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한 주를 정리하는 매 일요일 늦은 밤, EBS에서는 추억의 한국영화를 방영하는 한국영화특선을 몇 년째 방영해오고 있다. 이 프로그램 때문에 가끔 새벽 1시가 넘어서 잠을 청하게 되는데 최근에는 작가 최인호가 198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을 영화화 한 곽지균 감독의 「겨울 나그네」(1986)를 방영했다. 오래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하도 오래되어 마치 처음 본 것 마냥 새로워서 기억에 남는 부분이 몇이나 있나 한 장면 한 장면을 쫓아가다보니 영화 한 편을 다 보게 되었다.

대학 캠퍼스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의대생 민우는 첼로 전공생 다혜와 부딪히는 계기로 친해지지만, 민우의 가정은 순탄치 못하다. 그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신세이다. 그 때문에 교도소까지 가게 되는데 복역하는 사이 아버지는 죽고 의붓어머니는 이복형을 데리고 이민을 가버린다. 형기를 마친 민우는 기지촌에 살고 있다는 친 이모를 찾아가 밀수범이 된다.
잠적해버린 민우를 찾던 다혜는 민우의 선배인 현태와 자주 만나게 되면서 서로 호감을 가지며 의지하게 되는데 현태는 이미 다혜를 처음 본 순간부터 반했던 터, 민우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는다. 민우는 다혜를 잊지 못하면서도 자신과 어울리는 여자는 기지촌의 접대부 은영이라고 생각하며 살림을 차린다. 다혜는 현태와 결혼하고, 밑바닥까지 추락한 민우는 자포자기하며 자살하기에 이른다.

장면 곳곳에서 배우들의 나름 진지하게 연기하려는 모습이 보임에도 현실감이 떨어지는 복고풍 연기를 지적하느라 비련의 주인공들의 사연과 엇갈린 삼각관계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86년의 당시 (주로) 여성 관객들은 비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민우에게 동정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비련의 주인공 민우를 동정하며 이미 우리사회에서 실종되어가는 단어인 ‘순수’를 투영해보려 했을 것이며, 동시에 민우와 다혜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취한 현태는 기회주의자로 낙인찍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지적한 것은 복고풍 연기가 아니라 저 주인공의 갑갑한 선택인 것이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겨서, 혹은 군사독재시절을 겪으며 전국에 만연했던 패배주의는 신파극이나 영화 속에서 주로 남녀주인공의 실연과 배신 끝에 자살로 표현되었다. 주인공 민우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답보적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셈이다.
흑백논리로 구분 짓기 좋아하는 관객들로서는 가족도, 애인도 빼앗긴 채 불행하게 살다간 민우는 불쌍하다는 이유만으로 선이며, 민우의 애인과 결혼해 안락한 생활을 꾸린 현태는 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며 이러한 현태와 결혼한 다혜 역시 우유부단한 나쁜 여자라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픽션이어서 망정이지, 논픽션이었다면, 적어도 민우를 선하거나 착하다고만 볼 수 없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이 착하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이리저리 휘둘리게 만드는 것도 자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현태나 다혜가 했던 선택을 대다수도 할 것이고 또 그것이 현명하다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민우를 동경하고 그의 불행에 눈물을 흘리는 것은,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들춰내지 않아도, 자신들은 민우처럼 살지 않을 거면서 남은 그렇게 살아주기를 바라며 단지 그의 불행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약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흥부놀부」나 「장화홍련」 등과 같은 권선징악 류의 전래동화를 들으며 커왔다. 폭력적인 형제나 부모와 같이 쉽게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로부터 이유 없이 저항 한 번 못해보고 당하거나 휘둘리는 사람들은 선으로, 이들을 괴롭히는 사람은 악이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해왔다. 대개 가족이라는 이름아래 속절없이 당하는 쪽은 오히려 돌보아주고 지켜주어야 할 가장 어린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강자인 연장자에게 대들면 한국 정서상 불효 내지는 건방진 행동이므로 전래동화에서 묘사되는 선은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백치처럼 무방비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래저래 위치적으로 어린 약자는 휘둘리게 마련인 불공평한 사회이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을 뒷받침 해주듯 잘해주고 착하게 구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오히려 착한 사람들을 만만하게 보고 함부로 대하며 방어적으로 대하면 어려워한다. 내 주위에도 조금만 이야기하다보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이 틀림없는데 굳이 냉소적이거나 우악스러움 등으로 고슴도치마냥 자신을 감추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착하면 당한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라도 강한 척하려고 자신을 내몬다. 현실에서는 마냥 잘해주고 착하게 대해주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며 가상현실에서 불행을 겪는 민우와 같은 주인공에게는 기꺼이 눈물을 흘리는 아이러니는 오늘날 학교, 직장 등 모든 공동체에서 볼 수 있으며, 한국이 이러한 문제점이 가장 많은 나라 중 하나일 것이다. 그냥 남이 순수하게 선심을 베풀면 나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정글과 같은 현실이 슬퍼지게 된다.

이쯤 되면 인간의 선은 무엇인가 무엇이 착한지에 대한 기준을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냐면 약자가 선이라면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세상을 괴롭게 살아야하나 싶기 때문이다. 강자 혹은 악인에게 휘둘리는 쪽도 어떻게 보면 자신을 그렇게 되도록 남들에게 허용하는 것은 아닌지도 반문해 볼 문제다.
최근 인천 연수동에서 일어난 2년 동안 11살의 친딸을 감금 및 상습 학대와 폭행을 일삼았던 사건처럼 자신의 손발을 묶어놓은 듯한 불가항력의 상황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린아이라도 아파트의 파이프를 타고 내려가 주위사람에게 알렸듯이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본능인 것이다. 게다가 11살짜리임에도 친부의 처벌에 동의할 정도의 판단력은 비록 육체는 학대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을 지언 정, 그 정신만은 똑똑히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 어른들이라면 자식이 부모의 처벌을 원했다는 놀라움이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강도보다 더 큰 것이 대한민국 정서일 것이다. ‘그래도 내 아빠인데’, ‘가족인데’, ‘어떻게 감히’ 이러한 생각이 이 소녀의 생각을 지배했다면 소녀 자신도 언젠지도 모를 죽을 때 까지 자신을 만신창이로 방치하는 꼴이 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도 계속 죄를 저지르도록 내버려두는, 자신과 상대방 양쪽에 못할 일을 시키도록 방치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소녀가 오히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진짜 가장이자 효녀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많은 가정의 약자들이 폭력에 노출되었기에 초자연적인 전래동화들이 나왔으며 인간적인 정이라는 인간적인 사슬에 매여 희생되었을지 생각해 볼 때, 착하다 여기는 한국 전래동화의 이야기들의 인물들에게서는 우리가 보고배울 점이 별로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는 속담이 새롭게 들리는 이유도 아무리 불의한일을 당해도, 그 때문에 평생을 피해를 당해왔다고 하더라도 정신마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힘든 것은 안다. 그러나 자신을 보호하는 일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평소 자신을 사랑하며 올바른 가치관과 정의로운 생각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삐뚤어진 사고의 그 작은 출발점은 자신에 대한 비하와 불신이며 피해의식으로 이어져 끝내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며 끝내는 만족과 행복을 모르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 역시 자기 비하로 되풀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자신의 영역과 권리를 지키려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것이며 그 방법을 스스로라도 찾아야 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요한복음 18:22~23)
한 지식 사이트에서 어떤 이가 과잉충성 하느라고 제사장 앞에서 예수님 자신을 때린 자에게 “왜 때리느냐”며 납득이 안가는 처우에 항의하셨다는 사실에 그 유명한 마태복음 5장39절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는 말씀에 의거해서 예수님의 태도가 이율배반적이 아닌지를 묻는 네티즌을 발견해서 놀랐다. 다른 뜻이 아니라 선하고 착하다는 인식이 아까도 언급한 전래동화의 주인공에 대한 일종의 로망과 현실적 문제를 혼동하는 사람을 발견해서 그런 것이다.
순하고 나이브(naive)한 것만으로 선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나이브란 어린이에게는 ‘순진하다’는 뜻이 되지만 어른에게 쓰게 되면 ‘멍청하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인간적인 동정심과 연민을 이용한다. 그래서 우리는 흔들림 없는 마음의 중심을 잘 간직해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설령 내가 악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을지언정 마음만은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동안에 내 자신이 악인으로 변질된다면 차라리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내 마음과 영혼을 지키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라고 말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