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좌담

예술가의 삶과 정신세계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문화예술계의 자산
정기헌 _ 박외선 선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정귀인, 남정호 교수님 두 분과 함께 박외선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박외선 선생께서 2011년에 작고하시고, 그 다음해 2012년 연낙재에서 작은 세미나를 겸한 대화와 기록을 진행했었습니다. 오늘 나누는 대화에 중복되는 내용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술가의 삶과 정신세계를 기억하고 다시 언급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문화예술계의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박외선 선생에 대한 언급이 100년의 삶에 관한 것이고, 우리 현대춤의 역사 또한 100년의 히스토리를 더하는 것이지요. 우리 춤문화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귀인, 남정호 두 분께서는 박외선 선생께 대학시절 가르침을 받고 그 후에도 여러 인연이 있었을 텐데요, 처음 뵙게 되었을 때의 기억들 먼저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정귀인 _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박외선 선생님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이화여대에 입학하면서 선생님을 알게 되고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남정호 선생도 같은 해에 입학해서 저와 동기예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무용계에 큰 어른이 계시다는 것을 알았어요.
저는 1학년 때부터 박외선 선생님 방에서 조교 비슷하게 심부름도 하고, 선생님을 도와드렸어요. 그래서 자주 뵐 수 있었죠. 그 이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쭉 많은 역사가 있었지요. 그런 역사와 추억들 때문에 매해 추모하는 날이 오면 마치 부모님 기일 같은 생각이 들어요. 올해가 박외선 선생님 탄생 100주년인데, 저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는 해라고 봅니다.
남정호 _ 제가 어릴 때 「가톨릭 소년」이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거기에 마해송 선생님의‘떡배 단배’라는 동화가 실렸는데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소천, 방정환, 마해송의 동화를 재미있게 읽던 시절이었지요. 그랬었는데, 나중에 이화여대 무용과를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께서 무용과 교수 중 한 분이 마해송 선생의 부인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분이 누굴까 궁금했는데, 입학해서 보니 박외선 선생이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박외선 선생이랑 종교적인 부분에서 묘한 동질감을 어린 마음에 느꼈어요. 이화여대가 기독교 학교라서 가톨릭은 마이너 집단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선생님의 세례명이 저의 어머니와 똑같은 세실리아였어요. 그래서인 마치 엄마 같고, 가족 같고, 기댈 수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어요. 또 마해송 선생님 글을 읽으면 맑음, 민족적인 정체성 그런 것이 느껴졌는데, 그런 분의 부인도 분명히 그런 점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믿음으로 선생님이 하시는 모든 말, 행동에 아주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4년 동안 지낸 것 같아요.

1963년 박외선 선생이 이화여대에 처음으로 무용과를 개설
정기헌 _ 박외선 선생은 일본에서 활동을 하고 국내로 귀국한 예술인으로 당시 신여성 중에 신여성이었을텐데요. 교육자로서 어떤 분이셨나 궁금합니다. 지금 두 분께서도 평생 교육자로 살고 계시는데, 박외선 선생께서 1953년에 귀국해서 처음에는 강사로 후에 교수로 재임하셨죠. 교육자로서의 주관이나 고집이라든지 철학 등을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정귀인 _ 그 당시에는 무용교육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화여대에 무용학과가 대학 사상 처음 개설된 것이 큰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3년에 처음 생겼지요. 52년 전에 박외선 선생이 무용과를 처음으로 만드셨어요. 전에는 춤 교육이라고 하면 전수하는 입장에서 기량을 가르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무용과 개설을 시점으로 해서 무용교육에 큰 획을 그은 거죠. 그때부터 교육과 춤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박외선 선생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 있어요. 그 당시 이화여대 무용과 졸업생이라면 다 기억하는 말입니다. 수업 시작 전에, 춤을 추기 전에 항상 하시던 말씀이에요. 수업 첫 오리엔테이션에서부터 ‘춤 이전에 인간이 되자’는 말씀을 하셨어요. 인간 교육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교육의 목표는 전인 교육이고, 무용과 예술교육으로 그 전인 교육을 하시겠다는 마음으로 우리를 가르치셨죠. 선생님께서 「무용교육론」과 「무용개론」 책도 쓰셨는데, 그보다도 ‘인간이 되자’는 한 마디에 선생님의 생각이 함축적으로 들어있지 않나 생각해요. 예술가를 키우는 입장보다 참 예술교육이 뭔지에 집중하셨어요. 물론 예술가로서의 교육도 많이 받았지요.
남정호 _ 제 생각에는 박외선 선생님이 무용 교육자로서 삼은 모델은 일본 유학 시절의 은사인 ‘다카다 세이코’라고 봅니다. 다카다 세이코는 다카다 마사오와 결혼해서 그 당시 러시아에서 온 발레 선생 로시한테 발레를 배우고, 창작 무용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가서 1년간 머물렀어요. 거기에서 데니숀 학교를 방문하고 테드 숀과 루스 생 드니를 만났다고 해요. 다카다 세이코의 당시 공연사진을 보면 그쪽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어요. 물론 공연뿐만 아니라 무용학원 운영도 4년제 학교 시스템으로 구축한 것을 보면 역시 데니숀 학교가 모델로서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카다 세이코 무용학원은 작은 무용교육 기관인데 일본근대무용의 무용가가 커나갈 수 있는 상당히 다양한 커리큘럼을 제공했던 것 같아요. 반면에 이화여대는 굉장히 큰 학교지만, 대학 내에서 보면 무용은 작은 비중을 차지하는 마이너한 분야잖아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독립적 무용학과로 만들려고 노력하셨어요. 선생님이 이대에 처음 오셨던 1953년에는 체육과에 소속된 무용 강사였어요. 그러다 부교수, 정교수가 되면서 드디어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신 거죠. 이대에 무용과를 만든 것이 자기 생애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수필에 쓰신 적이 있어요.
아까 정귀인 선생 말처럼 저도 대학 3학년 무용창작론 수업에서 선생님께서 맨 처음에 칠판에 커다랗게 ‘무용가가 되기 이전에 참된 인간이 되자’라고 쓰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귀인 _ 선생님께서 칠판에 쓰신 후에 우리에게 노트에 적으라고 하세요. 모든 노트에 쓰라고 하셨죠. 그런데 대학 1학년 학생들이 참 인간이 뭔지,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다 이해하지는 못했죠.
남정호 _ 선생님이 무용은 안 가르쳐 주시고, 왜 인간 이야기를 하시는지 그 당시에는 의중을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선생님 나이가 되니까 학생들에게 무용 테크닉 하나, 무용역사 하나, 무용 주변 이야기 하나보다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보면 교육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더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정귀인 _ 그 당시 박외선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하신 것은 교육자로서 정리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무용가들의 영향을 받아서인 것 같아요. 일본에서 러시아 발레와 독일 표현주의, 도리스 험프리나 메리 비그만의 스타일에 영향을 많이 받은 무용가들의 영향을 받은 거예요. 책에 보면 무대는 어떻게, 창작은 어떤 개념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아주 디테일한 이론들이 있어요. 우리가 그런 것을 처음 접해 본 거죠. 전체적인 이론과 창작의 베이스를 충분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굉장히 즉흥적인 표현을 많이 하셔서 따라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참 인간에 대한 말씀도 많이 하셔서 수업이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교육자 생활 30년이 넘어가 무용교육이 진정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니 그 말씀들이 얼마나 보물 같은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대부분 교육이 다 안무나 무용 테크닉 등 방법에 대한 것들인데, 선생님은 무대의 진솔함과 진정성을 가르쳐 주셨어요. 참 무용인을 만드시려고 하신 거죠. 대학 4년 내내 그걸 배웠고, 저도 우리 학생들에게 그걸 가르치려고 하고 있어요.

‘춤 이전에 참된 인간’… 무용과 예술교육으로 전인(全人)교육을 지향
정기헌 _ 지금 선생님들 말씀 들으면서 연관해서 질문하고 싶은 게 무척 많은데요. 박외선 선생님께서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서 귀국하셨을 때 이미 연세가 많으셨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활동을 안했던 시간도 꽤 길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연보를 보니까 어릴 때 마산에서 최승희 공연을 보고 자극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고 최승희 문하에서 조언을 듣고 바로 일본 유학을 가서 무용공부를 하게 되죠. 그리고 몇 년 뒤 일본 문화예술계에서 자기 이름을 걸고 활동을 시작했단 말이죠. 그 젊은 나이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 사이에 정말 많은 것을 이루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 대해 들으신 이야기가 있나요? 또 일본 사회에서 어떻게 자리를 잡으셨는지, 어떻게 다방면의 예술가들과 교류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영상 쪽의 작업도 함께하는 이들이 있었고, 또 아까 말씀하신 미국의 유명 교육기관이나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펼치려고 할 때의 이야기를 들으신 게 있나요?
정귀인 _ 선생님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호기심 많은 마산여고 1~2학년 때 최승희 지방 공연을 보고 너무나 충격과 감동을 받으셨다고 해요. 그 공연을 보고 나도 춤을 춰야겠다, 예술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반대를 하셨다고 해요. 반대를 무릅쓰고, 춤이 아닌 다른 공부를 하러 간다고 말씀드리고 일본에 가서 처음에는 불문과에서 공부를 하셨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무용 공부를 하신 거죠.
일본 무용계에 계실 때,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기가 막힌 미모를 갖고 계셨어요.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