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홍은주의 『바라기V 동행, Waiting(웨이팅)…』(9월19일 서강대 메리홀)
공연예술로서의 무용은 다른 예술에 비하여 특별하다. 먼저 다른 공연예술양식과 비교하여 보자면, 연극은 주로 씌어진 줄거리의 대본을 적절한 무대장치 속에서 배우들의 대사로 풀어서 보여주는 것이고, 음악연주는 정하여진 선율을 연주자의 호흡과 느낌에 따라 해석하여 야외로 퍼지는 혹은 실내 공간에서 부딪히는 음의 파동들을 전달하는 것이기에,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되거나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무용무대는 그것이 서양적인 것이든 한국적인 것이든 현대적인 것이 되면서 곧잘 어떤 개념이나 감상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일정한 줄거리가 없기 쉽고, 나아가 그 예술수단에 내재하여 있는 모호함으로 인하여 줄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표현이 구체성을 띠기 쉽지 않으며 배치와 움직임 등을 포함하는 무용 자체가 구체화된 언어나 표현형식으로 출발하거나 남기 어려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일정한 크기 이상의 무대 위에 올리게 되는 공연예술로서의 무용은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혼자를 혹은 자신들만을 위하여 하는 무용과도, 클래스에서 수련을 위하여 하는 무용과도 구별된다. 그것은 우선 일정 규모 이상의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나아가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의도하는 것이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더욱 적극적으로는 최소한 관객을 마음으로 함께 참여시켜서 무언가 공동의 것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 된다.
2015년 9월19일과 20일, 서강대학교 메리홀에서 열린 『홍은주의 바라기V 동행, Waiting(웨이팅)…』의 리을무용단 제30회 정기공연(예술감독 오은희, 안무 및 연출 홍은주, 조안무 곽시내)은, 구체성에 친숙하지 않은 표현양식을 가진 무용무대 위에서 한국적인 정서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관객과 함께 좋은 것을 희구(希求)하고자 하는 일종의 제의적인 무대였다.
또한 그것은 시원(始原)적인 무용의 주술적이고, 마법적이며, 의식적인 본질에 가 닿는, 무용무대의 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한 시대를 살고 있는 무용가가, 제약을 가진 표현양식을 사용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그러한 예술을 구현하는 안무가이면서 동시에 무대 위의 무용수로서 활동하면서, 그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펼쳐지는 육면체 블록의 레이저 입체영상은, 비록 대중화된 상상력의 한계 내에 있는 듯 하지만, 현대의 기술을 무대 위에 충실히 반영하고자 하는 작자의 성의와 열의를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작품의 제작의 동기 혹은 배경이 되는, 개인으로서의 삶과 그가 있는 사회와 시대적 상황에 대한 진단의 요약문이 된다. 웅크린 채 쓰러져 있는 사람들 위로 서 있는 주인공에게 던져지는, 무용무대에서는 사족적일 수 밖에 없는 대사는, 뭐하고 있는가 하는 자신에 대한 의식의 자각,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근원에 대한 의문, 집은 어디인가 하는 소속에 대한 자문들이다.
내려오는 12개의 전등갓에서는 전등이 켜지고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사람들의 삶이 조망되기 시작한다. 옅은 조명 아래에서 일어나 앉은 그들은 전통 춤사위에서 차용한 갖가지 느린 혹은 정지된 동작들을 보여주다가 휘감듯 일어서고는 곧이어 하나 둘씩 사라진다. 다시 등장하는 그들은 제각기 “나”라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오는데, 그 외침은 집단적 열광이나 광기의 샤우팅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처음 깨달음의 소리 같은 것이다. 이어지는 군무는 언뜻 한국적인 곡조인 듯 하나 리듬은 그다지 한국적이지 않은 서양적 왈츠의 3박자의 음악에 따라 펼쳐지는데, 흥겨운 율동인 듯 시작한 다음 모두들 리듬에 맞추어 앉은 채 다리로 하는 바닥쓸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남자 무용수 3인에 의하여 추어지는, 여러 형태로 응용되어 나타나는 삼각 조명의 춤은 셋의 관계에 대한 출발과 관계의 쌓임, 어느 하나의 따돌림, 감정의 겹침, 그리고 삶의 퇴색됨과 지쳐서 피로하게 됨 등을 보여주고 있다.
탱고풍의 음악을 배경으로 한 꼭둑각시 인형과 같은 몸짓의 춤, 알맞게 배치된 비스듬히 기운 어깨춤을 지나서, “네”와 “너“의 외침에 이르면, 우리나라의 정서에 몸을 실은 지나온 여성들의 삶에 대한 회고가 시작된다. 그 회고는 여성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사회적 억압의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시각을 고려한다면, 물론 아직도 조선시대와 같은 그러한 사회의 여성에 대한 압제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살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리고 의상이 주는 느낌 탓으로 그러한 점이 부각되어 보일 수도 있는 것일 터이지만, 보다 앞서가는 진취적인 시각을 보여주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있는 듯도 하다. 천을 밀어서 내밀고, 풀어 헤치고, 휘둘리게 하고, 펼치고, 다시 감아쥐면서 추는 춤은 여인들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듯 하다. 손에 든 것은 대개 신체의 연장이 되는 것인데, 이 경우 천이란 적절한 재료인 것이 여인들의 마음의 연장도 되기 때문이다.
작품이 중반을 지날 때면 신문기사에서 따온 듯한 대사가 무대 위로 울려 쏟아지고, 그리고는 공중에 매어 달린 줄과 같이 무대 위 평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한 줄기 조명이 비춰진다. 무용수들은 그 위를 지나가는데, 그 대각선은 곧 사라지고 맞은편에서 또 다른 대각선의 조명이 나온다. 그러면 역시 다른 무용수들이 짧은 단막의 무도행렬을 벌이듯이 그 위를 지나간다. 아슬한 느낌을 함축한 가운데 그들의 동작도 더욱 대담해 진다.
무언가를 기원하는 제의에는 여러가지의 구성이 있을 수 있다. 무용무대에 따르는 한국적인 음악은, 몰아적인 기원, 열렬한 기도, 엄격한 절차에 의한 의식에 적합하기 보다는, 힘든 상황을 보여주고 그것을 풀어가는 한풀이라는 차원에서의 제의에 적절한 듯하다. 그 가운데 비트음악이 가세하여, 다소 지배적이고, 다소 가학적인 차원의 2인무가 보여진다. 뒤에서 군중이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가운데서이다. 그리고는 그것이 무대의 일이 아니라 일반 사회의 일이라는 듯이 관객을 향하여 조명이 뿌려진다.
이제 다시 주인공(홍은주)이 가만히 나타나 조금씩 움직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움직임들은 서서히 그가 이 모든 제의를 주관하는 자임을 밝히기 위함이다. 그는 모든 것을 조종하는 그러한 지배자로서의 제관도 아니고, 군상들이 그를 떠받드는 영웅적인 1인도 아니다. 그는 다만 그 자신이 그 모든 제의의 주관자라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제주(祭主)이다.
군무는 시대적인 여건과 상황을 훑고 나서 본격적인 풀이로 나아간다. 작품의 절정은 주인공이 이끌기 시작하여 모두가 함께 추게 되고 다시 주인공만 남아서 추는 네 마디 리듬의 동작에 있다.
첫 마디는 왼발을 축으로 멍석에 말리듯이 오른손은 어깨 높이쯤 몸 앞으로 하고 왼손은 허리 뒤로 돌려서 오른쪽 시계방향으로 공중에서 반 바퀴 내지는 한 바퀴를 뛰어 돌고 한 두 걸음 내딛기, 두째 마디는 방향을 바꾸어 오른발을 축으로 같은 식으로 왼쪽 반시계방향으로 공중에서 뛰어 돌고 한 두 걸음 내딛기, 세째 마디는 양손을 앞에서 위로 올리며 오른발을 적당히 뻗은 채 앞으로 드는 무속에서의 양사우치기와 같은 동작, 그리고 마지막 마디는 오른발 옆으로 짚으며 양손 날갯짓을 하는 나래체의 동작과 왼발 옆으로 짚으며 같은 양손 나래체의 동작을 하는 것이다. 처음 두 마디는 관습과 편견과 사회적 폭력과 억압에 시달리는 현실을, 세 번째 마디는 그것을 자각하고 떨치고 일어나는 깨달음을, 마지막 마디는 기원과 희망을 담은 비상(飛上)을 표현하는 것이니, 이 동작에 이 작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하여도 좋을 것 같다.
이 동작 자체로도 훌륭하게 완결된 ‘바라기’의 춤이 계속 반복되는 가운데 이를 동반하여 쏟아지는, 기다렸다고 기다리겠다고 하는 대사는, “가족을 기다리고, 시간을 기다리고, 안전을 기다리고, 평화를 기다리는, 무엇보다 하나 됨을 기다리는”, 안무가의 ‘바라기’로서의 바램을 함축하고 있다.
이윽고 작품은 은근한 조명과 정가(正歌)적 발성의 선율 속에, 주인공의 기원에 찬 느리고 단아한 몸짓으로 마무리된다. 우리의 삶과 시대를 되짚어 보고 마음을 담아서 기원하는, 현 시대의 제주(祭主)로서의 무용가의 역할을 보여주고 생각하게 하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