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살롱

죽음이 구원일 수 있을까. 화가 천경자(1924~2015)에게는 어울리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달 22일 갑작스럽게 전해진 타계 소식에 이어 이런저런 경로로 흘러나온 고인의 말년 정황이 안타깝고 허망했기에 더 그러했다. ‘꿈과 정한(情恨)’의 세계를 그리시더니 이별도 그림 속 여인들처럼 4차원적으로 고하셨다. 천 선생은 미술과 문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동시대 그 어떤 인간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일생을 보낸 천생 예인이었다.
그는 1979년 펴낸 에세이집 「자유로운 여자」에서 바람은 불어도 좋다며 만사 통달한 듯 썼다. “어디서 일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들. 그 위에 인생이 떠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신(神)은 한 인간이 어느 만큼이나 열렬하게 자기 삶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그 운명의 문은 열리리라고 믿는다. 담배를 피워 물고 긴 한숨을 내려 쉬며 거울에다 연기로 ‘자유’라고 쓴다.”
생전에 천 선생을 몇 번 뵈었다. 기자 초년병 때 당신의 그림 세계를 ‘꽃·뱀이 어우러진 섬뜩함과 정한, 사연이 농축된 화려한 색의 변주’라는 제목으로 썼다. 1989년 2월이었으니 선생 나이 65세였다. 49세 때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펴냈던 그는 “앞으로 내 생애는 몇 페이지의 여백이 남아있는 것일까”라 자문했다. 신문 기사를 잘 읽었다고 전화를 하신 뒤 점심을 사주시곤 앙증맞은 분첩 하나를 내미셨다. “맘에 들랑가 모르겄소.” 식사 뒤 맛있게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지난 달 30일 오전,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1층 로비에서 열린 추도식에서 그 얼굴을 다시 만났다. 국화꽃에 둘러싸인 영정 속에서 선생은 맛나게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젊은 시절에 친분이 두터웠던 소설가 박경리(1926~2008)는 천경자를 기린 시에서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라고 묘사했다. 지금쯤 두 분이 만나 시름없는 담배 태우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천 선생을 그리워하는 유족과 추도위원들은 2024년 탄생 100주년 때 제대로 된 전시와 행사를 기약했다. 화가의 고향인 전남 고흥군은 미술관 건립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천 화백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채색화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진주 살던 박생광(1904~1985) 화백을 서울 홍익대로 끌어올린 이가 천 선생이었다.
꿈과 사랑과 모정(母情)이 절절 끓는 그림을 그리던 화가는 “영원히 미완성이 될지 모를 꿈을 향해 쓰라린 고배와 불운을 감수해야 했다”고 슬퍼했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으로 부활한 천경자의 ‘슬픈 전설’이 전설로만 끝나지 않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