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시향

지난 호에 꽃이 아니지만 꽃보다 더 뜨겁고 꽃보다 더 서러운 꽃. 서리꽃을 띄웠더랬지요. 이번 호에도 서러운 꽃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꽃이면서도 꽃이라 불리지 못하는 서러운 꽃. 네 무화과입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중년의 세대들에게 무화과 하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지요?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김동원 작사, 이용 작곡) 말입니다.

“그대여 이렇게 바람이 서글피 부는 날에는 / 그대여 이렇게 무화과는 익어가는 날에도 / 너랑 나랑 둘이서 무화과 그늘에 숨어 앉아 / 지난 날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싶구나 / 몰래 사랑했던 그 여자 / 또 몰래 사랑했던 그 남자 /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 그 누굴 사랑하고 있을까”

90년대 초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몰래한 사랑을 무화과에 빗댄 노래이지요.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했던 무렵이었는데, 엠티나 혹은 이런저런 모임 때면 기타 반주에 맞춰 참 많이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합니다. 제가 무화과라는 꽃 혹은 과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 전적으로 저 노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무화과(無花果)를 글자그대로 해석하면 ‘꽃 없이 맺는 열매’란 뜻입니다. 그런데 실은 틀린 얘기이지요. 사실은 그 열매 속에 꽃이 피었지요. 속꽃이지요. 겉으로는 열매만 보일 뿐 꽃이 보이지 않으니 그 속의 꽃을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은 그저 무화과라고 부르며 신기하게 여겼던 것이지요. 다만 그 서러운 속사정을, 서러운 속꽃을 일찍이 간파한 가인들과 시인들만이 무화과를 꽃으로 불러주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화과는 당신이 좋아하는 열매

책장을 넘기며 무화과나무가 들어찬 숲을 상상한다
유래되지 않은 수유방식에 대해
농익은 향기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궁금해한다

암술과 수술이 교접하는 꽃방을 보여주지 않는 습속은
꽃자루가 비대한 무화과나무의 허와 실
아무도 몰래 꽃을 삼킨 둥글고 달콤한 생각의 뿌리에는
사슴뿔을 단 늑대가 서식한다

뿌리가 극단의 열매라면,
열매의 속살을 비집고 나온 본성을 바람이 먼저 흔든 것이다
바람의 혀끝이 부드럽게 닿았을 뿐인데 흘러내린 과즙은
날카로운 이빨에 물어뜯긴 피의 맛

가지가 무르기 전에 여름이 왔다

내가 이미 뿌리에 놓였으니 당신은 꽃을 보려고 하지마라
꽃턱이 자란 열매는 꽃을 보여주느니 꽃보다 먼저
자진할 것이다

하지 마, 하지 마, 두 마리의 짐승이 잎사귀를 흔드는 저녁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는 극단을 가린
최초의 그늘 혹은

벌거벗은 서녘이 사슴뿔에 걸릴 때
당신이라는 페이지 속에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툭, 터졌다
- 강영은, 「無花果」 전문

강영은 시인은 무화과를 가리켜 꽃을 삼킨 과일이라고 합니다. ‘꽃없는 과일’(無花果)이 아니라, 꽃 없이 맺은 열매가 아니라, 기어이 꽃을 삼킨 열매랍니다. 그러나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창세기의 한 풍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고 비로소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알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리게 되었다는 창세기 3장 7절을 기억하면서 다시 이 문장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 마, 하지 마, 두 마리의 짐승이 잎사귀를 흔드는 저녁 /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는 극단을 가 린/ 최초의 그늘 혹은 // 벌거벗은 서녘이 사슴뿔에 걸릴 때 / 당신이라는 페이지 속에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 툭, 터졌다”

어떤가요? 시인이 전하는 메시지가 느껴지시나요? 그렇다면 또 하나의 시를 읽어봐야겠습니다. 강기원 시인의 시, 「무화과를 먹는 밤」입니다. 아, 이 시를 읽기 전에 이번에는 성경 대신 꾸란의 한 구절을 기억하는 게 좋겠습니다.

무화과와 올리브와 시나이 산과 성스러운 도시 메카를 놓고 맹세하노니 인간은 가장 위대한 형태로 창조되었으나 비천한 것 중의 비천한 것으로 떨어졌노라.
- 「꾸란」 95장 1-4절

다 읽으셨다면, 이제 강기원 시인의 시를 읽어보겠습니다.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무화과를 먹는다
심장 같은 무화과
자궁 같은 무화과
발정 난 들고양이 집요하게 울어대는 여름 밤
달빛, 흰 허벅지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물컹거리는
무화과를 먹는다
농익은 무화과의
찐득한 살
피 흘리는 살
- 강기원, 「무화과를 먹는 밤」 전문

다시 말하지만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잘못이지 무화과는 죄가 없지요. 무화과는 억울한 누명이지요. 단지 다른 꽃과 달리 열매 속에 꽃을 피웠을 뿐이지요. 열매가 꽃을 품었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열매가 꽃을 품은 것이 죄일까요? 아니면 열매가 품은 속꽃을 보지 못함이 죄일까요? 생각하면 속꽃을 보지 못한 자들의 풍문이 무화과라는 낙인을 찍고 무화과를 죄인으로 만든 것이지요. 무화과는 오히려 무지와 비열함이 만들어낸 속죄양이지요. 그러니 ‘죄에 물들고 싶은 밤’이라는 시인의 말은 역설이지요. 시인은 ‘발정 난 들고양이’ 무리로부터 “무화과라는 낙인”을 “무화과라는 주홍글씨”를 무화과에게서 지워주고 싶은 것이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무화과는 성서와 꾸란에 등장할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해온 과일 중의 하나입니다. 인류가 심었던 가장 오래 된 꽃 중의 하나입니다. 지중해에서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그 분포도 광범위하지요. 다만 우리나라는 기후조건 때문에 주로 남쪽에서 자라는데, 그중에서도 전라도 영암이 무화과로 유명하지요.

우리나라에서 무화과를 처음 본 사람은 연암 박지원이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연암의 열하일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잎은 동백 같고 열매는 십자 비슷하다. 이름을 물은 즉 무화과라 한다. 열매가 모두 두 개씩 나란히, 꼭지는 잇대어 달리었고, 꽃 없이 열매를 맺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한편 무화과는 은화과(隱花果), 은두화(隱頭花), 은두화서(隱頭花序) 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무화과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꽃이 보이지 않은데서 유래한 이름들이지요. 그런데 이 무화과를 부르는 이름 중에서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는 예전부터 무화과를 “젖꼭대기”, “젖꼭지”, “젖꼭지 나무”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 생긴 모양 때문인지 아니면 무화과가 모유 분비를 촉진해주는 효능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는 영어로 피그, Fig입니다. 돼지를 뜻하는 pig가 아니라 fig. 그러니 외국의 레스토랑이나 까페 메뉴에 fig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그 요리는 무화과를 재료로 쓴 것이라는 것. 팁으로 알려드립니다.

사실 오늘의 글은 무화과가 지닌 어떤 서러운 정조(情調)를 들려드리려 했던 건데, 웬일인지 생각처럼 글이 되질 못했습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면서 마지막으로 졸시, 「무화과」로 글을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몽룡이
꽃 없는 애무는 적막하다고
옮겨 적으니

춘향이 받아
꽃 없이 꽃 피우는 것은 간절이라고
고쳐 적는다

간절이 지핀 불꽃
무화(武火)가 무화(無花)를 태우면서
별리의 정을 나누니

춘향이 붉다
몽룡도 따라 붉다
- 박제영, 「무화과」 전문

무화과는 금기(禁忌)와 에로틱을 품은 꽃이지요. 어쩐지 서럽디 서러운 정조(情調)가 느껴지는. 춘향과 몽룡을 통해 그러한 무화과의 느낌을 그려본 것인데, 글쎄요 여러분은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