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산책

오랜만에 매튜 본의 뉴 어드벤처스(New Adventures)가 내한했다.
이번에는 차이코프스키 3부작 중 뉴 어드벤처스가 보류했던 마지막 작품인 『잠자는 숲속의 미녀』로 아시아 국가 중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그 선을 보였다. 이번 공연의 줄거리는 『하이랜드 플링, 낭만적 발레소품(Highland Fling, Romantic Wee Ballet, 1994)』, 『호두까기인형! (1992)』, 『백조의 호수 (1995)』 그리고 『신데렐라 (1997)』 등의 전작 고전 발레의 재해석들과는 달리 가장 보수적으로 재해석한 느낌이었다. 우선 이야기의 배경을 영국으로 옮긴 것과 시간대를 바꾼 것을 제외하고는 이야기의 큰 틀은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번 매튜 본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국내에 소개된 전작들과는 달리, 내한 이전에 DVD가 먼저 출시되어 관객몰이가 어떨지 약간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의 기우일 뿐, 매튜 본의 작품을 봤던 관객들은 영상과는 달리, 무대에서 보여지는 작품은 또 어떨지에 대한 궁금증과 매 번 달라지는 배역들의 연기력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컸는지 전석 매진까지는 아니더라도 매 회 좋은 자리를 구하기 힘들 정도로 높은 예매율을 보였다.
왕궁의 화려하고 화사한 무대와는 달리 검정과 금색의 인상이 부각되는 어두침침한 톤의 이 작품의 무대는 마치 춤의 『오페라의 유령』을 추구하려는 듯 보였다. 『하이랜드 플링, 낭만적 발레소품』이래 미술감독을 맡고 있는 레즈 브라더스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공연의 시종 내내 남아있는 무대 양측의 기둥들 - 다시 말해 큰 틀은 유지한 채 내용물만 바꾸어 경제성을 꾀하는 방식이 미니멀한 무대장치 - 을 통해 이번에는 괴기스러움을 연출했다. 참고로 한국에서 보인 무대세트는 투어용으로 새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카라보스는 우리에게 악한 이미지로 익숙하지만 우리가 알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속의 아름답고 다정한 요정들마저 짙은 검정 마스카라의 화장을 하고 괴기스럽게 나타난다던가, 발레리나의 고정 캐릭터인 라일락 요정을 남성으로 설정하여 ‘라일락 백작’으로 설정한 것 등은 과연 매튜 본 답다. 오히려 오로라 공주와 정원사 레오(데지레 왕자의 매튜 본 버전)의 인물성격이나 신분 설정을 고전과 매우 흡사하게 유지한 것이 오히려 굉장히 보수적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던 관객들에게, 1막 마지막 직전에 남성성의 라일락 백작이 갑자기 송곳니를 드러내어 레오의 목덜미를 무는 장면은 기발한 반전이라기 보다는 이야기를 짜맞추기 위한 억지설정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 무리가 아닌 것이 우리는 기존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나오는 요정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에 아무리 검정 눈 화장이 도드라진 것이 화장이 주는 캐릭터에 대한 암시를 단지 설정보다는 ‘마음에 안 드는 분장’ 정도로 간과 했을 것이다. 게다가 “잠자는 숲속의 미녀”라고만 명명한 한국어 제목도 문제가 됐다. 우리가 놓친 부분은 한국에서 소개되지 않은 이 제목의 부제다. 정식 제목은 ‘Matthew Bourne’s 『Sleeping Beauty - Gothic Romance』’로 우리가 부제목을 간과한 부분 - 바로 이 디테일함이다.
사설이지만, 국어와 외래어의 장벽이 서서히 허물어져가는 오늘날임에도 우리가 외래어, 특히 영어를 여전히 어렵게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디테일이다. 물론 한국어가 가지고 있는 표현의 풍부함은 영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다양하지만 아날로그로 비견되는 뜻글자인 한글에게는 디지털과 같은 소리글자에 있어서 중요한 문법의 규칙을 간과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외국어로 협상할 때 우리가 번번이 상대방에게 지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고딕’이라고 하면 보통 건축양식을 떠올린다. 하지만 18~19세기의 괴기스런 모험담을 뜻하기도 하는데 매튜 본은 이러한 분위기를 표방하여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뱀파이어와 좀비로 대표되는 요즘 시대의 트렌드를 반영하여 한마디로 트렌디 춤극을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제목이 너무 길다고 생각하는 발상으로 부제목을 삭제한 것은 작품 뿐 만아니라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시킬 수 있으며 관객들에게도 혼란을 줄 수 있음을 경험한 공연이었다.

매튜 본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 고딕 로맨스』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금슬은 좋지만 자녀가 없던 왕과 왕비에게서 생긴 오로라1), 다른 요정들은 초대를 받았으나 소외된 카라보스가 격분하여 오로라 공주의 16살이 되는 해에 물레 바늘에 찔려 죽도록 저주를 걸었으나 라일락 요정이 그 저주를 오로라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공주에게 입을 맞추어야만 잠에서 깰 수 있도록 바꾸는 등의 샤를 페로의 고전 이야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배경과 시간대를 구체적으로 영국의 1890년으로 설정했다. 바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초연된 해를 매튜 본은 간과하지 않았고 이를 숨은그림찾기처럼 작품 속에 반영한 재치가 돋보였다. 그리고 오로라 공주가 100년 동안 잠을 자다가 갑자기 나타난 데지레 왕자의 입맞춤으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오랫동안 잘 살았다고 끝내는 기존의 이야기를 지양하여 100년의 약속을 지킨 순박한 청년의 지고지순함을 통해 그리고 결국 이들 모두 뱀파이어가 되어 ‘늙지도, 죽지도 않고, 행복하게 잘 산다더라’라는 그럴듯한 논리성과 디테일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이번에 또한 눈에 띠는 것은 ‘시스템 안무’라 명명 할 수 있을 만큼 곳곳에서 매튜 본의 전작의 표현법을 발견할 수 있는 그만의 독특한 안무 방식이다. ‘자기표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드벤처스 인 모션픽처스(Adventures in Motion Pictures)2) 시절에 보여주었던 초기작품 『늦게 피는 욕망(Late Flowery Lust, 1993)』 중에 나오는 테니스 장면을 연상시키는 춤을 궁정 뜰 장면에서 보여주었고, 『하이랜드 플링, 낭만적 발레소품3)』에서 보여주었던 숲속 정령들의 춤4) 그리고 작은 날개를 단 의상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카라보스의 하수들이 입은 의상은 『백조의 호수』의 백조들의 의상과 흡사하며, 오로라 공주의 등장 때 쓰이는 넘버를 카라보스의 아들 카라독(Caradoc)이 궁정 뜰에 등장할 때 사용하는데, 무대 한 가운데에서 등장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곧장 오로라 공주에게로 들이대는 장면도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에서 ‘낯선 남자’의 등장과 흡사하다.
그리고 100년 후 후드차림의 레오에 의해 오로라 공주가 깨어난 후 카라독의 부하들에 의해 곧장 공주로부터 격리되는 장면은 『호두까기인형! (1992)』에서의 호두까기 인형이 기절했다가 클라라에 의해 깨어났지만 슈거와 프릿츠 남매의 계략에 의해 격리된 것, 카라독이 오로라 공주와 강제 결혼식을 치르기 위한 식장에서 레오와 라일락 요정이 카라독 일행과 벌이는 대결의 춤 구도역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2막 무도회에서 왕자와 낯선 남자가 벌이는 ‘경쟁의 춤’ 이미지가 보이며, 카라독이 침대위에서 위협적으로 오로라 공주를 내려다보며 공주는 머리를 감싸고 무릎을 꿇은 채 카라독을 쳐다보는 구도도 『호두까기인형!』 그리고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들이 악몽을 겪을 때 취하는 동일한 구도를 그대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안일함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지막 부분의 강제 결혼식 식전의 의식 장면의 춤이 너무 정형화 되어 보여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중 ‘스완크 바(Swank Bar)’ 장면처럼 좀 더 대중 춤 요소가 강한 자유스런 동작의 가미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어떤 답답함이 느껴진다. 모르긴 해도 차이코프스키 3대 발레곡을 재해석하는 시점에 이 작품은 모든 매튜 본 작품의 총 결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매튜 본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 고딕 로맨스』가 단순히 전작의 구도를 나열하는데서 그친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새로운 시도를 이 작품에서 보여주었는데, 하나는 무대 상단에 수평 무빙워크설치다. 좌, 우로 움직일 수 있도록 이중으로 설치하여 발을 사용하지 않고도 요정 배역들이 움직이며 물 흐르듯 시간여행을 하는 작품의 이미지로 창조해냈다. 두 번째는 아기 오로라공주 배역을 인형으로 처리한 것이다. 일본의 분라쿠 인형극의 형식을 차용한 것으로 『호두까기인형!』에서 ‘중국인의 춤’까지도 금발의 ‘머쉬맬로우 소녀들’로 설정을 바꾸는 등 모든 원작의 배경을 영국화 시키는 매튜 본의 본의 아닌 철칙을 부분적으로 깬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매튜 본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 고딕 로맨스』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은 이유는 어찌 보면 재해석 면에서 너무 앞서 나가지 않은 절제미에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이유인지 이번 공연에는 자녀동반 관객들이 종종 눈에 띠어 가족극의 인상을 주며,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만큼의 격렬한 반응보다는 안정적인 호평을 받을 수 있던 것 같다. 대신 ‘너무 상업적‘ 이라는 평가는 이번에도 춤계에서 간간이 들을 수 있었다.

뉴 어드벤처의 전신, 어드벤처스 인 모션픽처스(AMP)의 창단 멤버이자 매니저였으며 특히 AMP라는 이름을 짓는 결정을 한, 현 영국 『댄스 엄브렐라 축제(Dance Umbrella Festival)』의 예술 감독 엠마 글래드스톤 (Emma Gladstone)이 7월 중순 한국을 찾았다. 바로 몇 주 전에 뉴 어드벤처스가 내한했다는 말에 “소식을 들었다”며, 다양한 한국관객들의 반응이 다양함에 “보통 매튜 본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어있다. 그런데 춤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인 것은 본국인 영국도 마찬가지인듯 하다. 이어 “하지만 그는 굉장히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내 생각에는,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것이 흥미롭다. 컨템포러리 댄스 출신으로 이렇게 큰 인기를 갖는 안무가는 드물다. 그래서 나는 그의 작업방식을 굉장히 존중한다5). 나와는 취향이나 리서치 스타일이나 아티스트를 고르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는 굉장히 특별한 창작자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Sir)의 작위를 받았다!”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듯 영국화시키고 있는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언제나 흥미 있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 매튜 본이 세계적인 인물인 것은 작품에 대한 세계의 관객들과 평단의 호평 때문이지만 이에 앞서 일반인들을 극장에 끌어들였고 관객들을 춤을 즐기게 만들었으며 남성무용수들의 위상을 높여놓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언제든 언급해도 지나침이 없다. 이렇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상업성과 논란을 일으킬만한 전략이 필요하다. 예술성만으로 일반인을 극장으로 끌어당기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의 비애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을 덮어놓고 칭찬을 하거나 너무 상업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세계적 경제 불황과 특히 브렉시트로 인한 혼란과 불안 그리고 춤계의 정체 시기에서 이렇듯 활발하게 젊은 무용수들이 마음 놓고 전 세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체가 또 어디 있을까. 매튜 본은 동시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모티브를 제시하며 뜬구름 잡는 식의 동화 혹은 고전발레의 이야기를 현실감 있는 트렌디 드라마로 바꾸었다는 것이 어찌 보면 여느 컨템포러리 댄스보다 더 컨템포러리 정신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매튜 본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 - 고딕 로맨스』는 후세에는 2013년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니까.

모처럼 뉴 어드벤처스의 내한공연 중에는 새로운 무용수들로 변화된 무대가 단연 눈에 띠었다. 그리고 공연 후에는 무엇보다도 변화된 부분은 관객의 모습이다. 특히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로 내한했을 때 무대 앞까지 달려나와 기립박수를 치고 장미꽃을 던지고 분장실 입구나 극장 출입구에서 삼삼오오 기다리던 극성팬들이 만 6년 동안 뉴 어드벤처스가 내한 공백 기간을 가진 사이에 사라졌다는 것이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들은 여전히 이번에도 뉴 어드벤처스 공연을 관람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의 배우자 그리고 자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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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부분에서 왕과 왕비 사이에서 아기가 태어난 것인지 주운 아기인지 애매하게 설정되었다.
2) 뉴 어드벤처스의 전신
3) 「레 실피드」의 재해석 작품
4) 한손은 머리에 얹고 나머지는 길게 뻗은 이 동작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2막 백조 군무에서도 응용된 것이다.
5) ‘웃기는 무용단 (the funny company)’이라고 알려진 AMP와 서로 추구하는 점이 달라 창단 초기의 멤버들이 다수 결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