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춤기행

목적 없는 것이 목적인 여행은 내 기억에 처음인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모든 여행이 전공인 춤과 관련된, 예를 들어 무용단 공연일정이 있거나, 해외의 공연 페스티발, 연수 프로그램, 학술대회 참가 등의 목적이 있었다. 그런데 계획에 없던 여행 제의를 받은 건 거의 두 달 전 무용하는 후배가 늘 같이 다니던 멤버들 중 한 명이 남편의 질투로 불참하게 되었다며 동행을 제안했다. 일행 중 두 명은 안면만 있었지만, 나는 질투할 남편도 없고 해서 개의치 않고 수락했다. 아마 지난 몇 년간 융복합 공연 프로젝트, 이와 관련된 논문 투고, 소장직을 맡고 있는 트랜스미디어 연구소의 행사 일정 등을 진행하면서 바쁘게 지내 왔다는 생각에 “일단 떠나자”에 한 표를…. 난 “이태리 여행이 처음이야”라고 하면 주위의 시선이 왠지 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듯 한 게으름의, 혹은 무지한 소행이라고 질책하는 듯 했다. 빨리 갔다 와야 될 것 같다는, 한편으로는 숙제를 하러 가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 대도시를 포함하지 않았다는 프로그램이 무엇보다 나를 설레게 했다. 나에게 도시는 뉴욕으로 충분하다. 피렌체, 앗시시, 시에나, 몬탈치노, 산 마리노, 몬테풀치아노, 베로나, 베니스 등 그 이름만으로도 중세의 정기가 느껴지는 그런 곳들이었다. 이 모든 곳에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성당과 광장’이다.
평생 볼 성당을 다 보고 온 느낌이다. 성당에서 보여지는 웅장함은 신자가 아니라도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느끼게 하고, 그 섬세한 내부의 구조와 벽화 등은 예술로 승화되어 일반 예술품과는 다른 성스러움 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가는 곳 마다 서 있는 성당은 점점 건축물로 보이기 시작하였고, 이성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 모든 위대함이 많은 인간의 희생의 댓가가 이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으나, 그곳에서 받았던 감동이 사라질까봐 애써 그 비판적 마음을 지운다. 하지만 때 맞추어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는 여전히 들을 때 마다 눈을 감고 감동으로 심장의 박동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기도가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성당꼭대기 탑에서 들리는 종소리의 마력이다. 아마도 여행기간 중 평생 할 기도를 다 한 것 같다. 기도의 내용은 기억할 수 없지만….
성당을 떠나 골목을 이리 꼬불 저리 꼬불 지나다 보면 꼭 만나지는 광장은 유럽 시민 사회와 문화를 떠오르게 한다. 텅 비어 있는 넓은 광장 주변에는 유럽 하면 떠오르는 야외 카페로 예외 없이 둘러 쌓여있다. 인파가 몰려있는 광장에서는 한 그룹의 이태리 노인 분들이 합창을 연습하고 있어 먼발치에 있는 카페에 앉아 있던 우리에게도 그 합창 소리가 들려 왔다. 이태리가 느껴졌다. 옆 마을의 광장은 텅 비어 있어 갑자기 한산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말을 탄 중세의 기사들이 여기저기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한 환상을 느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내가 중세로 가고 그들이 현세로 온 것 같은 충돌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마 이러한 환상은 그 시대로 가고 싶은 나의 의지가 만들어낸 감정의 과장일까. 아니면 진정한 몰입일까. 어쨌든 광장 안에서 중세와 현대의 시간적 교류를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무어라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다. 느낌이니까.
작은 도시들을 뒤로 하고 남유럽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전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들, 밝은 태양, 마치 먼지가 전혀 없는 듯한 청명한 공기 등은 사람의 희생을 대가로 이룩한 성당의 웅장함이나 광장에서 표현되는 정의 등이 줄 수 없는 자연의 선물이다. 포도 밭, 밀을 베고 난 넓은 평원, 올리브 밭 등을 지나면서 저절로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런 가운데 해바라기 밭을 지나면서 차분히 달아오르는 흥분감이 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흔한 취향이 아닐 수도 있으나 가장 좋아하는 꽃이 해바라기 이다. 내 집에는 이곳저곳에 그 꽃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고 숨어 있기도 하다. 노란색이다 보니 잘못 배열하면 세련미를 추구하기에 자칫 촌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바라기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여배우 소피아 로렌을 그래서 좋아한다. 몇 년 전 「나인」이란 뮤지컬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어머니로 출연하여 그녀의 매력을 또 한 번 발산했다. 물론 젊은 시절의 야성적 섹시미와는 다른 멋있는 여성으로서의 당당함을 여전히 내 뿜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 박진감 있게 느껴졌던 이태리의 골목골목을 자동차로 누비는 장면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해바라기 하면 소피아 로렌이 연상되는 것처럼, 모든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통해 성취하고 싶어 하는 대중의 기억에 남는 존재감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린 수상도시 베니스를 떠나며 호텔 뒤 정원의 페르시안 텐트 안에서 낙원처럼 즐긴 여유로운 책 읽기의 감흥,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매니저인 건축가 김은정이 차분히 들려주었던 한국 프로젝트의 테마인 「파-게임(Far-Game)」의 작품을 설명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성당에서의 무조건적인 기도, 광장에서의 중세 기사와의 만남, 해바라기 밭에서의 소피아 로렌과의 만남, 물 위의 도시…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