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무기

■ 장유경의 춤 『시인의 강(江)』(11월 26~27일 대구오페라하우스)

예술은 무한을 다시 부여하는 유한을 창조한다. - 들뢰즈

우리는 화려한 기교로 치닫는 춤에 어지간히 지쳐가고 있다. 오히려 춤동작보다 동작과 동작이 이어지는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 그리고 침묵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되었다. 장유경의 춤 『시인의 강』은 이러한 시선 바꾸기에 비중을 두고 전통춤 승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내고 있다.
지난 11월 26, 27일 양일간 대구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된 장유경의 춤 ‘시인의 강’은 비형태인 물을 그 생성에서 시작하여 일대기를 춤으로 형상화해서 보여 주고 있다. 마고트 폰테인이 쇼팽의 곡에 맞추어 『공기의 정』이란 춤을 춘 시기가 장유경 교수의 지금 연배에 가까운 즈음이었다. 그런데 공기는 아예 형태를 볼 수 없어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할 수 있지만 물은 볼 수 있으나 정형화될 수 없어 그것을 형태화한 표현이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무척 어려운 작업이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 은유적 표현에 의해 작품명이 ‘시인의 강’이었는지 모른다.

물은 투명한 속을 수줍게 드러내며 물하고 만난다. 서로 인사하고 표면장력이 풀리고 하나가 된다. 자연 광선의 조명이 편안한 느낌으로 무대 위에서 내려와 공간을 채우는 가운데 물은 물끼리 만나 기슭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물은 물을 만나 들녘을 열어 간다. 강은 흐르는 강물 소리를 내고 침묵이 있었던 자리에 들어선다. 장삼 자락이 허공에 펼쳐지듯 강은 빈 공간으로 뻗어간다.
장유경 교수는 공간을 출현시키는 형상, 침묵을 이끌어 오는 소리로 현대 예술의 새 지평을 여는 작업을 아시안 게임 개막작품에서부터 시도해 오고 있다. 해질녘 군집된 다듬이 소리가 침묵을 동반하고 다가와 군중의 소음을 일시에 삼키는 장면은 큰 감동으로 기억된다.
공간은 채움 이상의 것이다. 공간으로부터 나온 형상은 다시 공간의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시선을 돌리게 한다. 공간은 창안되지 않았음에도 영속적으로 세계에 확장되어 있다. 장유경의 춤은 이러한 공간의 비형상성에 형상을 나타냄으로서 비로소 공간의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한국 전통춤인 승무의 춤 동작에 그 바탕을 둔 『시인의 강』은 무대 조명과 무대 설치 미술이 극히 생략되어 상징성을 띠고 있어 신비로 변하게 한다. 자연광선에 드러나는 무대 배경은 ‘있음’에 대조되는 허공 뿐이어서 펼쳐내는 구조가 존재의 끝자락이 아니라 열려지는 공간으로 관객의 시선을 확장시켜 나간다.
물의 속성인 유동성과 투명성이 상상력에 의해 잘 반영된 무대의상은 그 은유적 표현이 놀랍다. 춤은 기교에 중점을 두지않고 머스 커닝엄의 춤을 연상시킬 만큼 단조로운 반복 동작이 타악기에 맞추어 흐르듯 하다가 광풍을 동반한 큰물을 연상시키는 큰 동작은 장쾌감을 주기도 했다. 물이 물을 만나고 함께 모여 흐르고 굽이지면서 허공을 여는 천삼백 리 길을 이어가는 대군무와 유려한 장유경의 춤을 보면서 사유하는 강을 표현한 저력의 대작임을 실감케 했다.
강은 공간을 열어 천삼백 리를 뻗어 낙동강이란 이름을 얻었다가 남해로 흘러들어서면서 이름은 거두어진다. 강은 바다에 들면 이름이 없다. 막도 내린다. 장유경의 춤무대는 항상 내린 막이 다시 오르면서 관객들에게 반전의 유쾌함을 선사한다. 흘러들어가는 강물로서의 춤꾼들은 수평선을 향해 서 있다. 자연 광선 조명 아래 등을 돌린 군무진의 새하얀 의상을 한 조형들이 일시에 관객 쪽으로 몸을 돌려, 천삼백 리 여정을 열어가면서 동일감성이 된 관객들의 박수 소리 속에 묻히는 장면은 큰 감동이었다.
장유경의 춤예술에서는 인간의 몸이 오브제가 되기보다 자연, 우연, 인간의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 이러한 관계에 대한 사유는 보편적인 개념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변화와 생성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하나의 개체도 순수하게 정의되지않고 여러 개의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다수성으로 설명한다. 비형태, 비물질적, 연속성 등의 현대 철학을 사유하며 장유경의 춤을 설명해 본다. 2013년 무대에 올려진 『1.5』가 인간의 삶을 끊임없는 변화와 생성의 연속성으로 해석한데 이어 2015년에 올려진 『시인의 강』은 역시 현대성의 특징인 비정형성에 관점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