적인 호흡, 리드미컬한 감각을 다채롭게 실험한다. 하지만 앞의 두 장에 걸쳐 몇 십분 동안이나 끈질기게 엮어가고 풀어가는 과정은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무언가가 생성되어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인고의 형성 과정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일단 작은 에너지들이 모이고 모여서 어느 정도 묵직한 힘을 이루어야지만 비로소 폭발적으로 확산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작은 입자들인 무용수들이 서로 엮어지고 풀어지면서 발전적인 형태를 띠고 또 다른 기류에 의해 변화해가는 앞의 두 장의 전개는 길고 지루한 게 아니라 적절한 것이다.
세 번째 장인 ‘회오리’에서 첫 장면의 원형의 빛은 더욱 강력해져 무대뿐 아니라 객석까지 잠식하면서 관객을 자연의 신비한 작용의 세계로 이끈다. 세밀하게 갈라지는 빛은 무용수들의 몸짓으로 인해 더욱 영롱한 형상을 만들어낸다. 보는 이의 심미적인 쾌를 극대화시킨 장면으로 자연을 넘어 우주의 이치에 대한 사유까지 자극한다. 무용수들의 움직임 역시 앞의 여러 작용들을 두드러지게 활성화시킨다. 앞의 두 장에서 무용수들이 상대적으로 정적으로 움직였다면 여기에 이르러서는 동적인 그러므로 보다 명확하고 확신에 찬 춤으로 나아간다. 어떤 면에서는 참을성 있게 지켜본 관객에게 심미적인 쾌를 통한 감흥을 한꺼번에 선사하는 듯하다.
『회오리』는 작년 초연 때 한국과 핀란드라는 문화와 한국춤과 현대춤이라는 장르를 초월한 협업으로 주목을 모았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를 대표하는 국립무용단체가 이제껏 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시도를 단행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다. 물론 첫 시도부터 완성도 높은 작품을 내리라는 기대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실제로 작품 전체의 이미지나 분위기는 구축되었으나 임팩트 있는 짜임새를 내놓지는 못했다. 올해 재연에 이르러서야 강렬한 회오리로 관객의 동요와 감탄을 이끌어냈다.
국립무용단은 외부 예술가들과의 협업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예술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이긴 하나, 그 시행착오를 줄일 수도 있다. 우선, 협업은 중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이 만날 때면 충돌과 배려와 조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회오리』가 작년에 이어 올해 재연에서 훨씬 작품력을 끌어올렸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또한, 무용이라는 공연예술에서 아무리 다채롭고 적극적으로 타 분야를 끌어들인다 하더라도 결국 중심을 잡는 근원은 움직임이다. 따라서 춤을 중심으로 작품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어우를 수 있는 총체성을 잘 이해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이는 안무가일 가능성이 높음을 인지해야 한다. 무용작품에 의상이나 음악으로 참여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연출까지 잘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