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 공연평

* 이경옥 안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2월4~5일 서강대메리홀 대극장)
이경옥의 안무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루이스 캐럴의 동명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원작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기대어 ‘원더랜드(Wonderland)’를 창조하고, 그곳에서 앨리스라는 소녀가 겪는 모험을 내용으로 한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내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2015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출판된 지 150년이 된 해여서 크고 작은 기념 이벤트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국내에서도 새로운 번역본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번역자마다 해설과 주석 등 다양한 관점의 내용을 덧붙여 소설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만큼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점에서도 재미있는 작품이다.
이경옥의 작품은 동음이의어가 주는 언어유희의 묘미나 사회풍자의 내용이나 정신분석 혹은 관습과 같은 소설의 내용보다는 환상의 세계를 무대화함으로써 상상력 가득한 동심을 자극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공연의 제목만 보면, ‘이상한 춤의 나라’ 혹은 ‘이상한 나라의 춤’을 모험한 앨리스의 색다른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예상과 달리, 동화를 소재로 한 이경옥의 전작들이 그로데스크한 연출을 특징으로 동화를 기이하게 비틀어버린 데 반해 이번 작품은 비교적 평범하게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12월을 염두에 둔 것처럼, 공연은 마치 송년 가족극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안무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그 진중한 의미는 정확하게 제시된다.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공연시작과 더불어 펼쳐진 한 장면이 드러낸다. 그림자극처럼 빛을 이용해 스크린에 투영된 이미지는 주인공 앨리스를 둘러싸고 그에게 퍼붓듯 쏟아지는 ‘입’과 ‘손가락’들이다. 한마디로 그것들은 수많은 ‘말들’이다. 우리는 이러쿵저러쿵, 이래라저래라, 타인의 의식과 시선 그리고 충고와 지적이 쏟아지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길을 잃는다. ‘나는 누구인가’. 말하는 토끼를 쫓다 땅 속 지하세계로 떨어진 앨리스의 모험은 바로 그와 같은 주제의식에서 출발한다.
2010년 팀 버튼 감독의 영화도 그렇게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약혼을 강요당한 주인공이 선택을 해야 하는 결정적 순간에 토끼를 쫓아 자리를 뜨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좋다는 타인들의 다수의견이 주인공을 다그치고, 정해진 답이 내키지 않은 주인공은 망설이다가 도망치듯 나와 ‘원더랜드’로 들어가게 된다. 신기한 나라에서 겪는 모험들, 즉 송충이, 모자장수, 체셔고양이, 공작부인, 붉은 여왕 등 갖가지 존재가 등장하는 어떤 위험한 상황, 황당하고 불합리한 상황, 난감하고 곤란한 상황 등을 맞닥뜨리면서 앨리스의 사고력과 판단력이 성장한다. 용기와 신념도 생겨난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재판에 증인으로 나선 앨리스가 어이없는 판결에 분연한 것처럼, ‘무서워하지 않고’ 소신을 밝힐 수 있게 된다. 영화에서도 괴물과 맞서 싸울 때는 혼자이기 때문에 결국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남들에게 떠밀려서 결정하면 안 돼”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은 ‘나’이기 때문이다.
이경옥의 작품은 주제의식과 관련해 새로운 스토리를 전개하지 않고, 원작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신기한 상황들을 이미지화해서 흩뜨려놓는 식으로 익숙한 앨리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무대에는 크기를 달리한 여러 개의 큰 틀이 세워져 있는데, 뒤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서 입체감을 더한다. 이 설치물은 마치 ‘관문’과 같아서 그 너머에 다른 영역을 암시한다. 그리고 멀티미디어를 이용하는 이경옥무용단 특유의 연출법으로 무대 전체가 장면마다 새롭게 공간화된다. 장소의 바뀜은 영상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의 의상에서도 시각적으로 부각된다. 그 외에도 철제구조물이 움직이며 공간을 변형시키는데, 특이한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더해져 앨리스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에서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그런 주인공의 모습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이런 저런 상황에 떠밀려 길을 잃고 헤매듯 살고 있는 현대인들을 연상시킨다.
이것은 어른들을 위한 주제이지만 춤이나 연출이 의외로 어린이를 위한 동화처럼 편안하고 무난하게 펼쳐진다. 마지막까지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요소가 없이, 전반적으로 기괴함이나 특이함에서 다른 작품에 비해 수위가 낮은 편이어서 어찌 보면 좀 심심하다는 인상이다. 다시 말해, 원더랜드 같지 않다. 클래식발레 『호두까기인형』 2막 ‘클라라의 꿈’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처럼 다채롭기는 하지만, 이상하거나 신기하다는 놀라움이 없기 때문이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는 모자장수(Mad Hatter)가 마지막에 ‘으쓱쿵짝춤(Futterwacken)’을 추는 장면이 있다. 원작에서는 ‘바닷가재의 춤’이 언급되긴 했으나, 여러 영화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런 장면들은 ‘왜 춤일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리고 항상 같은 답에 도달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춤을 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춤 외에 다른 무엇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경옥의 작품에서 ‘나를 찾아’ 떠난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나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다면 무슨 춤을 췄을지도 모른다. 공연은 관객 각자가 앨리스이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지만, 관객과 함께 원더랜드로 빨려들어가기에는 앨리스가 잡아끄는 힘이 약하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